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Dragon Night (1)
나는 시온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 녘의 햇살처럼 아주 잠시 동안 하얗게 개었던 시야는 순식간에 다시 기분 나쁜 빛으로 붉어졌다.
“어이.”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그아이드 킴은 기다란 철근을 효자손 삼아 자기 등을 벅벅 긁으며 나에게로 걸어왔다.
“수고했다잉.”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상황은 그렇게 종료됐다. 이 버려진 도시의 망가진 거리에 이제 남은 이는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니미 뭐시기 하는 스톤은 잘 챙겼냐?”
“여기.”
할배에게 돌을 꺼내 보였다.
<폭렬파>에 의해 까맣게 타버린 전前 리더의 시체에서 회수한 님로드 스톤.
“호오, 기스 하나 안 갔네? 너거가 그 지랄로 깽판을 쳤는데도 의외로 멀쩡한데그래.”
“그 녀석, 나한테 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최선을 다해 이걸 감쌌어.”
“허 참, 지가 뒤져뿌는 상황에 말여?”
그만큼 소중했고, 가지길 원했을 테지.
그래서 그런 짓거리들을 저지른 걸 테고.
“어쨌든 이젠 내 거니까, 뭐.”
당연한 말이지만 죄책감 따위는 없다.
못된 도둑놈을 죽이고 원래 나눠 먹어야 했을 물건을 도로 되찾았을 뿐이니까.
“요놈아,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건 우리 거잖아.”
“아니.”
도그아이드 킴을 흘겨보며,
나는 재차 강조하여 말했다.
“이건 내 거야.”
개눈깔의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갔다.
분노보다는 호기심에 찬 표정이었다.
“니놈 거라고?”
“그래.”
“떼어줄 긴 없고?
“1도 없지.”
허나 슬슬 분노가 좀 생긴 듯했다.
“니 내헌티 짐 진심으로 하는 말이가?”
헛웃음으로 으름장 놓는 듯한 목소리.
방금 나는 진심으로 ‘님로드 스톤은 나 혼자 가지겠다’라고 선언했다. 일말의 농담조도 없이.
“앙? 대답해, 이 새끼야.”
도발이나 다름없는 진언에 개눈깔은 격하게 반응했다. 당연하지만 싸우자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그쪽은 이런 거 필요 없잖아.”
“뭬야?”
“돈이나 벌 목적으로 시온에 오진 않았지. 할배는 무라사메의 저주를 푸는 게 목적이잖아. 안 그래?”
내가 살짝 빈정대는 투로 말하자, 도그아이드 킴은 잠깐 말없이 내 얼굴을 가만히 노려봤다.
“니놈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주워들어서 알게 된 거야.”
“누구헌티 쳐 들었는진 몰라도, 진짜로 다 알고 있다면은 머 얘기가 빠르겠네.”
그는 철근으로 바닥을 툭 짚었다.
언제든 내게 확 휘두를 수 있도록.
“니 분명 암귀라고 했제.”
“일단은.”
“나는 말이다. 그 칼, 무라사메를 맹근 작자가 읊어준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날붙이를 멀리할 것. 선한 자를 해치지 않을 것. 그리고 세상의 가장 큰 악을 멸할 것. 맞지?”
“아따 잘 알고 있네. 그라믄 세 번째 조건이 그중에 젤루 까다롭다는 것도 물론 알긋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눈깔은 손에 힘을 줬다.
“니가 암귀라면 난 니를 죽이는 게 맞다.”
“…….”
“악당인께. 근데 니는 왠지 악당 같지가 않아. 그리고 아까 분명 말했지. 칼 뽑는 걸 도와주겠다고.”
그가 새까만 눈동자로 나를 찌르듯이 보았다.
“어떻게 도와줄 긴데?”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날 죽일 수도 있었다. 물론 이쪽도 감안하고 있던 바였다.
“우리 조직에 들어와.”
굉장히 당당하게 내뱉은 한마디.
할배는 무반응에 가깝게 반응했다.
“뭐, 인마?”
“나랑 같이 일하자고.”
“지랄. 내가 왜 니놈이랑 일을 같이 해?”
“노스네스트는 알다시피 나쁜 놈들이 넘쳐나지. <헬터 스켈터>에 들어오면 시에라시티의 이름난 악당들이랑 틈날 때마다 원 없이 싸울 수 있어.”
“얼씨구, 그것뿐이냐? 그게 굳이 니놈하고 나하고 짝짜꿍해야 할 이유로 들리지는 않는디?”
“맞는 말이야. 무라사메를 뽑으려면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닌, ‘세상의 가장 큰 악’과 싸워야 하니까. 그래, 이를테면…….”
누구라도 그렇다고 인정할 만한,
가히 이 땅에서 최고로 사악한 자.
“드래곤.”
전쟁의 화신. 폭력의 연인. 인류의 적.
절대악이란 개념이 사라진 현대, 구태여 콕 집어 ‘마왕’에 가깝다고 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청룡 미르각시를 말하는 거냐?”
“맞아. 실은 내가 최근에 그 용한테 잘못 걸려서, 목숨을 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거든.”
일주일 전.
나는 외딴 마을에서 일련의 괴사건을 겪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마을 자체가 통째로 드래곤의 마법으로 빚어낸 환상이자 농간질이었다.
심지어 용님에게는 내가 암귀라는 사실마저도 들키고 말았고, 그대로 처형당할 위기에까지 처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드래곤의 흥미를 끌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미래에서 왔다고 뻥카를 쳤다.
내가 알고 있는 게임 속 정보를 기반으로, <나인서클>의 일원 중 하나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체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할 것이라 예지한 것이다.
다행히 그게 잘 먹혀서 당장의 목숨 부지는 성공했지만, 실제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
그때 이후로 2주의 유예를 받았을 뿐이다. 구걸해 받은 그 목숨도 앞으로 며칠밖에는 남지 않았다.
정말 만에 하나 최악의 경우.
드래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내 옆에 있으면 언젠가 그 미르각시랑 싸울 수 있게 될지도 몰라. 이건 흔치 않은 기회이지 않나?”
도그아이드 킴은 바로 그런 경우를 대비한 보험.
청룡 미르각시는 명실상부 <사이버판타지>의 유일무이한 세계관 최강자로 뽑히는 캐릭터지만, 무라사메를 각성한 도그아이드 킴이라면 그 새삼 강력한 드래곤과도 어느 정도는 비빌 수 있으리라 보았다.
“어때? 나랑 같이 일할 생각 있나?”
조용해졌다.
개눈깔은 한동안 말괄량이 어린아이처럼 철근으로 땅바닥을 쿡쿡 쑤셨다.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으흐음.”
계산이 얼추 다 끝난 걸까.
노인은 고개를 앞뒤로 까딱거리며 천천히 내 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포청천같이 입을 열었다.
“좋다.”
거래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주먹을 몰래 불끈 쥐었다.
“더 할 말 없음 이만 캠프로 돌아가지. 이 늙은이는 잠도 못 자고 돌아 댕겨서 피곤해 죽겠으니께.”
개눈깔은 큼지막하게 하품을 하며 내게 칭얼거리듯이 말했다. 그제야 나 역시 시온에 오고 나서 이틀 동안 제대로 쉰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베이스캠프로 돌아갔다.
생존자는 도그아이드 킴과 나, 단 두 사람뿐.
헬기는 예정대로 하루 뒤인 일요일 오후 2시에 도착했다. 그렇게 지옥과도 같았던 시온을 떠나 상대적으로 멀쩡한 시에라시티로 복귀했다.
캠프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해 기관 쪽에 설명하는 것이 좀 고역이었는데, 운 좋게도 도그아이드 킴의 지인 중 하나가 기관 쪽 사람이라 잘 무마시켜 줬다.
개눈깔의 지인은 우리가 님로드 스톤을 빼돌리는 것 또한 친절하게 도와줬다. 덕분에 시가 3억 달러짜리 아이템을 별 문제 없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무튼 뭐,
전부 잘 끝났다.
“…….”
그나저나.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
….
으으음.
아마 기분 탓이겠지.
***
그 시각.
시온. X6구역.
“헉, 후우…… 제엔장…….”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오크 사내.
그를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은 A급 변이종을 포함한 수십 체에 달하는 강력한 괴수들이었다.
“내가, 여기서, 죽을 것, 같으냐…….”
탄약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체력도 바닥나 있었다.
“난, 절대 죽지 않는다……!”
그럼에도 포기할 일은 없었기에.
잭 린든은 장전된 샷건을 들었다.
“님로드 스톤을 찾기 전까지느으으은!”
철컥, 탕―!
탕탕탕탕탕―!
오크 사내는 붉게 물든 도시의 거리를 헤집어 달리며 끝나지 않는 전투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누구도 그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설사 지옥의 무시무시한 괴물들이라 할지라도.
“죽어라, 괴수 놈들아아아!”
잭 린든은 조난 12일 차에 X1 구역의 작전 경로 주변에서 빈사 상태로 발견. 기적적으로 구조됐다.
이는 프로젝트 이래 시온에서 낙오한 자가 24시간 이상 조난 후에 생존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다―.
***
화요일 오전.
윌슨앤코 사무실.
“자아, 이분은 김씨 할아버지예요. 오늘부터 저희 회사 건물 관리인 겸 청소부로 도와주실 겁니다.”
“여어. 안녕들 하쇼.”
작업복 차림에 빗자루를 든 노인이 헤벌쭉 웃어 보이자 사무실의 동료들은 벙찐 듯이 반응했다.
노인은 해괴하리만치 길쭉한 수염과 백발을 가지고 있었고, 웃을 때마다 누런 이가 반짝였다.
“저기, 팀장님……?”
“무슨 일이죠, 스몰필드 씨?”
소개를 마치고 난 뒤, 곧장 스몰필드 씨가 내 뒤로 쫄래쫄래 따라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물었다.
“새로 오신 직원분, 언제 뽑으신 거예요?”
“어제요.”
“사장님이랑 상의는 하신 거 맞죠……?”
“아뇨. 인사 권한은 저한테 있거든요.”
“그, 저희 요즘 안 그래도 빠듯한데, 이렇게 갑자기 쓸데없는 인건비까지 늘려 버리시는 건 좀…….”
스몰필드 씨는 사뭇 조심스러워 보이면서도 내게 지적하는 태도 자체는 매우 진지했다.
“걱정 마세요. 인건비 안 들어가니까.”
“네……?”
“실은 저분이 여기 건물주시거든요.”
“네에……?!”
“은퇴하고 혼자 사시는데 요즘 들어 적적하고 뻐근하다면서 뭐 일거리가 있냐 물어보시더라고요.”
“아, 그럼 취미로…….”
“맞아요. 어르신 취미인 셈이죠.”
물론 다 뻥이다.
도그아이드 킴은 드래곤으로부터 날 지킬 보디가드로 데려온 것이다. 뭐, 본인은 어느 정도 이런 잡일꾼 역할에 흥미가 있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저기요, 유진 씨.”
“넌 또 왜.”
스몰필드 씨가 수긍하고 물러나자, 이번에는 비너스가 나를 데리고 나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아까 그 사람 도그아이드 킴이죠? 맞죠?”
“뭐야, 어떻게 알았냐?”
“10년 전인가 용병 일하다 마주친 적 있거든요. 뭣도 모르고 깝치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미성년자는 안 죽인다고 해서 겨우 살았어요. 그땐 제가 17살 여고생 마법사로 위장하고 있었거든요.”
“진짜 양심 뒤지셨네요, 비너스 할머니.”
“됐구요. 그보다 유진 씨 설마 도그아이드 킴을 조직에 영입한 거예요? 찐으로다가?”
“뭐, 그런 셈이지.”
“와, 대박. 우리 유진 씨, 기초 마법 몇 개에 쩔쩔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많이도 크셨네…….”
“할 얘기 끝났냐? 슬슬 가서 일 좀 할까?”
“잠만, 도그아이드 킴이 있으니까, 이제 저는 여기 없어도 되는 거 아녜요? 저 퇴사해도 되져? 넹?”
“도그아이드 킴이 네가 사실은 자기랑 또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죄송합니다. 가서 일할게요.”
비너스가 시무룩한 얼굴로 자리에 돌아가고 나서, 바로 연이어 우리 회사 청소부 김씨가 나를 찾았다.
“어이. 암귀야.”
“회사에선 그렇게 부르지 마시죠.”
우리는 복도 화장실 앞에서 얘기를 나눴다. 사족이지만 도그아이드 킴은 작업복이 참 안 어울렸다.
“드래곤은 언제 만나게 해줄 거냐?”
“재촉할 것 없어요. 다 계획이 있으니까.”
나는 말했다.
확고한 어조로.
“오늘 밤에 만나러 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