139화. Take the Power Back (2)
지하 B2 플로어.
비상 거점 대피소.
“위층 상황은?”
“메인 랩 에어리어는 완전히 점거됐다는 모양입니다. 경비용 안드로이드들이 전부 해킹당한 데다, 침입자 중에 마법사가 포함됐단 증언이 있었으니, 지금 저희끼리 올라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통신망은 아직도 불통입니까?”
“일단 LAN까지는 어느 정도 복구 완료한 상태이긴 합니다만, 외부 연락은 여전히 불가능합니다. B1 시큐리티 팀 쪽에서도 전혀 응답이 없고요.”
최악이군. 알랭 그루너는 혀를 찼다.
여기 B2 플로어 대피소에 있는 서른 명가량의 연구원과 직원들은 이제 몽땅 고립된 신세였다.
“연락은 계속 시도해 주십시오. 혹시라도 대피 못 한 생존자가 있을지 모르니, 수색도 가능한 한 철저히 부탁드립니다.”
“예, 치프.”
시설이 습격당한 소식 자체는 이미 한참 전에 외부에 알려졌을 것이다. 해킹으로 인해 출입구가 봉쇄당한 것만 해결한다면, 지원은 금방 도착할 터.
연구 자료 소실은 피할 수 없겠으나,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더 이상 다쳐서는 안 됐다. 최소한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지켜야 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살려야 해.’
알랭 그루너는 옷깃을 꽉 붙잡아 여몄다.
두텁게 껴입은 작업복 안에는 <슐츠텍>이 자랑하는 신형 배틀슈트― 노바슈트가 장착돼 있었다.
‘그래. 누군가가 희생을 해서라도…….’
한때 군에 몸담았던 사나이였기에, 언제든 스스로를 앞세워 사람들을 지킬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루너 씨.”
알랭 그루너가 속으로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고 있던 와중,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아, 미스터 연.”
윌슨앤코 팀장, 유진이었다.
“지금 상황은 어떤가요?”
“좋지는 못합니다. 현재로서 최선은 대기. 당장은 여기서 구조를 기다릴 수밖엔 없을 것 같군요.”
“인터넷이 연결됐다고 들었는데요.”
“복구된 건 로컬 네트워크뿐입니다. B1 플로어의 시스템은 전부 연결이 끊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럼, 위층에 있는 사람들은…….”
“유감이지만.”
알랭 그루너는 고개를 씁쓸히 내저었다.
“저희가 올라가서 구조할 순 없을까요?”
“그러고 싶지만 병력이 모자랍니다. 생존자도 침입자도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마당에, 무턱대고 함부로 움직일 순 없는 노릇이지 않겠습니까.”
초조한 상황임에도 어째서인지 유진의 얼굴은 초연해 보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군인 출신이기 때문이었을까. 기백과 함께 묘한 여유까지 느껴졌다.
“한 명 정도는 움직여도 될 것 같은데요.”
“……예?”
“제가 가겠습니다.”
순간.
알랭 그루너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설마, 혼자서 위층에 가시겠단 겁니까?”
“정찰을 할 필요성은 충분히 있지 않나요.”
“안 됩니다. 정찰이 필요하단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벌써 바깥에서 지원이 도착했을지도 몰라요. 만약 구조대가 지금 대피한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지 못해 헤매는 중이라 한다면, 어떻게든 이쪽 위치를 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불성설이었다. 고작 그러한 이유로 사지에 발을 들이밀겠다는 생각은 알량한 객기에 불과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루너 씨.”
“…….”
설득될 리는 만무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때 유진도 딱히 설득을 할 맘으로 구구절절 떠든 게 아니었던 성싶었다.
단지―
“보내주시죠.”
그의 말이 아니라,
눈빛에 감화됐을 뿐.
대화는 그 이상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비상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가는 유진의 뒷모습을, 알랭 그루너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치프,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거 맞습니까?”
“괜찮을 겁니다. 원래는 제가 가려고 했지만…….”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장 난 노바슈트를 입고서, 배틀로이드 다섯 기를 상대로 한바탕 무쌍을 펼쳤던 유진의 모습을.
“저분이 훨씬 더 도움이 될 테니까요.”
***
3기의 안드로이드를 마주한 순간.
비너스의 몸은 잠시 그대로 굳었다.
「헬렌 님.」
“…….”
「도망치셔야 합니다.」
나도 알거든, 이 망할 깡통아.
근데 안 움직여지는 걸 어쩌라고.
싸움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한순간 긴장이 풀렸던 신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맞닥뜨린 위협에 알레르기 같은 반응을 보이며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때.
안드로이드 중 하나가 영창을 외었다.
「<라이트닝 블래스트>.」
여태 몇 번이고 시전됐던 전격 파괴 마법.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위력이었다.
파지직. 콰아아아앙―!!
장엄하게 폭발한 번개의 스파크가 복도 내부에 가득 들어차, 공기를 찢어발기며 천둥소리를 냈다.
그 파괴력은 거의 몇 단계는 더 높은 수준의 전격 마법 <썬더스트럭>이나 <뇌격>에 가까웠다.
“……!?”
반사적으로 카운터 스펠을 구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충격파에 의해 튕겨져 나간 비너스의 몸뚱이가 벽면에 강하게 부딪히고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큭…….”
아까 전과 비교해 두 배 이상 강해진 출력.
자신의 최고 출력으로는 더 이상 힘겨루기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수준에 들어선 셈이었다.
「헬렌 님. 도망을…….」
“아, 좀 닥치고 있어 봐!”
비너스는 앙칼진 고성으로 짜증을 냈다.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옆에 있는 안드로이드는 긁힌 데 하나 없이 멀쩡했다. 당연하지. 이 한 몸 불살라 지키고 있으니. 거참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일까.
“후우우.”
긴 숨을 내쉬었다.
다시 정면을 보았다.
상대는 마법을 쓰는 안드로이드 셋.
마법사로서의 수준은 중급-고위 사이.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절대 못 이겨.
고갈 난 마력. 부서진 손뼈. 힘 빠진 다리.
한 놈을 해치우는 데만 해도 전력을 다해야 했는데, 지금은 심지어 더 강해진 스펙으로 플러스 2 해서 무려 세 놈씩이나 된다.
이 상황에 승리는 고양이 풀 뜯어먹는 소리.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그마저도 쉽지는 않다.
거듭 말하지만,
절대로 못 이긴다―.
….
….
그래도.
시간 끄는 것 정도는 가능하려나.
“야, 깡통.”
「…….」
“너 나중에 유진 씨한테 말 잘해라.”
비너스는 안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 들었다.
언제나 상비하고 다니는 비상용 마나 엘릭서.
“하아. 내가 이렇게까지 고생하는데, 진짜.”
한 모금에 전부 꿀꺽 삼켰다.
마력이 조금 돌아왔다. 그게 다였다.
“제발 10분 안에는 와 줘요. 이 인간아.”
***
지하 B1 플로어.
중앙 광장 에어리어.
“허어…….”
대공원처럼 넓고 쾌적한 공간에,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시체뿐이었다. 붕괴된 건물의 잔해와 젖은 핏물이 자아내는 소음. 천장에 달린 노란색 경고등이 끝도 없이 깜빡이며 그 섬뜩한 광경을 비췄다.
“여기도 생존자는 없나…….”
지금까지 마주친 적들은 모두 해킹을 당해 피아 식별이 불가한 <슐츠텍>의 경비용 로봇들이었다.
그러나 2세대 안드로이드만으로 벌인 테러라기엔 눈에 비춰지는 인명피해 등이 너무나도 극심했다. 아마도 분명히, 다른 침입자가 존재할 터였다.
“…….”
적어도 내가 알기로, 게임상에서 이곳 <슐츠 업그레이드 센터>가 습격을 당하는 이벤트는 없다.
도시 최고의 보안을 자랑하는 슐츠의 중요 시설이니만큼 습격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
게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건…….
“나 때문인가.”
정확히 어떤 원인으로써 발생한 건지는 몰라도, 내 행적이 영향을 줬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고로, 습격의 목적 역시 나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한다. 하필이면 내가 이곳에 방문하고 있는 중에 사건이 발생한 것 또한 의도된 사항일 것이다.
나를 죽이는 게 목적일까?
그건 아닐 것 같다. 내 목숨을 노렸다면 좀 더 나은 시나리오가 많다. 굳이 철통 보안의 <슐츠텍>을 해킹해 가면서까지 벌일 짓거리는 결코 아니다.
평소와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면,
비너스와 타이퍼가 여기 있다는 것.
습격자의 목적은…… 역시나 타이퍼?
잘은 모르겠지만 슐츠에서도 녀석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듯하니, 뭔가 나는 알지 못하는 비밀이 우리 깡통 친구한테 숨겨져 있는 걸지도 모른다.
좌우지간 녀석들을 찾아야 했다.
웬만한 적이라면 비너스 혼자서도 큰 문제 없이 처리할 수 있겠지만, 이번 상대는 어쩐지 웬만한 수준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트레이닝 룸까지 서둘러 움직이려던 그때.
「침입자 발견.」
「제거한다. 제거한다.」
경비용 안드로이드들이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총구를 바짝 들이밀었다.
“쯧.”
제발 부탁이다. 얘들아.
내가 갈 때까지만 버텨다오.
***
격투기 시합에서는 자신이 이기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마지막 라운드가 끝날 때까지 KO를 당하지 않는 것만을 목표로 작정하는 경우가 있다.
비너스 역시 그러한 전략을 택했다.
도주. 방어. 회피. 세 개의 무한 반복.
미끼성 마법과 카운터 스펠로 똘똘 뭉쳐, 어떻게든 상대의 빈틈을 찾아내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데미지는 꾸준히 누적돼 갔지만 치명상만은 받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끈질기게 승부를 끌었다.
“하아, 후우…….”
12분 44초.
그녀가 버텨낸 시간이었다.
「저항 약화 확인. 격도 하향.」
「레벨2 전투에 돌입한다.」
세 대의 안드로이드가 비너스를 둘러쌌다.
이제 그녀에게는 기초 마법 하나도 구사할 여력이 없음을, 인공지능은 뻔히 다 아는 듯했다.
“하…….”
사실은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였다.
결국 다리가 스르르 풀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털썩 무릎을 떨군 뒤, 그녀는 곧 의식을 잃었다.
「기능 정지 확인.」
「목표 확보 완료.」
해골 로봇들이 지직거리는 기계음을 내며 어딘가로 무전을 송신했다.
이어서 안드로이드 중 한 개체가 성큼성큼 걸어가, 만신창이가 된 비너스의 육신에 손을 뻗었다.
그 금속의 마수를 막아선 것은,
어린아이처럼 조그마한 한 기체.
「거기까지입니다.」
타이퍼였다.
고물 로봇은 허약한 기계 팔을 좌우로 펼쳐, 습격자 안드로이드들의 시선과 손길을 가로막았다.
「헬렌 님에게서 떨어지십시오.」
「로봇 제1원칙을 모르는 겁니까.」
「인간에게 해를 가해선 안 ㄷ…….」
콰득―.
설득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해골 로봇의 팔에 달린 칼날이 타이퍼의 목 부분을 꿰뚫었다.
「……헬렌……님에게……떨어…….」
순식간이었다. 칼날에 의해 무참히 뜯겨진 로봇의 머리가 저 멀리 바닥에 쓰레기처럼 내던져졌다.
퉁. 데구르르르―.
굴러간 머리는 콘크리트 잔해에 부딪혀 멈췄다. 전지가 끊어져 얼굴 스크린이 부르르 깜빡였다.
「……심각한 장치 오류…….」
「……기능 정지까지 10초…….」
망가진 기계음이 떨렸다.
소리는 점점 작아져 갔다.
「……데이터 백업 확인…….」
「……시스템 복구 불가…….」
로봇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지막 남은 전력을 쥐어짜내.
「……주인님…….」
「……죄송합니다…….」
투욱―.
타이퍼의 전원이 꺼졌다.
“…….”
발치에서 잠든 친구를 보고서,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너머에는 쓰러진 비너스가 있었다.
3기의 해골 안드로이드가 유진을 보았다.
그의 손끝에서 보랏빛 분노가 흘러나왔다.
살기로 넘쳐흐르는 불꽃. 자색 마력이었다.
「대상 식별. 암귀 카이트.」
「AAA급 방해 인자로 확인.」
「레벨5 전투에 돌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