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Electric Warrior (2)
웨스트록 17구역.
<도노반퓨처스> 사무실.
“오랜만에 뵙네요. 도노반 선생님.”
내가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자, 빚쟁이 고블린 저스틴 S. 도노반 씨는 나를 한겨울에 나타난 모기 새끼라도 보는 양 떨떠름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저 기억하시죠? 예전에 선생님께 60만 달러 넘게 꿔 갔던 유진입니다.”
“네놈 눈엔 내가 치매 환자로 보이더냐?”
“글쎄요. 원금 상환하기 바로 전날까지 회사로 직접 독촉 우편 보내셨던 걸 생각하면, 최소한 기억력만큼은 아직 정정하신 것 같기는 합니다만.”
“잡소린 됐고. 여긴 뭣 하러 왔냐.”
이제 빚도 다 갚은 녀석이 대체 무슨 볼일로 자기 사무실에 얼굴을 가져다 들이댔냐는 물음.
사실 질문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사채업자를 찾아온 이유가 뭐냐고 하면 그야 뻔하지 않겠는가.
“돈 빌리러 왔습니다.”
“……뭐라구, 인마?”
“다만 개인대출이 아니라 기업대출입니다. 저희 회사, 윌슨앤코에 자금을 좀 대주셨으면 하는데요.”
도노반 씨는 이제 계절을 착각한 그 모기 새끼가 기어코 자기 겨드랑이를 콕 찍어 물었을 때에 지을 법한 표정을 지었다. 쉽게 말하자면 개빡쳤다.
“회사에서 쓸 돈을 융자해 달라?”
“예.”
“너 븅신이냐? 융자가 필요하면 은행에나 쳐 갈 것이지, 왜 일로 기어 들어오고 앉았어?”
“실은 저희 회사가 대대적인 불량 기업으로 낙인이 찍혀 버려서요. 신용도가 완전히 박살 나서 대형 은행에선 아예 상대도 안 해주고, 제2금융권 쪽 애들한테까지도 문전박대당하고 있거든요.”
“아, 그래서 아무한테나 프리패스로 돈 대주는 자동문 금융인 여까지 함 찾아와 보셨다?”
“<도노반퓨처스>와는 최근까지도 신용 관계가 유지 중에 있으니까요. 개인적인 관계긴 하지만요.”
빚쟁이 고블린은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케륵 하는 소리를 냈다. 뭔가 맘에 안 들 때 혀를 차는 것과 비슷한 고블린 종족의 버릇이었다.
“여기, 융자 신청서입니다. 윌슨앤코의 기업현황과 사업계획서도 같이 첨부했습니다.”
“…….”
도노반 씨는 무척이나 언짢아하면서도 내가 건넨 서류들을 받아 돋보기안경 너머로 꼼꼼히 살폈다. 돈이랑 관련된 사항이라면 일단 무조건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야말로 고블린 특유의 기질이었다.
“얼마나 필요한데.”
“1억 달러요.”
“거기서 0을 두 개 빼도 곤란한 액수다, 새끼야. 동네 사채꾼한테 그런 큰돈이 있을 것 같으냐?”
“걱정 마세요. 돈은 있으니까요.”
“뭐?”
나는 가지고 온 물건을 꺼내 사무실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것은 암호화폐 보관용 데이터 서버였다.
“이 서버에 15억 크레딧이 들어 있습니다.”
“……뭠마……?”
“현찰로 환전하면 수수료 제하고 대충 1억 달러 조금 넘으려나요. 명의는 미정 상태라 누구라도 상관없이 바로 쓸 수 있는 돈이에요.”
이 15억은 경매장에서 훔친 장물들과 님로드 스톤 브로치를 전당포에 염가로 넘겨 챙긴 크레딧.
그리고 위대한 드래곤의 밤마실에 길잡이 알바를 뛴 대가로 받은 약간의 용돈을 더한 금액이다.
돈의 출처가 출처인지라 합법적인 거래에는 쓸 수 없다. 회삿돈으로 사용하는 것도 당연 불가능.
하지만―
자그마한 꼼수를 쓴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걸 <도노반퓨처스>에서 융자 명목으로 윌슨앤코한테 돌려주세요. 그러면 저희는 자연스럽게 이 더러운 돈을 합법적으로 쓸 수 있게 되죠.”
“날 돈세탁 수단으로 써먹겠다 이거군.”
“도노반 선생님은 왠지 그쪽으로는 꽤나 일가견이 있으실 것 같아서요. 자금 세탁 노하우가 풍부한 파트너 기업들을 추가로 소개시켜드릴게요.”
검은돈 생산은 결코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는다.
벌어들인 초기 자금은 그대로 신규 사업에 투입.
“안정적인 유통 라인이 확보만 되면 천천히 밀수품을 빼돌려 암시장에 직접 공급할 겁니다.”
“암시장에 공급자로 나선다고. 네놈 설마 <페르골리치 패밀리>의 밥술을 훔쳐 먹을 셈이냐.”
“파이가 크면 좀 나눠 먹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지금 마피아 친구들은 업계 라이벌 등장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라서 문제없을 거예요.”
“아주 확신에 가득 찬 말투구만.”
“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죠.”
지난주 화요일.
나는 <페르골리치 패밀리>의 보스를 암살했다.
허나 아직 세간에 그 사실은 공표되지 않았다.
보스의 사망으로 인한 조직의 약화 등 추후 야기될 혼란을 막기 위해, 그날 벌어진 일에 관한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페르골리치 패밀리> 측에서 최선을 다해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도 구태여 소문을 낼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놈들의 사정을 혼자서 알고 있는 것만으로, 어떻게든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으니까.
“도노반 선생님께서는 메인뱅크 자격으로 당사의 경영에 참여하는 척, 뒤에서는 암시장 진출을 적극적으로 진두지휘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만약 네놈이 진심으로 뒷세계에서 사업을 해볼 생각이라면, 준비해야 할 게 아주 많아.”
“예를 들면요?”
“일단 무엇보다도 사람. 불법적인 일에 능한 인력이 꽤 많이 필요할 거다. 그런 부류의 인적 자원은 절대로 하루아침에 모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물론, 그쪽도 이미 준비돼 있습니다.”
“……준비돼 있다고?”
“새내기 조직이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말했다.
“<헬터 스켈터>가 도와줄 겁니다.”
그리고 내 말을 듣자마자,
고블린의 표정이 확 굳었다.
“……암귀의 조직을 말하는 게냐?”
“맞습니다. 선생님도 아시나 보네요?”
“……최근에 소문을 들었지. <페르골리치 패밀리>의 보스가, 암귀 손에 죽었다 어쨌다 하는.”
“호, 그런 이야기가 돌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아르투로 페르골리치. 그 좆만 한 토깽이 자식과는 젖먹이 시절부터 질긴 악연이야. 키는 내가 쪼끔 더 컸지만, 그것 말곤 뭐 하나 놈한테 이기는 게 없었어. 공부, 운동, 연애, 어느 방면에서든 난 아주 개털리기만 했지. 결국 그놈은 뒷세계를 지배하는 마피아의 두목이 됐고, 난 달동네서 주부들 용돈이나 빼앗는 악덕 사채업자 신세…….”
페르골리치 보스와 서로 아는 사이였던 걸까.
도노반 씨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유우진. 예전부터 네놈이 수상하다고는 생각했어. 갑자기 어디서 큰돈을 주워 오기 시작한 것도, 이상하리만치 뒷세계 사정에 빠삭한 것도, 분명 무언가 엄청난 비밀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
잠깐 동안의 뜸을 들인 뒤에,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네가 암귀냐?”
나는 찰나간 침묵했다.
이후 차분히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어쩌실 건데요?”
“난 법을 싫어해. 그렇지만 내 안전이 걸린 경우는 법대로 하는 걸 선호하지. 그러니까 네놈이 정말로 암귀라면 바로 그냥 경찰에 일러바칠 거다. 살인마가 여기 있으니 빨리 와서 붙잡아 가라고.”
“제가 가만있을 것 같으신가요?”
“뭐, 뭐야. 해보자는 게냐?”
그때 도노반 씨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냉큼 일어나더니 대뜸 권투 자세를 취하며 나를 위협했다.
“더, 덤비든가! 내가 이래 봬도 한창때 좀 날렸어, 인마! 소싯적 별명이 노스네스트 그린 고블린이었다고!”
“하하, 농담입니다. 제가 선생님한테 입은 은혜가 얼마인데,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크, 크흠. 나도 농담이었다. 아무렴 내가 미쳤다고 경찰을 부를까. 돈주머니가 굴러 들어왔는데.”
빚쟁이 고블린은 자리에 도로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사업계획서를 흔들어 젖히며 말했다.
“인력이 확보됐다는 전제하에 이 사업계획은 충분히 실현성 있다.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고 한다면 네놈 회사의 신용 상태야. 이미 존나게 불법 저지르다 걸려가지고 전적이 화려하다면서.”
“예. 연방검찰에서도 금융범죄 관련 특별 관리 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 때문에 작은 꼬투리만 붙잡혀도 곧바로 압수수색까지 들어올 수 있어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건 어떻게 할 셈이지?”
“어떻게 하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감수해야죠.”
도노반 씨는 어이가 없다는 듯 케륵 소리를 내며 나를 째려봤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하여간에 정말, 달라진 게 없구만.”
“……?”
“네놈은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 녀석이 혼자 여기 들이닥쳐서는, 갑자기 100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지랄을 시작했어.”
그것은 ‘유진 연’의 얘기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이야기.
“제가 그랬나요?”
“어쭈, 치매라도 걸렸냐? 그래, 인마. 네놈이 그랬잖냐. 그 돈으로 무슨 조직을 만들겠다고.”
“…….”
“난 그때 네놈의 그 눈빛 하나만 믿고 돈을 빌려줬었다. 이번에도 한번 믿어 보마. 유우진.”
도노반 씨는 그렇게 말했다.
나를 믿었다고. 믿어 보겠다고.
과거의 나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뭘 하고 싶었을까. 뭘 하려고 했던 걸까.
뭐, 언젠가는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자그마한 호기심을 간직한 채 회사로 돌아갔다. 한여름의 웨스트록은 미칠 듯이 더웠다.
***
오후 1시.
윌슨앤코 사무실.
“앗, 그루너 씨. 오셨군요.”
익숙한 손님이 사무실을 찾아왔다.
어스테이트 최고의 기업 중 하나인 <슐츠텍> 기술지원팀의 치프 매니저, 알랭 그루너.
“죄송합니다. 저희 쪽에서 찾아뵀어야 했는데, 괜히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시게 해서…….”
“아닙니다, 미스터 연. 오늘은 일정상 제가 직접 방문하는 게 효율적으로 더 나았으니까요.”
그는 몇 달 전부터 함께 해온 우리 회사의 비즈니스 파트너다. 윌슨앤코가 멀쩡하던 시절에는 수천만 달러짜리 대형 거래를 트기도 했는데, 이후 이런저런 하청 업무나 도급 계약을 몰아준 덕분에 망하기 직전이었던 회사가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이래저래 고마운 인연이었다. (나는 그의 발목을 분지르기도 했지만, 그는 내 짓이란 걸 모른다.)
“회의실은 어디죠?”
“저기 안쪽에 있습니다.”
“짧은 미팅이라 해도 가급적 시청각 자료를 함께 보면서 진행하고 싶습니다만. 괜찮을까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스몰필드 씨, 회의실 가서 프로젝터 스크린 세팅해 주세요.”
“아, 넵.”
“타이퍼는 회의 자료 정리 좀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주인님.」
바쁘게 회의를 준비하던 도중.
문득 그루너 씨가 반응을 보였다.
“타이퍼? 잠시만요, 미스터 연. 저 안드로이드 기체, TYPE-R인 겁니까?”
“예? 아, 예. 맞아요. 원래는 엄청 낡은 고물이었는데, 저번에 껍데기랑 하드웨어랑 이것저것 사설 센터에서 몽땅 손봐서, 지금은 저 상태입니다.”
“잠깐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의아해했다.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는 그루너 씨가, 회의 직전에 굳이 쓸데없는 용무를 보려고 하는 일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흐음…… 기종 자체는 17년식 아담 RS7이지만…… 메인 AI 컴퓨터를 포함한 대부분의 시스템 모듈은 구형 그대로 탑재…… OS는 8세대, 허나 기반 언어는 어셈블리어인가…… 흥미롭군…….”
그루너 씨는 10분씩이나 되는 시간을 할애해 가며 타이퍼의 내외부를 정성껏 탐구했다.
“미스터 연.”
이윽고―
그가 내게 말했다.
“혹시 이것 좀 빌려 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