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Dragon Night (6)
경매장 지하 물품보관실.
끼익―.
어두컴컴한 창고 문이 열렸다. 밧줄로 양손이 포박된 미르각시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구하러 왔습니다, 공주님.”
의기양양한 표정의 유진이 거기에 있었다.
허나 어쩐지 자신과 똑같이 결박당한 신세였다.
“무슨 꼴이더냐.”
“죄송합니다. 실은 저도 잡혔어요.”
뻔뻔스러운 유진의 태도에 미르각시는 별 감정 없이 그저 심드렁한 표정만을 지어 보였다.
“마피아와 동맹을 맺은 것 아니었느냐?”
“보고 계셨군요.”
“그래. 얘기가 지루해지기 전까지는 계속 보고 있었지. 작당 모의를 아주 길게도 펼치더만.”
“뭐, 가능한 한 모든 일에 있어 평화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스타일이라서요. 피 흘리지 않고 끝낼 수 있다면 언제라도 그게 최선 아니겠습니까.”
“헌데 그대는 왜 그런 꼬락서니로 나타난 게지?”
“놈들이 제안을 거절했어요. 그 결과가 이거죠.”
유진은 어쩔 수 없었다는 양 어깨를 으쓱했다.
미르각시는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이 천치 같은 것. 그렇다고 붙잡히진 말았어야지. 이래서야 극장판 전개랑은 완전 딴판이지 않으냐.”
“제가 그 애니를 TV판밖에는 못 봤거든요.”
“시답잖은 변명은 됐다. 그대는 명색이 암귀란 자가 어찌 겨우 양아치 몇 놈에게 이리도 쩔쩔매는가.”
용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부름>을 쓰지 않으니 도리도 없나.”
“…….”
“그대가 반쪽짜리 흑마법사로 살겠다 결심한 것에는 딱히 나무랄 맘이 없지만, 도통 날 즐겁게 해줄 생각이 없는 듯 보여 그것이 유감이구나.”
싸늘히 식은 분위기 속에서,
유진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재밌는 거 보여드릴까요?”
그러자,
미르각시가 귀를 쫑긋 세우며 반응했다.
“지금부터 저 혼자 여길 탈출해서 <페르골리치 패밀리>의 보스를 죽여 볼게요. 마법 안 쓰고.”
“……뭣이? 마법을 안 쓰겠다고?”
“네. <강화>랑 <부름>. 제가 쓸 수 있는 마법은 그것들밖에 없는데, 둘 다 쓰지 않을 겁니다.”
듣기만 해도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마법을 쓰지 않는 마법사라니, 그냥 일반인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만약 제가 해낸다면 소원 하나만 들어주세요.”
“……소원 말이냐.”
무언가 꺼림칙한 기색이 엿보였으나, 그럼에도 미르각시는 크게 신경 쓰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도대체 저놈이 어떻게 마법도 안 쓰고서 그런 일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먼저였다.
“좋다. 어디 한번 해보아라.”
“그럼 분부대로.”
두 손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다. 평범한 인간 수준의 완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방 밖은 마피아 단원들이 지키고 있다. 놈들은 최소 총 한 자루는 지녔을 무장 상태일 터.
그 최악의 조건들을 품고서,
유진이 택한 최초의 행동은―
“이봐! 다 끝났어! 이제 풀어 줘!”
그리고 잠시 후, 물품 보관실 문이 열리며 밖에 있던 경비원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유진과 미르각시의 결박을 풀어 주었다.
“너희 보스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가봐야겠어. 깜빡 잊고 전달 못 한 얘기가 있거든. 안내 좀 해줄래?”
“…….”
경비원들은 유진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지하 통로를 빠져나와 경매장 강당 2층의 VIP룸까지 향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마피아 조직원들과 마주쳤지만, 그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이놈, 마피아가 동맹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순 거짓부렁이었군.’
어쩜 이리도 뻔뻔한 놈이 다 있을꼬, 미르각시는 눈살을 하염없이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느새 그들은 VIP룸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을 그곳까지 안내한 경비원들은 문에서 두어 발짝 물러났다. 보스끼리의 긴밀한 대화를 부하들이 엿듣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은 회색토끼 수인이 시가를 문 채로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또 뭐냐? 무슨 장단을 더 맞춰ㅈ…….”
타앙―!
외마디 총성이 울렸다.
총구에서 발사된 탄환은 아르투로 페르골리치의 가슴팍으로 날아가 심장부에 정확히 명중했다.
“끄, 끄아아아악!!”
페르골리치는 비명을 내질렀다.
곧 총소리와 보스의 울음소리를 들은 마피아 조직원 두 명이 다급히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보스, 무슨 일이십……!?”
문간에 서 있던 미르각시는 반사적으로 마력을 내뿜어 그들의 팔다리와 몸통을 몽땅 분질렀다.
“으윽?!”
“커허억!!”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마피아들을 뒤로하고서, 유진은 유유히 아르투로 페르골리치에게 다가갔다. 방금 막 한차례 격발한 권총을 오른손에 쥔 채로.
“끄으윽, 너, 이 개자식이, 감히……!”
“동맹 맺은 지 10분 만에 통수 쳐서 미안해. 조금 생각해 보니까 이러는 편이 낫겠더라고.”
처음부터 이상했다.
이곳 경매장은 패밀리의 보스가 위치해 있는 장소치고는 묘할 정도로 조직원 숫자가 적었다.
“항쟁 지역에 병력을 돌리느라 경호원 숫자를 줄일 수밖에 없었겠지. 내가 여기에 나타난 걸 알았을 때 솔직히 식겁했을 거야. 경매장에 있는 병력만으로는 암귀를 막을 수 없었을 테니까.”
“…….”
“그래서 내 동맹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거잖아? 날 죽일 수 있었다면 그게 베스트니까, 그러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야.”
저울질을 해보았다.
처음 계획대로 <페르골리치 패밀리>와의 동맹을 유지할지, 아니면 기왕 이리된 거 놈들의 보스를 죽여 버려 조직을 빈사 상태로 만들어 버릴지.
근소한 차이로,
후자가 승리했다.
“적대 조직의 보스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뭐, 어차피 그쪽도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뒤통수칠 예정이었잖아?”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뒤통수를 칠 거면, 상대가 뒤를 돌아볼 여지조차 못 갖게 제대로 후려쳐야 하는 거야.”
“이런, 쓰레기 같은 ㄴ…….”
타앙―!
두 번째이자 마지막 총성이었다. <페르골리치 패밀리>의 대부는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쳤다.
“총은 어디서 난 게냐?”
“요즘 호신용으로 갖고 다녀요. 부득이하게 마법을 못 쓰는 상황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요.”
유진은 여유롭게 권총을 흔들어 보였다. 미르각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이제 소원을 들어주실 차례네요.”
“…….”
“제 소원이 뭐냐면…….”
그때.
복도 저편에서 무장한 마피아 단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혼자서 감당하기엔 제법 많은 숫자였다.
“탈출하는 것 좀 도와주세요.”
***
솔직히 각오는 하고 있었다.
나를 따라온 건 본인의 선택이었다지만, 어쨌든 내 이익을 위해서 그녀를 이용해 먹지 않았던가.
드래곤을 의도적으로 속여 넘기기까지 하면서 실컷 가지고 놀았으니, 후환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번 일로 개빡친 용 님께서 내게 무슨 벌을 내리신들, 가능한 선에서 달게 받으리란 생각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별일 없었다.
“음냠냠. 회오리감자란 것도 꽤 먹을 만하구나. 일반적인 감자튀김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미르각시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야시장 노점들을 돌아다니며 길거리 음식 탐구에 열중이었다.
경매장에서 마피아들을 쓸어버릴 때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는데, 표정이 꽤 나아져 있었다.
“그대도 한입 하겠는가?”
“아, 저는 괜찮습니다.”
“쯔읏, 거참 못 쓸 식성인지고. 자고로 대장부라 함은 주는 음식을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이거늘.”
그녀는 혼잣말을 뱉듯이 말하며, 버터 향이 물씬 풍기는 회오리감자를 야금야금 물개처럼 씹었다. 그러더니 볼이 한 아름 빵빵해져서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천생 여자아이였다.
“저기.”
“응? 뭐냐?”
미르각시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마법을 배우고 싶은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야시장의 조명이 반짝였다.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예.”
“나한테 말이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미르각시는 푸훗 하고 웃었다.
“거참 웃기는 놈이로구나. 그대는 정녕 내가 제자 따위를 밑에 들이리라고 생각한 것인가? 하물며 인간을?”
“싫으시면 됐습니다. 그냥 해본 소리예요.”
“정말, 드래곤한테 이토록 제멋대로 구는 녀석은 사천 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그대가 처음이다.”
그녀는 남아있던 회오리감자를 다 먹어 치웠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인데, 그대에게는 흑마법의 사용법을 가르쳐준 스승이 있었지 않나?”
“아, 예. 맞아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그대가 마나를 발산하는 방식에는 정석적인 기믹이 엿보인다. 아마 그대의 스승은 이론적인 부분에 빠삭한 부류이지 않았나 싶은데.”
나는 침묵했다.
정확한 분석이었다.
예전에 나에게는 타이퍼라 하는 마법 스승이 있었다. 고물 안드로이드였던 시절의 그 녀석은 밤이면 밤마다 나에게 <강화>의 활용법과 이런저런 마법과 관련된 지식들에 대한 강의를 해주었다. 지금 녀석은 마법 따윈 하나도 모르고 회사 일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비싸기만 한 깡통이지만 말이다.
“그 친구는 어디로 간 겐가?”
“……사라졌습니다. 말도 없이.”
“흠. 그런가.”
미르각시는 생각에 잠겼다가,
곧 빙그레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아. 이렇게 하지.”
“……?”
“그대의 원래 스승을 찾아 데려오너라. 그러면 내가 그대에게 마법을 가르쳐주겠다.”
“예에?”
“남의 제자를 멋대로 가로챌 수는 없지. 인수인계는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느냐.”
저의를 알 수 없는 제안이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드래곤이란 족속은 정말이지 매사에 자기 멋대로구나 싶었다.
결국 나는 그 제안을 승낙했다.
세계 최강의 마법사에게 마법을 배울 수 있다면야 무엇인들 못 하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닭꼬치만 먹고 돌아가자꾸나.”
“음. 맥주랑 같이 먹으면 좋겠네요.”
“오? 닭꼬치에 맥주 조합 말이냐? 아아, 그러고 보니 ‘카이○’에서도 그렇게 먹었었지!”
“제가 편의점에서 캔 맥주 사 올게요.”
“아사○로 사 와라, 무조건!”
아무튼간에, 나와 히키코모리 오타쿠 드래곤의 이 기묘한 인연은 좀 더 오래 이어질 듯했다.
***
그 시각.
노스네스트 D구역.
―콰아아아앙!
도그아이드 킴의 참격이 대지를 갈랐다.
무성히 피어오른 연기가 걷히고, 난장판이 된 거리의 모습이 달빛 아래에 서서히 드러났다.
“와우. 죽을 뻔했네.”
검기에 의해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
그 복판에 여유롭게 서 있는 한 사내.
“할배 진짜 졸라 쎄구나. 역시 네임드다워.”
“…….”
개눈깔은 검은 눈동자로 그를 노려봤다.
<헬터 스켈터>와 <페르골리치 패밀리> 간의 전투가 한창이었을 무렵, 그 남자는 나타났다.
총칼을 휘두르며 전장에 난입한 그는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주변에 있는 사람이란 사람은 모조리 다 죽여 버렸다. 문자 그대로 학살이었다.
학살자의 등장은 힘을 아껴가며 대충 칼질을 하고 있던 도그아이드 킴마저 전력을 다하게 했다.
“뭐 하는 새끼냐, 너.”
“새끼라니, 이래 봬도 서른인데.”
“닥치고 이름이나 쳐 말해.”
“유클리드야. 유클리드 진.”
개눈깔은 흠칫했다.
‘유클리드’라면…… 카이트란 놈이 시온에서 가명으로 썼던 이름이랑 같은데, 우연인가?
“그보다 할배. 죽이기엔 실력이 아까운데.”
유클리드가 말했다.
매우 당당한 어조로.
“나랑 같이 일하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