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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128화 (128/201)

128화. Dragon Night (2)

도그아이드 킴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

“예.”

짧은 한마디씩을 더 주고받고 나서, 그는 곧 고개를 앞뒤로 끄떡거리며 입꼬리를 빙긋 올려 보였다.

“아따, 신속한 것이 억수로 맘에 드네.”

“뭐, 쇠뿔도 단김에 빼란 말이 있잖습니까.”

“하모 오늘 밤에 드래곤 사냥 들어가는 기가?”

개눈깔이 물었고,

나는 바로 답했다.

“아뇨.”

순식간에 노인의 낯빛이 싸늘해졌다.

누가 봐도 참 알기 쉬운 표정 변화였다.

“니 짐 내랑 장난 노나.”

“앞서가지 좀 마십쇼. 드래곤이랑 만나러 간다고 했지, 누가 맞짱 뜨러 간다고 했습니까?”

“첨 만났을 적부터 생각한 건데, 니놈은 뭔가 말로 사람을 잘 가지고 논다. 솔직히 말해 좆 같아.”

“상대는 드래곤입니다. 다짜고짜 싸울 수는 없잖아요. 당연히 적진 시찰부터 해야죠. 일단 미르각시가 적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게 먼저예요.”

“확인을 뭣 하러 해?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매?”

“그게 실은 좀 애매한 상황이라서요.”

미르각시는 그때 분명 날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유예를 줬다. 죽이는 걸 보류하고, 내가 한 예언이 맞아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그 유예도 이제는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혹시라도 미래가 빗나간다면, 나로서는 드래곤과 맞짱 뜨는 시나리오를 상정할 수밖에 없어진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제발 빗나가지 않기를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은 아무래도 성미에 맞지 않는다.

드래곤이란 종족은 기본적으로 기분파.

어떻게든 흡족하시도록 용 님의 비위를 살살 맞춰주다 보면, 맘을 바꿔 먹고 나를 살려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녀와 만나려면 저 혼자 가야 돼요.”

“잉? 그럼 난?”

“걱정 마요. 그쪽이 할 일은 따로 챙겨 뒀으니까.”

나는 말했다.

“최근 우리 조직이 점거 중인 구역들에 <페르골리치 패밀리>가 노골적으로 침범을 해 오고 있어요.”

“그 마피아 놈들이 말이냐.”

<홍룡파>나 <언더도그마 브라더후드> 같은 라이벌 조직들이 (나 때문에) 힘을 잃은 현시점 그들은 노스네스트의 실질적인 일인자로 군림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짱센 <페르골리치 패밀리>와 우리 <헬터 스켈터>와의 관계는 (나 때문에) 최악.

아지트가 있는 D 구역 근처에서 하루가 멀다고 서로 간에 항쟁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이다.

“오늘 밤에도 차이나타운 쪽에서 한바탕 치를 예정인데, 할배가 거기 가서 그놈들 손 좀 봐줘요.”

“어쭈, 명령을 다 하네? 내가 니 시다바리냐?”

“<페르골리치 패밀리> 소속 중에는 네임드 빌런들이 상당히 많죠. 뒷세계의 지배자들이니까, 어쩌면 놈들이야말로 ‘세상의 가장 큰 악’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반농담조로 그리 말하자 도그아이드 킴은 심히 못마땅한 듯이 눈초리를 부라렸다.

“니놈은 진짜 말장난이 청산유수구나.”

“칭찬 고마워요.”

“이딴 새끼랑 손잡은 내가 병신이지. 쯔읏.”

개눈깔은 혀를 찼다.

“오냐, 당분간은 장단 맞춰주마.”

어쨌든 그렇게 해서―

최강의 아군이 한 명 늘었다.

***

화요일 오후 8시.

이스트포레스트 1구역.

높디높은 마천루들로 즐비한 이 거대한 도심에서도, 유독 눈에 띄게 우뚝 솟은 한 건물이 있다.

밤하늘을 찔러 하느님의 옆구리에 생채기를 내 버릴 듯한 기세의 그 빌딩은 바로 메이슨 타워.

높이 707미터. 최고 층고는 지상 150층.

어스테이트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서, 전 시장 그레고리 메이슨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시에라시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여기에 드래곤의 둥지, 미르각시의 거처가 있다.

물론 아무에게나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 또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곳에 발을 들일 수조차 없다.

히든 맵에 진입하기 위해선,

특별한 기믹을 취해야만 한다.

메이슨 타워의 입구는 늦은 저녁임에도 여전히 관광객을 포함한 시민들의 행렬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수선스러운 인파를 뚫고 1층 로비를 지나쳐, 그나마 오가는 사람이 드문 구석진 자리에 들어갔다.

보안 설비가 삼엄한 계단실 주변. 문짝에는 떡하니 붙은 ‘관계자 외 출입 금지’란 팻말이 보인다.

경비가 오기 전에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기능 강화 실패>로 CCTV와 카드 키 시스템을 무력화시키고 관리자용 출입구를 통과.

계단실 옆문으로 들어가, 최고층까지 한 번에 연결되는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여기서부터는 실수하면 안 된다.

우선 150층 버튼을 누른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LED 표시기의 층수를 주시한다. 층수가 10층이 된 순간에 열림 버튼을 누르고, 20층이 된 순간에 닫힘 버튼을 누른다.

30층 열림. 40층 닫힘. 50층. 60층…….

150층에 도달할 때까지 그것을 반복한다.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해냈다면,

엘리베이터는 151층까지 향한다.

….

….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 ↓151 ]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기압 차 탓에 먹먹해진 귓속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나서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긴장을 머금고서, 드래곤의 둥지에 발을 디뎠다.

그곳은…… 실로 드넓은 공간이었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높다란 천장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밝은 형광등 조명이, 쓰레기장 같은 꼬락서니의 더러운 방안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대로 비췄다.

오래된 소설책과 만화책들이 정돈이 전혀 되지 않은 채로 천지에 널브러져 쌓여 있었고, 먹은 지 며칠은 지난 듯한 피자 쪼가리나 컵라면 국물 따위가 뒤틀린 퓨전 요리마냥 한 군데에 섞여져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난장판의 중심에는, 한창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는 떡 진 산발의 여인이 있었다.

“죽어라, 죽어!”

뿅. 뾰뵹. 뾰뵤뵤뵹―.

정감이 물씬 느껴지는 효과음. 둥글넓적한 브라운관 TV의 8비트 화면에 얼굴을 파묻을 기세로 플레이에 집중 중인 빨강 추리닝 차림의 초록 머리 미녀.

과연 그 누가 믿을까도 싶지만, 머리에 돋아난 특색적인 두 개의 사슴뿔이 그녀의 정체가 최강의 드래곤, 청룡 미르각시라는 사실을 확실히 일러주었다.

“아타리는 너무 옛날 문물 아닙니까.”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던졌다.

“지금 한다고 그게 재밌기는 해요?”

“모르는 소리. 요즘 인간들도 스타크래프트 대신에 바둑이나 두고 있질 않더냐. 삼천 년 묵은 게임에 비하면 이건 나온 지 아직 반백 년도 안 지났다. 나름대로 최신 게임이라 할 수 있다는 게지.”

“그래서 재밌어요?”

“아니. 갑자기 생각나서 한번 켜 봤는데 재미라곤 일 원 반푼어치도 없구나. GTA나 해야겠다.”

미르각시는 게임기의 코드를 확 뽑아 버리고는 곧장 다른 게임기를 TV에다 연결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에.

“같이 할 만한 건 없어요?”

문득,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있지. 그대는 격투 게임 잘하나?”

“어렸을 때 오락실에서 많이 하긴 했죠.”

“오? 좋아, 그렇다면 지금부터 시리즈별로 승부다. 스파 텍켄 킹오파 순으로 가도록 하마.”

어쩌다 보니 같이 게임을 하게 됐다.

오래는 안 했다. 거의 한 시간 반 정도.

“어이쿠야, 이번에도 내가 이겼구나.”

“아니, ㅆ……. 4프레임짜리 기술을 보고 막는 게 어디 있습니까. 피지컬로 사기 치지 좀 마세요.”

“그대의 패턴이 단조로워 공격이 뻔히 다 보이는 것을 어쩌겠는가? 꼬우면 실력을 키우든가.”

“제기랄. 예에, 제가 졌습니다요.”

미르각시는 내내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꽤 즐거웠다. 이렇게 되기 전까진 겜창 인생이었으니.

“그나저나, 내 처소까지는 무슨 일로 왔는가?”

“참 일찍도 물어보시는군요.”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물어보고 싶구나. 제프도 쉽사리 뚫지 못하는 결계까지 걸어놨는데 말이다.”

“결계 마법의 수준이 높을수록 술식의 방진이 탄탄해지지만, 여러 개의 고등 술식이 겹친 만큼 그만큼 빈틈이 생기기도 쉽죠. 그 틈을 파고들 방법만 알고 있다면 결계를 깨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아요.”

“호오, AAA급 게임에 버그가 많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원리라 이거군?”

“이해력이 탁월하시네요.”

“그대야말로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생각보다 높군그래. 악마의 힘에 의존하는 흑마법사인 주제에.”

“의존하고 싶지 않아서 공부를 좀 했습니다.”

“그런가. 하긴 안 그래서야 그릇이 아까우니.”

청룡은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뱉었다.

그러고는 게임기 전원을 끄고 일어섰다.

“다시 묻겠다. 여긴 무슨 볼일로 왔지?”

근엄한 태도가 묻어나는 말투.

허나 기분 좋은 명랑함이 엿보였다. 지금까지는 내가 그녀의 비위를 잘 맞추고 있다는 증거였다.

“선물을 드리러 왔습니다.”

“선물?”

“이것입니다.”

나는 품에서 그 물건을 꺼내 들었다.

브로치 형태로 가공한 님로드 스톤. <끈적한 용암 공방>의 솜씨 좋은 꼬맹이 장인 쥬 화이트테일이 하룻밤을 꼬박 새워 만들어준 액세서리 아티팩트.

“흐음, 예쁘게 생긴 마석이로군.”

“S급 파워스톤으로 분류되는 님로드 스톤입니다. 특히나 청색 마력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졌죠.”

미르각시는 적색 마력과 청색 마력, 두 가지 색채를 동시에 다루는 마법사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 중에선 단 두 명만이 존재했다는 다중 색채 보유자다.

“파워스톤이라……. 이걸 나한테 주겠다고?”

“예. 상당히 값어치 있는 물건입니다. 암시장 거래가가 3억 달러 선에서 형성되고 있을 정도니까요.”

<나인서클>의 일원들은 정부로부터 천문학적인 단위의 금전 지원을 받기 때문에, 일부 예외를 제외하곤 기본적으로 재물에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하지만 님로드 스톤 같은 레어 아이템의 경우, 돈이 많다고 해서 쉬이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마법사라면 힘을 추구하는 존재. 최강의 드래곤이라도 더 강한 힘에는 욕망을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허면 그대는 그렇게나 귀한 것을 내게 공짜로 주겠다는 것이냐?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물론입니다. 다만…… 넓으신 아량으로 거스름돈 몇 푼만 조금 챙겨 주신다면, 더없이 감사하겠네요.”

감히 드래곤에게 환전을 요구하는 셈이나 다름없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공물을 바치는 입장.

재보를 받아 기분이 좋아지신 용 님께서 친히 금화를 나눠주겠다는데, 거절하면 그게 더 안 좋다.

원래는 님로드 스톤을 암시장에서 팔아보려 했지만, 그러기엔 아무래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시에라시티의 암시장을 지배하는 조직이 하필 <페르골리치 패밀리>였다는 것이다.

암귀 카이트의 신분으로는 놈들 구역에 있는 경매장에 방문하는 것조차 위험천만한 일.

더욱이 악덕 마피아들이 운영하는 경매장에 수억 달러짜리 물건을 팔러 가지고 가봤자 탈탈 털릴 뿐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냥 드래곤한테 님로드 스톤을 가져다 바치고, 호감을 얻음과 동시에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소정의 떡고물을 기대한다는 작전이다.

“오호라, 성심이 참 기특한지고.”

“받아주시겠습니까?”

미르각시는 말했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허나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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