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Electric Warrior (1)
이스트포레스트 3구역.
시에라시티 아이에르 국제공항.
「손님 여러분, 아이에르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뒤 좌석 벨트 표시등이 꺼질 때까지 기다려주시고…….」
뉴욕에서 출발한 아세아항공 보잉 747 비행기가 맑고 시원한 날씨 속에서 안전하게 착륙했다.
“으으음. 그리웠던 나의 고향.”
유클리드는 찌뿌둥한 몸으로 기지개를 켰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의 대부분을 이코노미석에 앉아서 보낸지라 온몸의 관절이 굳은 상태였다.
그는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로비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자신을 마중 나온 이가 한 사람 있었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헤이, 엘리. 기다리게 했나?”
딱딱한 말투와 정장 차림의 엘프 여자. 얼핏 젠틀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껄렁한 인상을 가진 유클리드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인물이었다.
“나 없는 동안 회사에 별일 없었지?”
“없었습니다. 수년간의 적자 지속으로 인해 파산 직전이란 걸 제외한다면요.”
“이런, 경영난이 아주 심각했던 모양인데.”
“CEO란 작자가 경영은 내팽개치고 홀라당 미국으로 튀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대표도 휴가는 자유롭게 보내줘야지. 우리 회사가 보기보다 그렇게 블랙기업은 아니잖아?”
“저는 입사 후 통틀어 3일 쉬었습니다.”
“너 없었으면 우리 회사는 진즉 망했겠네.”
“말이라고 하십니까. 월급이나 올려주세요.”
“오케이. 연말 연봉 협상 때 기대하도록.”
“그전에 회사가 망할 것 같은데요.”
유클리드는 비서의 말을 웃어넘겼다.
대화 주제의 심각성과는 별개로 그의 태도는 내내 여유로우며 장난기가 넘쳐흘렀다. 마치 회사를 경영하는 일마저도 놀이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아무튼, 회사 상황이 정상화되기 전까지는 내가 직접 발로 뛰어다니는 수밖에는 없겠군그래.”
“작업할 만한 리스트를 찾아보도록 할까요?”
“아냐, 내가 알아서 찾을게. 그보다 마사지나 받으러 가자고. 반나절 넘게 좁아터진 의자에서 동상마냥 버티고 있었더니 허리가 완전 죽을 맛이야.”
“또 이코노미석에 계셨습니까.”
“이코노미석은 재밌어. 일반 서민들이랑 같이 부대껴서 가다 보면, 내가 굳이 이딴 돼지우리 같은 장소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게 실감 나면서 기분이 막 좋아지거든. 그리고 이제 비즈니스석으로 자리를 옮김으로써 모티베이션에 화룡점정을 찍는 거지.”
“대표님은 돈지랄을 참 좋아하시는군요.”
“뭐, 어차피 회사 돈으로 나가는 거니까.”
“재정 상황 때문에 당분간 영수증 비용 처리는 못 해 드립니다. 특히 그런 쓸데없는 돈지랄은요.”
“엑.”
이곳 시에라시티에서 자신의 위치는 밑바닥이었다. 물론 유클리드 진은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필요한 것은 돈과 정보.
돈으로는 정보를 구할 수 있으며, 정보로는 돈을 구할 수 있다. 둘은 그렇게 환전 가능한 관계다.
그날 밤.
유클리드는 노스네스트에 들렀다.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3구역은 거리 곳곳이 후미진 골목의 술집들로 즐비했다.
느긋하게 걷다 문득 눈에 띈 가게에 들어갔다. <펍 미드나이트>란 간판을 내건 곳이었다.
“어서 오슈.”
술집 안에 들어서자, 바텐더가 건성으로 반겼다. 바에 앉을 때까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으니,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치고는 아무래도 불친절했다.
“주문은?”
바텐더의 퉁명스러운 말투와 눈초리가 쿡쿡 찔러 왔다. 유클리드는 아랑곳 않고 입을 열었다.
“싱글 몰트 위스키. 온더락으로.”
“음료값은 선불이요.”
빳빳한 10달러 지폐는 곧 코스터와 얼음 채운 양주 한 잔으로 바뀌어 유클리드에게 전달됐다.
그가 차가운 위스키를 음미할 동안, 바텐더는 곁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천천히 훑어 살폈다.
검은 머리. 황금색 눈동자.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
“당신,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그래?”
“원래 이쪽 동네 살던 사람인가?”
“맞아. 소싯적에 요 근방에서 자주 놀았지.”
“흐음. 그래서, 무슨 볼일로 여기에 왔는감?”
바텐더가 묻자, 유클리드가 말했다.
“요새 뭔가 괜찮은 일거리는 없나?”
시선을 똑바로 쏘며 묻는 질문.
데자뷰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용병 일을 찾으러 왔나 보구만.”
“옛날부터 여기 주인장이 우수한 정보통이라고 소문이 자자했거든. 방문은 오늘이 처음이지만.”
바텐더는 말없이 유클리드를 곁눈으로 훑었다.
척 봤을 적부터, 어쩐지 그가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김새가 비슷했다기보다도, 느껴지는 아우라가 그랬다. 영혼의 색깔이 흡사했다고나 할까.
“자네, 이름은?”
“유클리드.”
그래서였을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
“크흠. 내가 요새 활동이 좀 뜸했어서.”
“우리 가게선 무경력자는 안 받아주는데.”
“가볍게 실력 테스트 정도는 해볼 수 있잖아? 아무 일이나 맡겨만 줘봐.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
득의만면한 눈빛과 목소리. 마치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아는 것마냥 확신에 들어찬 모습.
“…….”
역시나 착각이 아니다.
그 친구와 굉장히 닮았다.
“……8급이나 9급 의뢰라도 괜찮다면.”
유클리드는 미소를 지었다.
일단 첫 단추 꿰매기는 성공했다.
시에라시티에서 용병으로 살아남는 방법은 간단했다. 실력으로 증명한다. 오직 그것뿐.
얼마 지나지 않아 ‘유클리드’란 이름은 뒷세계 사람들 사이에 조금씩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를 아킴보 권총술과 쌍수 단검에 능한 시티헌터라 말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를 특이한 색채의 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사로 기억했다.
일련의 풍문에 공통된 부분은 있었다.
그가 살인을 즐기는 미치광이라는 것.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자들이야 물론 노스네스트에선 발에 차이게 흔했지만, 유클리드의 경우에는 그를 목격한 모두가 똑같은 증언을 했다.
―그놈은 사이코패스라고.
개중에는 특이한 이야기도 존재했다.
이를테면, ‘암귀 카이트’와 ‘유클리드’가 동일 인물이라 하는, 도시 괴담에 가까운 근거 없는 잡설.
“엘리, 카이트란 게 어떤 놈이야?”
그러한 뜬소문은 갈수록 여기저기를 흐르고 또 흘러, 어느덧 본인의 귀에까지도 닿게 되었다.
“D구역을 지배하는 신흥 조직 <헬터 스켈터>의 수장으로, 세간에서는 암귀라 불리는 자입니다.”
“옛날에 그 마법사 킬러? 죽은 거 아니었어?”
“암귀는 죽었다는 게 정설이었죠. 때문에 일각에서는 가짜라는 이야기도 드문드문 들리지만, 복귀 후 지금까지의 행적을 살펴보면 카이트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짜’입니다.”
<블랙 대거즈> 간부 이반 레오노프. <홍룡파> 보스 토니 웡. 디바인 마스터 스테파노 멜리에스.
살해한 인물들의 리스트만 나열해 보아도 자연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게 복귀한 후로 고작 3개월도 안 돼서 저지른 짓들이었다.
“초기에 비해 최근에는 약간 조용한 편입니다. 용병 시장에서는 가명으로 ‘유클리드’란 이름을 쓰고 다녔던 모양인데, 우연히 대표님의 활동 시작 타이밍과 겹쳐 여러 낭설이 얽힌 것 같습니다.”
“하핫, 운이 좋군. 본의 아니게 녀석의 악명을 내가 가로챈 셈이 된 거잖아.”
유클리드는 기분 좋게 재잘거리며 의자를 빙글 돌렸다. 널찍한 사무실은 전부 그의 공간이었다.
“아무튼 그치한텐 고마워해야겠는걸. 덕분에 여기저기서 일거리를 팍팍 챙겨 받을 수 있었으니.”
중소 무역 회사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기나긴 부진의 늪을 헤치고 이제 차츰 회복세에 접어들고 있었다. 돌아온 CEO의 발로 뛰는 노고 덕이 컸다.
“그 카이트란 친구,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쉽지는 않을 겁니다. 평소 가면으로 얼굴을 숨기고 다니는지라 정체는 불명. 경찰국 데이터베이스에도 신상 정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D구역이 그놈 나와바리라면서? 거기서 며칠 놀다 보면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첩정에 의하면 오늘 밤 D구역에서 <페르골리치 패밀리>와 <헬터 스켈터> 간의 항쟁 예보가 있기는 합니다만.”
“오오, 그래? 마침 잘됐네. 새로 배운 기술 테스트도 해볼 겸 이따 잠깐 들러봐야겠어.”
“대표님. 놀지 말고 일을 하시지 그래요.”
“정찰이야, 정찰. 우리도 슬슬 직원 늘려야 하잖냐. 괜찮은 인재를 찾으면 헤드헌팅 해 올게.”
그리하여.
노스네스트 D구역.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거리의 핏빛 시체들 틈바구니에서, 유클리드 진은 고고히 자리해 있었다.
도그아이드 킴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불청객을 응시했다. 시간이 멈춘 듯 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어때? 나랑 같이 일할 생각 없어?”
“…….”
“정시 퇴근, 4대 보험, 근무시간 외 근무에는 추가 수당, 각종 보너스에 퇴직금도 챙겨주고, 혹시 자식 있으면 육아비랑 교육비 지원도 해줄게.”
장난 같은 말투였으나 장난 같지는 않았다.
상대는 단지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 없을 뿐이었다. 매사 그런 식으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개눈깔은 말없이 유클리드를 노려봤다.
그리고 오른손의 감각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달각―.
칼집에 품어져 있는 요도 무라사메의 칼자루가,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달각. 달그락―.
흔들림으로써 검이 점차 반응해 온다.
그래. 울고 있다. 칼날이 울부짖는 중이다.
도그아이드 킴은 떠올렸다.
무라사메를 뽑기 위한 마지막 조건을.
그는 줄곧 찾아 헤매고 있었다.
멸해 마땅한, 세상의 가장 큰 악을.
―이 녀석인가?
상대는 서른쯤 먹었을 듯한 젊은 남자. 겉으로 보이는 바로는 그리 악독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지독한 냄새가 풀풀 풍겼다. 장난기로 말미암은 순수한 악의가 냄새로써 전해지고 있었다.
구역질 나는 사악함.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
“할배, 대답은?”
유클리드가 물었고,
도그아이드 킴이 답했다.
“조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정적은 길지 않았다.
“납상참納狀斬.”
나지막이 내뱉은 검술의 영창.
도그아이드 킴이 오른손에 쥔 검을 좌에서 우로 휘두르자, 밝은 빛을 내뿜으며 검기가 솟구쳤다.
촤아아아아악―!
쏜살같은 기세로 날아간 검기는 풍압만으로 도로 바닥의 아스팔트를 거칠게 깎아냈다.
손등에 스치기만 해도 팔뚝이 통째로 잘려 나갈 것이 분명한 그 무시무시한 검격을, 유클리드는 곡예 같은 움직임을 선보이며 가까스로 피해냈다.
“잘도 피하는구마이. 똥파리 같은 자슥.”
“어이쿠, 잠깐만. 진정 좀 해. 할배랑 싸울 생각은 없어. 우리 그 평화적으로 끝내면 안 될까?”
“아니. 난 네놈을 지금 여기서 조져야겠다.”
“전투적인 분위기에 초 쳐서 미안하지만, 이쪽은 진짜로 싸울 생각이 1도 없어서 말이야.”
“도망칠 생각 마라, 이…….”
“할배는 카이트란 놈이랑 같이 일하는 것 맞지? 그 친구한테 좀 전해줘.”
유클리드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가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모습을 감춘 것은, 웃으며 한마디를 던진 바로 그 직후였다.
“나중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