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Dragon Night (3)
잠시 침묵.
“……예?”
“허나 거절한다, 라고 말했다.”
미르각시는 이미 했던 말을 굳이 한 번 더 내뱉고는, 저의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자세를 취하며 어쩐지 만족스러운 듯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니까, 공물을 받지 않겠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
“혹시 이유를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필요 없으니까.”
필요 없다고, 그녀는 님로드 스톤이 마치 길거리 전단지 정도의 가치를 지닌 물건인 양 말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올스탯 맥스를 찍은 만렙 캐릭터일진대, 그깟 템빨이 간절키야 하겠느냐.”
“…….”
“그대의 구마지심은 갸륵하기 이를 데 없으나, 나는 공연히 필요치도 않은 쓰레기를 곳간에 쌓아 두는 스크루지 같은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지.”
나는 슬며시 방 안의 모습을 살폈다. 용 님의 주장과는 달리 이곳은 그야말로 쓰레기투성이였지만, 구태여 그런 쪽으로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이번엔 이쪽서 이유를 묻겠다. 그대가 이렇게까지 해서 내 환심을 사려는 까닭이 대체 무엇이냐?”
드래곤이 물었다.
당연히 튀어나올 만한 질문이긴 했다. 그야 뭐 대놓고 뇌물을 주고 있었으니까는 말이다.
“…….”
서투른 연기가 통할 상대도 아니니,
여기선 그냥 솔직히 말하는 편이 낫겠지.
“목숨 구걸이었습니다.”
“응?”
“처음 당신과 만났을 때, 제가 미래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이틀 뒤인 목요일에 <나인서클>의 제6원 제퍼슨 브리즈가 공식적으로 탈퇴를 발표한다고, 그렇게 미래를 예언했었죠.”
“으응? 아, 맞아. 그랬었지. 참.”
뭐지? 반응이 좀 묘한데?
설마 까먹고 있었던 거 아냐?
왠지 좀 꺼림칙하지만…….
일단 얘기는 계속 이어가자.
“실은 그 예언이 틀릴까 봐 불안해졌습니다.”
“어째서 불안해진 것이지? 미래를 전부 알고 있는 것 아니었나? 혹시, 그대가 미래에서 왔다는 그 얘기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던 겐가?”
“미래는 사소한 오차만으로도 천차만별로 바뀌기 마련이니까요.”
나비 효과.
브라질의 한 나비가 일으킨 작은 날갯짓이, 언젠가 텍사스에 거대한 토네이도를 몰고 올지도 모른다는 이론.
“제가 알고 있는 미래가 똑같이 찾아올 거라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예언이 틀린다면 당신은 제가 거짓말을 했다 생각하여 죽이러 올 테니, 살아남으려면 뇌물이라도 바쳐야겠다 생각한 거죠.”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예에, 그러게 말입니다.”
큰맘 먹고 님로드 스톤을 가공까지 해서 가져왔지만, 용 님은 내가 바친 공물을 받아주지 않았다.
“애시당초 그대는 장신구 고르는 센스부터가 글렀다. 아녀자 맘을 뺏고자 했걸랑 이런 것이 아니라 반지를 가져왔어야지.”
“……지금이라도 반지로 바꿔 올까요?”
“하이고야, 어리석긴. 농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거라. 하여간 수놈들이란 예나 지금이나 말귀를 통 못 알아먹는다니까.”
미르각시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농담한 거였는데.
“아무튼 그 물건은 내게 필요 없으니, 괜히 바칠 생각일랑 말고 도로 그대 품에 챙기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나는 꺼내 보였던 님로드 스톤 브로치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로써 뇌물 작전은 대실패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가다니? 어딜 가려고?”
“밤도 늦었고, 더는 청룡 님의 시간을 뺏을 용의가 없으니, 슬슬 돌아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아니, 이런 천하의 개불쌍놈이 다 있나. 허락지도 않았거늘 어딜 멋대로 물러나려 하느냐!”
미르각시는 휘둥그레진 표정으로 씩씩대며 노발대발 성질을 부렸다. 눈앞에서 노여워하는 드래곤의 분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흠칫 쫄고 말았다.
“뻔뻔하게 지 맘대로 쳐들어왔다 지 맘대로 쳐나가고, 그대는 내 집이 무슨 24시 편의점인 줄로 아는 게냐? 주둥이가 달렸으면 변명해봐라, 이놈아!”
“죄, 죄송ㅎ…….”
“당장 자리에 앉아라. 이제부터 그대는 나랑 같이 밤새워서 게임하고 만화랑 영화 얘기를 해야 한다.”
“아뇨, 저기, 밤샘은 조금, 그, 내일 출근도 해야 되고, 지금도 일정이 있어서 그거는 좀…….”
“일정? 무슨 일정?”
“니, 님로드 스톤을 처분해야 해서, 시세나 이것저것 알아보려고, 암시장에 들를까 합니다…….”
그때.
미르각시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오호라, 암시장?”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노스네스트 1구역에 있는 그곳 말인가?”
“어, 맞습니다. 거기 가보신 적 있으세요?”
“뭐어, 가보려고 시도는 많이 했었지. 한 대여섯 번 정도. 낯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대단히 심한 길치라서, 매번 노스네스트에 갈 때마다 길을 잃어 거리 복판에서 미아가 되어 버리고 만다. 게임 할 때도 맵이 너무 복잡하면 헤매는 편이지. ‘다크 소○’이랑 ‘몬스○ 헌터’도 길 헷갈려서 못 깼다.”
용 님은 구구절절 사연을 읊었다.
왠지 측은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대는 지금부터 암시장에 갈 생각인가?”
“예? 아, 예. 보내주신다면 그러려 하는데요.”
“마침 공기 좀 쐐볼까 하던 찰나에 잘됐군.”
미르각시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장난기 넘치는 어린아이 같은 미소였다.
“나도 그대와 동행하도록 하지.”
잠시 침묵.
“……예에?”
“후후. 도회지에 나가는 것은 참 오래간만인데, 기대가 되는구나.”
싱글벙글한 표정과 목소리.
아무래도 그녀는 진심인 듯했다.
“저기, 정말로 같이 가시게요?”
“뭘 그리 놀라는가? 혹 그대는 나랑 함께하는 것이 싫은 겐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참, 아까 얘기를 들어 보니 돈이 필요한 것 같던데. 그대가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내 친히 용돈 한두 푼쯤은 쥐여 줄 수도 있느니라?”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생각이 번뜩였다.
길잡이 역할을 해주면 돈을 주겠다― 자금 확보가 주목적이었던 만큼 이는 실속 있는 제안이다.
더군다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쪽은 드래곤이라는 지상 최강의 경호원을 대동하는 셈이 된다.
시가 3억 달러짜리 아이템을 지니고 돌아다니는 입장에서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듬직한 동행자.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같이 가는 게 이득이다.
“그럼 바로 출발하자꾸나!”
“자, 잠깐만요, 청룡 님.”
“왜?”
“지금 그 모습으로 밖에 나가실 생각이신가요?”
“으음? 풍미양속에 어긋나는 복장은 아닐 텐데?”
“복장이 문제가 아니라 저기, 그, 뿔이…….”
“아.”
미르각시는 자기 머리 위에 톡 튀어나온 사슴뿔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추리닝 차림은 둘째치고 저 뿔이 문제였다. 게다가 인간이라기엔 너무나도 수려한 그녀의 외모 역시 적잖이 눈에 띄었다.
“하긴, 나 같은 파충류 괴물이 인간 행세를 하며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무서워하겠군.”
그녀는 수긍한 듯 고개를 까딱였다.
“드래곤인지 못 알아보게, 변장을 하면 되겠지.”
그렇게 말하고는, 오른손으로 자기 얼굴과 몸을 위에서부터 쓰다듬듯이 휘 하고 천천히 쓸었다.
그러자, 팟―.
푸른 빛줄기가 찬란하게 반짝였다.
그 빛은 손동작을 따라 가루처럼 흩날렸다.
별사탕마냥 튀어 젖히는 스파크가 전신을 감쌌고, 이내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걸 탈바꿈시켰다.
그렇게,
바뀐 그녀의 외형은―
찰랑이는 검은 머리.
앳되고 깜찍한 얼굴.
리본 달린 갈색 교복.
드래곤 따위와는 일말의 상관도 없어 보이는.
버스 정류장 근처 길거리 노점에서 당당히 떡볶이를 사 먹고 있을 것 같은 여고생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오? 역시 알아보았는가? 그래! ‘매지컬 아이돌 나에리쨩’의 주인공 나에리쨩이다!”
나는 졸지에 벙쪘다.
여러 가지 의미로 놀랐다.
전에도 얘기한 적 있듯, 사람의 외형을 변화시키는 마법은 그렇게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어쭙잖은 술식으로 성형 마법을 시도해서는 불쾌한 골짜기 상태를 만들기 일쑤라 다양한 술식 혼합이 필수적이며, 변형 상태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이전에 비너스가 내 얼굴을 바꿔주었을 때, 마법을 구사하는 시간만 해도 30분 가까이 소요됐다.
그런데 미르각시는 그걸 지금 한마디의 영창도 없이, 단 몇 초도 안 돼서 순식간에 성공시켰다.
대단한 일을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해내는 대단함.
이제 와서는 뒷북 같은 소리긴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자는 정말로 최강의 마법사가 맞구나 싶었다.
“어떤가? 이 재현도가 놀랍지 않나?”
“…….”
“나름대로 훌륭한 코스프레라고 자부한다. 특히 여기, 앞머리 위쪽에 튀어나온 더듬이가 포인트지.”
나는 여고생이 되어 버린 드래곤을 바라봤다.
이 꼴로 노스네스트에 갔다가는 사슴뿔 달린 드래곤과는 또 다른 의미로 눈에 띌 게 분명했다.
“하여튼 어서 가자꾸나. 인제 못 기다리겠다.”
그리하여―
여고생 드래곤과의 야간 모험이 시작됐다.
***
지하철 안.
미르각시는 손잡이를 두 개씩 차지한 채로 놀이동산 구경을 하듯 주변을 하염없이 두리번거렸다.
“오오, 정말로 땅속을 달리고 있군…….”
“조선시대 사람입니까.”
“쩨쩨하게 굴지 말거라. 미디어로만 접하던 것을 실제로 경험해 보면 신기한 것이 당연하잖느냐.”
두 번의 환승을 거쳐 마침내 도착했다.
노스네스트 A구역. <골고다 마켓> 입구.
“여기가 암시장인가! 과연 듣던 대로 시궁창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군! 벌써부터 맘에 드는구나!”
“목적지까지는 좀 더 걸어야 해요.”
오늘 밤의 목적지는 A구역 암시장 <골고다 마켓>의 중앙에 위치한 경매장 <해피 베이 옥션>.
들르는 이유는 당연히 님로드 스톤 브로치를 거기서 경매로 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다.
다만―
이번 계획은 조금 험난한 부분이 있다.
이곳 A구역은 <페르골리치 패밀리>의 점유지.
<헬터 스켈터>에게 있어서는 적대 조직의 땅이기 때문에, ‘카이트’의 신분으로 들를 수는 없었다.
지금의 나는 가면을 쓰지 않은 상태.
즉, 민간인 ‘유진 연’의 신분으로 노스네스트에, 그것도 우범지대인 레드존 알파벳 구역에 와 있다.
생각 없이 마법을 썼다가는 적진 한가운데서 내가 카이트란 사실이 들통나고 말 터.
그러므로 오늘 주의해야 할 부분은,
무엇보다도 내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것.
바로 옆에 드래곤이 있어 줘서 든든하긴 했으나, 동시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다.
“여기서부턴 조심하셔야 됩니다.”
“왜지?”
“북부 마굴 노스네스트의 레드존이니까요. 야밤의 알파벳 구역에 회사원과 여고생. 시비 걸 상대를 찾고 있는 깡패들에겐 딱 좋은 먹잇감입니다.”
“시비 걸어온 놈들이 되레 불쌍해질 텐데?”
“괜히 소란을 피워서 좋을 건 없잖습니까. 경매장에 도착할 때까지는 되도록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가주세요.”
뭐, 사실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A구역은 알파벳 구역이긴 하지만 뼈대 깊은 마피아 조직인 <페르골리치 패밀리>가 관리하고 있는 만큼, 전체적인 치안 상태가 오히려 웬만한 노스네스트의 다른 구역들보다도 월등히 좋았다.
어쩌다 운 나쁜 병신들이 암귀랑 드래곤한테 시비를 걸게 되는 불참사는, 아마 일어나지 않을…….
“이봐.”
그즈음.
미르각시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왜요?”
“저기서 누가 우릴 부르고 있다.”
나는 시선을 돌려 골목 안쪽을 보았다.
웬 껄렁하게 생긴 깡패 자식들이 이쪽을 향해 손가락을 재수 없게 까딱거리고 있었다.
“이거 익숙한 장면인데.”
“…….”
“양아치 격파 이벤트 맞지?”
저런.
운 나쁜 병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