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Dragon Night (5)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납…… 뭐요?”
「납치당했으니까. 구하러 와라.」
정신이 아득해지며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조용히 이마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게 지금 뭔 소립니까……?”
「몇 번을 이야기해야 알아듣겠는가? 경매장에 있던 마피아들이 나를 억지로 끌고 지하실로 데려와 감금했다. 즉, 나는 지금 피랍 상태에 있다.」
드래곤이 납치를 당했다고라.
어이가 없었다. 아무렴 그딴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일부러 당해준 게 아닌 이상.
“지하실에 붙잡혀 있다고요?”
「그래.」
“자력으로 탈출하시면 되잖습니까.”
「싫다. 그대가 구하러 오도록 해라.」
“아니, 왜요?”
「정녕 몰라서 묻는 게냐? ‘매지컬 아이돌 나에리쨩’ 극장판 2기! 잿빛여왕에게 납치당한 나에리쨩을 라이벌인 박춘자쨩이 구출하는 시나리오다!」
“……설마 지금, 애니메이션에 나온 내용 따라 하려고, 일부러 붙잡혔다는 얘기는 아니겠죠?”
「아아, 지루하던 참에 실로 유쾌한 일이 벌어졌지. 그대가 보기에도 재미있어지지 않았느냐.」
미르각시는 장난기를 숨길 생각이 없는 듯 쿡쿡대며 웃었다. 나는 뒷목에 스트레스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 진짜 장난하지 마요…….”
「뭘 모르는군. 장난이야말로 우리네 인생의 전부다. 본디 드래곤이란 족속은 언제건 유희를 즐기기 마련이지. 나는 유희를 굉장히 잘 즐겼기에, 용들 사이에서 유희왕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것보다 아까 제 음성은 그쪽한테 안 닿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대화가 잘만 되고 있는데.”
「입술을 읽고 있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천리안>으로 보고 있으니까 그 정도는 간단하지.」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해보자.
<페르골리치 패밀리>가 미르각시를 납치했다.
드래곤이란 걸 알면서 저지른 짓거리는 당연히 아닐 터. 그녀는 지금 인간 여학생 모습으로 변신 중이니, 놈들은 평범한 민간인이라 여겼을 것이다.
납치를 한 목적은 아마도― 님로드 스톤.
경매 수익 분배에 있어 협박에 가까운 협상을 하기 위해, 내 동행인을 인질로 붙잡은 거겠지.
그리고…… 미르각시는 일부러 붙잡혔다.
이유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단지 그뿐이다.
「정말 설레는군. 처음 느껴보는 두근두근한 느낌. 악당 쿠파한테 붙잡힌 피치 공주의 기분이다.」
“…….”
「뭘 하고 있느냐, 슈퍼마리오. 어서 날 구하러 오지 않고.」
보통 같으면 이런 땡깡은 무시하는 게 상책.
허나 상대는 지상 최강의 드래곤이다. 내가 비위를 맞춰주지 않았다가 심통이 나 버리기라도 한다면, 오늘이 도시 최후의 날이 될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납치당한 미르각시를 구출하겠답시고 <페르골리치 패밀리>를 상대로 적진 한복판에서 혼자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다.
선택지는 두 개.
어느 쪽이든 최악.
“저기 있다!”
그리고 때마침.
아까 전에 님로드 스톤을 살펴준 감정사가 로비 저편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곧 그의 뒤에 따라붙어 있는 마피아 조직원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성큼성큼 이쪽을 향해 다가와 단숨에 내 주변을 둘러쌌다. 공격적인 의도는 없어 보였으나, 평화적인 태도로는 결코 보이지 않았다.
“아하, 여기 계셨군요. 유진 연 씨!”
“뭡니까?”
“경매 등록하신 상품에 관하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자,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감정사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행분도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나는 묵묵히 있었다.
그대로 시간이 조금 흘러갔다.
“내가 안 따라간다고 하면 어쩔 셈이지?”
“그때는 억지로라도 모셔갈 생각입니다만.”
장소를 이동하면 불리해진다.
싸움을 건다면 지금 걸어야 했다.
주변을 에워싼 상대의 숫자는 5명.
경매장의 경비 인원 숫자는 추정 30명.
지원까지 올 것을 고려하면 최소 100명.
A구역에 상주하는 병력은 대략 1,000명. <페르골리치 패밀리>의 조직원 총합은 5,000명 이상.
님로드 스톤 판매는 불가능.
노스네스트 최대 규모 조직과의 전쟁 국면에 돌입하게 되면, 향후의 모든 계획이 망가진다.
손해가 막심한 정도가 아니다. 이 모든 불이익을 감당하면서까지 드래곤의 장단에 맞춰 줄 순 없다.
「입술을 읽고 있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천리안>으로 보고 있으니까 그 정도는 간단하지.」
그렇다고 무시해 버릴 수도 없다. 지금도 그 빌어먹을 용가리 양반이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
대가리를 빡세게 굴려 보자.
최선의 방안은 무엇이 있지?
드래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마피아와 전쟁을 할 필요도 없는,
최소한의 리스크만을 감수하면서,
최대한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방법.
“…….”
고심 끝에,
나는 결정했다.
“이봐.”
이게 과연 최선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른 길은 떠오르지 않는다.
“너희 보스에게 전해.”
손아귀에 힘을 집중시켰다.
체내에 온전히 담아낸 마력.
“암귀가 만나러 왔다고.”
그 마력을 일순에 끄집어냈다.
온 주변의 공간을 에워싸도록.
―푸샤아아아악!
자색 불꽃이 폭발하며 로비 안을 뒤덮었다.
잔불이 남아 수 초간 아른거렸다. 그 보라색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두려워 마지않는 색깔이었다.
“얘기 좀 하자고 말이야.”
***
그것은 도박이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이, 이쪽입니다…….”
판돈으로 내건 것은 암귀의 얼굴과 정체.
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쯤은 충분히 까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보, 보스께서는 마침 매장에 시찰을 나오셔서, 그, 여기서 지금 바로 만나 뵈실 수 있습니다…….”
경매장 상층의 VIP룸.
오페라 하우스의 발코니 같은 곳으로, 경매가 이뤄지는 강당이 한눈에 다 내다보이는 장소.
나는 덩치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곳까지 안내를 받았다. 의외로 오는 길에 다른 조직원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왠지 경계심이 적었다고 할까.
얼마 안 가 조직원들이 모두 물러났고, 나는 VIP룸에 홀로 입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왔군.”
소파에 앉은 마피아 조직의 보스가,
시가 연기를 내뿜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쪽이 암귀인가?”
“…….”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겼군. 사람 죽이는 데 이골이 난 귀신이라 들었는데 말이야.”
아르투로 페르골리치.
<페르골리치 패밀리>의 현 보스.
회색 털과 위로 쭉 솟은 귀.
귀족적인 복장과 자그마한 체구.
만지면 말랑할 것 같은 둥근 꼬리.
그의 종족은 히말라얀 토끼 수인종이었다.
순혈이라 그런지 전체적인 외양은 거의 두 발로 선 짐승. 인간보다도 토끼 쪽에 훨씬 가까웠다.
“나랑 얘기 좀 하자 했다던데.”
귀염뽀짝한 생김새에 걸맞지 않게 목소리는 모순이다 싶을 정도로 거칠고 중후하다.
외모와는 별개로, 그가 노스네스트에서 제일가는 잔혹한 악당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 자리를 만들어줘서 고맙군.”
“나야말로 고맙지. 적대 조직의 우두머리께서 친히 내 손에 뒤지러 찾아와 주셨으니.”
“싸울 생각은 없어. 그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뭔 소리야? 난 당장 네놈을 담그고 싶은데?”
“동맹을 맺는 건 어때?”
내가 말하자,
그가 반응했다.
“뭐라?”
“<페르골리치 패밀리>와 <헬터 스켈터>가 동맹을 맺는 거야. 그럼 서로한테 이득이잖아.”
“지랄하고 자빠졌네. 네놈한테만 이득이겠지.”
“그쪽한테도 이득이 될 거야. 동맹을 맺는다면, 님로드 스톤 판매금의 90%를 그쪽에 줄게.”
그때.
아르투로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부하한테 들어서 알고 있겠지. 내가 시가 3억 달러짜리 물건을 경매장에 등록했다는 거.”
“…….”
“나는 낙찰 금액의 10%만 가져가도록 할게. 나머지 돈은 화친 기념 선물인 걸로, 어때?”
“……선심 쓰는 척하지 마라, 애송아. 그깟 돈은 널 조져 버리고 전부 뺏어 버리면 그만이야.”
“아니. 너흰 못 해. 그런 짓을 했다간 <페르골리치 패밀리>라는 브랜드의 신용이 박살 날 테니까.”
회색 토끼가 찡그린 눈으로 나를 째려봤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뒤통수 맞을 걱정은 안 해도 돼. 이미 그쪽은 내 신상을 확보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 쪽에서 먼저 배신하는 경우는 없을 거야. 반대로 그쪽은 우리 약점을 쥐고 있으니, 그걸 빌미로 얼마든지 우리를 자유롭게 쥐어 짜낼 수 있지.”
“…….”
“동맹이라지만 어디까지나 그쪽이 갑인 형태야. 이 정도면 절대 손해 보는 건 아니지 않나?”
내 말에 틀린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는 쉽사리 넘어오지 않았다.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도 달콤한 제안이었기에. 오히려 그 달콤함에 찝찝함이 느껴져서였다.
“대신, 조건이 두 가지 있어.”
구태여 쓴맛을 조금 첨가해준다면,
필히 기분 좋은 단맛으로 변화할 터.
“<헬터 스켈터>뿐만이 아니라, <윌슨앤코>와도 협력 관계를 맺어 줘.”
“윌슨앤코? 그 망한 회사 말이냐?”
“아직 안 망했거든. 쨌든 그쪽 암시장에 공급할 물건의 일부를 이쪽에서 대주게 해달란 거지.”
아르투로는 급기야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 상대로 장사를 벌여 보겠다 이거군.”
“투자금 2억 달러로는 모자란가?”
어차피 님로드 스톤의 판매금은 세탁 과정을 거치지 않는 이상 양지에서 사용이 불가하다.
차라리 놈들에게 기부하고, 제대로 된 사업 과정을 거쳐 합법적인 수익을 얻는 편이 나으리라.
“내가 원하는 건 조직 간의 동맹과 비즈니스 파트너십. 그쪽이 받게 될 건 각 구역에서의 쓸데없는 항쟁 중지와 님로드 스톤의 판매금 9할.”
아르투로 페르골리치는 유능한 장사꾼.
최소한의 리스크로 최대한의 이득을 볼 수 있는 이런 제안을 섣불리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답은?”
“…….”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오는 것은 시간문제.
30여 초의 침묵 뒤, 아르투로가 입을 열었다.
“모자란다.”
나는 거기에 물음표를 띄웠다.
“금액이 모자란다는 얘기야?”
“방금 조건이 두 가지 있다고 했지. 네놈이 내세운 조건은 아직 한 가지밖에 없다.”
“아.”
“두 번째 조건은 뭐냐?”
그가 으름장을 놓듯이 물었다.
나는 잠시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마피아 보스의 눈치를 살핀 게 아니었다. 다만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드래곤 양반의 눈치를 살폈을 뿐.
“그게, 실은 그쪽 부하가 내 일행을 납치했다고 들어서 말이지.”
“그래서? 풀어달라고?”
“아니, 그게 아니고.”
조용히 두 손을 감싸 턱을 괴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입술이 보이지 않도록 가렸다.
“나도 좀 납치해 줘.”
“……?”
그 순간 아르투로 페르골리치는 흡사 대가리 빻은 변태 새끼를 보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변명을 하기 위해 10분 정도를 공들여 설득해야 했다. 동맹 맺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