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Electric Warrior (5)
난데없는 정전에 우리는 당황했지만, 사태가 길게 가지는 않았다. 곧 비상 전력이 들어왔다.
“저기, 방금 해킹이라고……?”
“우선은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루너 씨는 무전을 몇 차례 더 주고받았다. 헌데 도중에 흠칫 놀라더니, 황급히 품에서 PDA를 꺼내 단말기 자판을 한 손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왜 그러시죠?”
“시설 보안이 통째로 뚫렸습니다. 출입 통제 시스템을 완전히 점거당해서, 관리자 권한으로도 제어는커녕 CCTV 확인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그렇다는 건…….”
“시큐리티 게이트가 먹통이 돼 버렸으니, 연구소 내부로 누군가 침입했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철벽 그 자체인 <슐츠텍>의 보안이 이리도 쉽게 뚫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라이벌 기업의 소행일까요?”
“아마도 그렇겠죠. 단순한 테러리스트나 범죄자라면 굳이 보안 시스템을 뚫어 가면서까지 이곳을 공격할 것 같진 않으니, 분명히 뭔가 노리는 게 있을 겁니다.”
그루너 씨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금 뒤, 차분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댔다.
“……이브…….”
눈앞에 있는 안드로이드를 바라보며.
석연치 않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상하군요. 지금 이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 중에서 그나마 가치 있다고 할 만한 것은, 까놓고 말해 이브와 관련된 것뿐입니다.”
안드로이드 마법사 프로젝트.
확실히 내가 보기에도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긴 했다. 그런 기상천외한 존재는 게임 속에서도 <나인서클>의 콘스탄틴을 제외하면 아예 없었으니까.
“만약 해킹범의 목적이 ‘프로젝트 이브’였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연구소 보안을 마비시킬 정도의 해킹 실력이라면, 실험 자료나 샘플 탈취쯤은 훨씬 간단하게 해낼 수 있을 테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다. 기업 비밀을 노린 첩보 공작치고는 너무 요란하며 쓸데없이 공격적이다.
“해커란 족속들은 이따금 자기 과시적인 면모를 보이기 마련이지만, 그런 성향을 감안한다 치더라도 이렇게 대놓고 위험한 짓을 무턱대고 저지르진 않습니다.”
“놈들에 대해 잘 아시네요.”
“실랑이 벌인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저희 <슐츠텍>은 언제나 만천하 해커들의 표적이었습니다. 허나 제가 알기로, 보안이 완벽하게 뚫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군요.”
그루너 씨는 말했다.
“미스터 연. 견학은 여기까지. 지금 바로 세이프 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소동이 진압되고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는 거기서 대기해 주시길.”
“타이퍼랑 헬렌은요? 연락할 수 있나요?”
“인트라넷 상태가 안 좋아서 메시지가 닿질 않는군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시설 각 구역마다 안전 담당 책임자가 있으니까요. B1 플로어에 계신 직원분도 지금쯤 대피했을 겁니다.”
나는 서둘러 대피해야 한다는 그루너 씨의 말에 수긍하고 얌전히 그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다.
당연하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스멀스멀 피어오른 의문점 하나가, 기어코 사고의 틈을 메꾸고 머릿속에 그대로 잠식했다.
……해커가 <슐츠텍>의 연구소를 공격했다.
……프로젝트 이브의 자료를 노린 것은 아니다.
….
….
그렇다면 놈은,
무엇을 노린 거지?
***
B1 플로어. 트레이닝 룸.
오전 교육 일정이 모두 끝나자, 테스트에 참여했던 안드로이드들이 하나둘 강의실에서 퇴장했다.
“헤이, 깡통.”
강의실 문밖으로 쭈뼛거리면서 걸어 나온 타이퍼 앞에, 심드렁한 표정의 비너스가 나타났다.
「헬렌 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대타야. 리타 선배님은 오늘 아파서 못 왔어.”
「그렇군요.」
“유진 씨도 오긴 했는데, 아까 슐츠 매니저 오빠랑 둘이 밀담하러 가서. 뭐어, 좀 있으면 오겠지.”
「주인님도 와 계신 겁니까.」
「(◉⌓◉)」
유진이 자기를 보러 왔다는 소식에 타이퍼의 얼굴 스크린이 변했다. 어째 기죽은 듯한 표정이었다.
“뭐야, 깡통. 왜 죽상이야?”
「현재 상황을 보고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허?”
「주인님께 실망을 끼쳐 드릴까 봐 걱정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곳에 온 뒤로 어떠한 유의미한 성과도 거두질 못하고 있습니다. 본래 목적과는 동떨어진 전개. 제자리걸음의 연속입니다.」
로봇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는 동작’이 자신감 결여의 표현이 된다는 사실은 학습을 통해 알고 있는 바였다.
“오구오구, 우리 깡통이 이거, 유진 씨한테 미움받을까 봐 무서워졌구낭?”
「…….」
“하긴 그 양반, 성격은 개차반에 완전 이득충 소시오패스라서, 지한테 도움 안 될 것 같으면 바로 그냥 손절하고 내치는 스타일이긴 하지. 안 그래도 너 유지비 땜에 그동안 적잖이 곤란했겠다, 이참에 확 폐기해 버릴지도 모르겠네~ 풉킥킥.”
비너스는 타이퍼를 골려줄 셈으로 일부러 과장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악의투성이 비아냥에 불쌍한 로봇의 표정은 더더욱 시무룩해졌다.
“그러게 왜 쓸데없이 자진해서 일을 벌이고 그런 거니. 덕분에 나까지 귀찮게…….”
그때.
무언가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투우웅―.
소리가 울렸던 바로 그 순간.
시설 내부의 조명이 전부 꺼졌다.
“응?”
정전이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두어 번 껌뻑이는가 싶더니, 곧 비상 전원이 들어왔다.
“뭐지?”
이어서 들려온 안내 방송.
「슐츠 업그레이드 센터에 계신 여러분.」
「시스템의 일시적인 오류로 인해 정전 상황이 발생했음을 알립니다. 지금부터 각 구획 안전 담당자의 안내에 따라 대피해 주시길 바랍니다.」
비너스는 그걸 듣고서 갸웃했다.
「헬렌 님. 대피해야 한다는 모양입니다.」
“나도 들었어. 근데…… 뭔가 이상한데. 정전 가지고 무슨 대피까지 해? 지진 난 것도 아니고.”
의아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안내 방송에 따르는 게 최선인 듯했다. 마침 복도 저편에서 연구소 직원이 비너스와 타이퍼를 부르고 있었다.
“거기! 이쪽으로 오…….”
허나,
끝까지 부르진 못했다.
콰직―!
날카로운 물체가 뼈를 파고드는 소리가 났다.
연구소 직원의 두개골을 찢고 들어간 소리였다.
머리를 꿰뚫린 직원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바닥 위로 흘러나온 핏물과 뇌수를, 거칠게 회전하는 사이렌의 오렌지색 불빛이 불길하게 비췄다.
철컥―.
촛불 같은 조명에 의지한 어두침침한 복도.
철컥. 철커덕―.
기계적인 발소리와 함께, 피로 적셔진 칼날을 지닌 존재가, 모퉁이 너머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안드로이드였다.
금속 뼈대와 인공 장기를 드러낸 흉악한 외양.
붉은색 레이저가 깃든 안구 카메라를 가진, 마치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나 등장할 법한 기계 해골.
「목표 확인.」
소름 돋는 광경이었다. 수십 년의 용병 생활 동안에 다져진 비너스의 감이 부리나케 소리쳤다.
―저건 위험하다고.
“야. 깡통.”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다분히 침착했다.
“내 뒤에서 꼼짝 말고 있어.”
전투에 있어 가장 기본은 적을 파악하는 것.
비너스는 10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상대를 빠르게 살폈다.
‘저런 건 처음 보는데…….’
대對 안드로이드전 자체를 많이 겪어 보진 않았지만, 저런 기체는 비슷한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겉모습만 봤을 때 그나마 비슷한 것은 <스테이트 아머리>의 전투형 안드로이드― 네오 인트루더.
‘무기와 외골격에 특수 합금을 입힌 것 같긴 하지만, 튼튼하기만 할 뿐 그렇게까지 훌륭한 재질은 아니야. 안티스펠 처리를 한 적도 일체 없어.’
일단 겉으로만 봐서는, 상대 안드로이드 기체는 마법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보였다.
저래서야 마법사를 상대로는 그야말로 알몸 상태로 덤비는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다. 간단한 기초 파괴 마법이라도, 저것에 치명타를 입히기엔 충분.
‘완드도 없지만…… 해볼 만해.’
안드로이드가 한 발짝 다가온 순간.
비너스는 곧바로 선제공격을 가했다.
“<라이트닝 볼트>.”
가장 기본적인 전격 속성의 파괴 마법.
금속과 컴퓨터로 이루어진 안드로이드에게 있어, 단언컨대 전기 충격보다도 효과적인 공격은 없다.
파지직―!
비너스의 손끝에서 피어난 녹색 빛줄기가 작은 번개가 되어 안드로이드를 향해 뻗쳐져 나갔다.
좋은 타이밍의 기습. 가로막는 장애물도 없었다. 이대로면 공격은 틀림없이 제대로 먹힐 터였다.
그러나―
“어?”
먹히지 않았다.
비너스의 <라이트닝 볼트>는 상대에게로 뻗어지던 도중, 어째서인지 돌연 허공에서 사라졌다.
‘뭐지?’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느낌상 어렴풋이 알 수 있었던 거라곤, 저 해골 로봇이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뿐.
‘전격 속성에 내성이라도 가진 건가?’
‘아냐. 마법은 닿지 못하고 중간에 짤렸어.’
‘안티스펠 배리어가 펼쳐져 있다고 한다면…….’
다시.
비너스는 마법을 구사했다.
“<라이트닝 블래스트>.”
이번에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전격 마법.
녹색 마력이 횡으로 길게 자리하며, 번갯불의 두꺼운 줄기가 세찬 파도처럼 뿜어져 나왔다.
파지지지지직―!!
좋아. 그럴싸한 크기까지 성장시켰어.
동급 마법사에 비해 출력이 한참 떨어지는 자신이라고 해도, 전력을 다한다면 이 정도는 가능하다.
최고 출력을 가한 <라이트닝 블래스트>의 위력은 눈에 보이는 것만큼이나 강력할 것이 분명했다.
웬만한 방어는 뚫어 버릴 수 있는 파괴력. 이거라면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먹히리라.
하지만―
“어럽쇼?”
먹히지 않았다.
또다시 <라이트닝 블래스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마법이 시전 된 적이 없던 것처럼.
비너스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삐질삐질 흘러내린 식은땀과 동시에,
한 가지, 괴이한 상상이 들기 시작했다.
“……<해체 술식>……?”
그것은 마법을 해제하는 마법.
어떤 마법이 구사된 순간, 해당 마법의 술식을 역逆으로 일으켜, 그대로 분해시키는 것을 말한다.
<해체 술식>이라면 방금 상황도 설명이 된다.
마법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의 기술. 두 차례의 전격 마법이 통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치만…….’
<해체 술식>이란 것은 이론상의 개념.
설령 아우구스투스급의 대마법사라고 해도, 실전에서의 사용 가능 여부는 불투명한 기술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비너스는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해골을 닮은 안드로이드. 사람이 아닌 로봇에 불과하다. 당연히 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절대로 불가능해.
그렇게 되뇌긴 그 순간에,
그녀를 나무라기라도 하듯.
「목표물의 저항 발생.」
「레벨1 전투에 돌입한다.」
해골 안드로이드가 목소리를 냈다.
마치 사람처럼 턱관절을 움직이며.
「<라이트닝 블래스트>.」
비너스의 것과 같은,
전격 마법을 구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