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Use Your Illusion (6)
“좋다. 몇 가지 묻도록 하마.”
“…….”
“그대가 정녕 미래인이라면 쉬이 답할 수 있겠지.”
임기응변으로 대충 꺼낸 말이었지만, 어쨌든 미르각시의 흥미를 끄는 것에는 성공한 듯 보였다.
지금부터는 내가 그녀의 흥미를 얼마나 오래 지속시킬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그대는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인가?”
“아뇨. 물리적인 시간 여행이 아니라, 미래의 기억만이 과거의 자신에게로 전송된 겁니다.”
“흐음, ‘슈타○즈 게이트’식이로군. 하긴 요새 ‘백 투 더 퓨○’ 같은 클래식 타임머신 스타일은 너무 구닥다리긴 하지. 그러면 정확히 언제쯤의 미래에서 온 것이냐?”
“약 1년 뒤입니다.”
“겨우 1년? 그리 먼 훗날도 아닌데, 설마 타임머신이 1년 안에 발명되기라도 한단 말이냐?”
“사실, 저도 모릅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과거에 돌아와 있었다― 정도로만 설명할 수 있겠네요.”
“그렇다는 것은, 슈타게보다도 ‘나만○ 없는 거리’ 혹은 ‘도쿄 리○저스’ 쪽에 가깝나…….”
미르각시는 저 혼자 오타쿠스러운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고찰에 임했다.
“증명할 수 있나? 그대가 미래에서 왔다는 것을?”
……왔다.
가장 핵심적인 질문.
지금이 바로 갈림길이다. 이 질문에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내 운명이 정해진다.
물론, 나는 미래에서 오지 않았다.
다만 미래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사이버판타지>를 플레이하는 동안 알게 된 게임 속의 정보, 즉 미래 시점의 정보가 있다.
굳이 미래에서 왔다고 뻥카를 친 이유는 ‘이 세상은 사실 게임 속 세계다!’라는 허황된 이야기보다야 그쪽이 훨씬 더 직관적이고 설득력이 있기 때문.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미래인이라고 납득을 시키는가?
방법은 어렵지 않다. 미래인만이 알 수 있는 정보를 내놓으면 된다. 방금 말한 게임 속 정보 말이다.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때려 맞히는 게 불가능하고,
조작을 시도할 여지가 없으며,
가능한 한 가까운 시점의 정보.
“…….”
허나,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여기저기서 저지른 이질적인 짓거리들 탓에, 상당수의 미래가 바뀌어 버렸다는 점이다.
예정보다 한참 빠른 <홍룡파>의 몰락.
자그말렉 피터스 같은 주요 캐릭터의 사망.
주식회사 윌슨앤코 사원들과 나의 생존 등등등.
분명히 ‘암귀 카이트’의 존재가, 이 도시의 여러 부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내가 원래 알고 있는 미래가 엇나갈 가능성이 존재하므로, 좌우지간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2주 뒤.”
짱구를 굴려 겨우 내놓은 대답은,
나름대로 정답에 가까웠다고 본다.
“나인서클의 제6원, ‘시간의 마도사’ 제퍼슨 브리즈가 공식적으로 나인서클 탈퇴를 발표할 겁니다.”
<사이버판타지> 메인 스토리의 고정 이벤트.
아마 그 미래만큼은 웬만해선 변하지 않을 터.
만에 하나 틀린다 할지라도,
최소 2주는 목숨을 부지한다.
“……확실한가?”
“예.”
나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로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마쳤다. 남은 건 미르각시가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
“흠.”
용은 생각에 잠긴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믿어 보마.”
감각이 옅어지며,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어어,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었을까.
갑자기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
휘청―.
곧 눈이 스르륵 감기고,
몸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흐릿한 의식 틈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봐요, 이봐요!”
누군가 옆에서 내 어깨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나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부스스 뜨인 눈꺼풀 사이로, 웬 처음 보는 중년 여성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니, 이보셔요. 팀장님. 잠깐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대놓고 졸고 계시면 어떡해요?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사람 불러 놓고 무슨 예의인지, 참.”
……뭐지? 이 아줌마는 누구야?
그때쯤에 문득 콧속에 커피 향이 감돌았다. 동시에 이곳이 내가 와본 적 있는 장소임을 직감했다.
웨스트록 1구역의 카페.
델핀 부인을 만났던 장소다.
“하여튼 빨리 도장이나 찍어 주시라고요. 우리 남편이 요것 땜에 하도 원성이라 못살 것 같으니깐.”
“…….”
“측량 파일은 남편이 메일로 보내드렸어요. 토지 소유 증명서랑 개발권 양도 서류는 가지고 오셨죠?”
이상하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상황이다.
게다가 이 위화감은 이젠 정겹기까지 하다.
“저기 죄송한데,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 화요일이잖아요.”
“오늘이 그, 건국기념일 맞나요?”
“그쵸. 쉬는 날인데 그쪽서 급하다고 해서 나온 거 아녜요. 대체 뭔 뚱딴지같은 소릴 하는 거람.”
화요일이라면, 이틀 전이다.
그 마을로 떠났던 바로 그 날.
“……뭐지……?”
기억이 몽롱하다. 아무래도 뭔가 개운치 않다.
마치 시간 속에 갇혀 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설마.
……전부 꿈이었나?
몸은 평소처럼 피곤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고생한 것에 비하면 아주 멀쩡한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마을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허나 그때도 지금도 굶주렸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이봐요. 도장 안 찍으실 거예요?”
“……아, 죄송합니다. 델핀 부인.”
“내 이름은 매카시인데요. 델핀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부동산 이야기는 생각보다 시시했다.
매카시 부인의 남편은 실종되지 않았고, 수수께끼의 마을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윌슨앤코는 시에라시티 외곽 시골 땅의 개발권을 지역 컨소시엄에 양도하고 그 몫으로 매매가 200만 달러 상당의 땅문서를 챙겼다. 다만 수수료와 세금 등을 납부해야 했기에 당장 현금 사정이 곤란해졌다.
결국 찝찝함을 머금은 채 사무실로 돌아왔다.
거의 3일 만에 보는 것 같은 타이퍼가 거기에 있었다. 녀석은 한 30분 만에 나를 본 듯했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그래. 별일 없었지?”
「소포가 하나 왔습니다.」
로봇 녀석이 꾸러미를 가져와 내게 건넸다.
건성으로 포장된, 꽤나 묵직한 종이 상자였다.
“뭐야, 이거. 어디서 보낸 건데?”
「발송인은 불명입니다. 수취인은 주인님 성함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째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물건이었다.
타이퍼에게서 받은 소포를 책상에 가져와,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고 상자를 열어보았다.
스윽―.
상자 안에 있던 것은,
낡고 녹슨 청동제 투구.
“…….”
흑마법 아티팩트.
하데스의 투구였다.
“허어.”
의도는 잘 모르겠다.
용 님이 주신 선물인 걸까.
일단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청룡 미르각시라고 하는 사상 최악의 스토커는, 여전히 나한테 들러붙어 있는 듯하고 말이지.
어쨌거나.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팔면 돈 좀 되려나, 이거.”
하루하루를 그저 마냥,
꾸역꾸역 살아갈 뿐이다―.
***
백색의 공간.
미르각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그 친구가 꽤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어느새 한 남자가 그녀의 등 뒤에 자리해 있었다.
가볍게 다듬은 갈색 머리에 평탄한 인상을 가진 사내는 화려한 외양의 미르각시와 매우 대조됐다.
“음, 오랜만에 외출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6개월 만이었죠? 갑자기 전화 거시길래 또 무슨 미친 짓을 벌이시려는 걸까 걱정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평소보다 건전하지 않았느냐.”
“그렇긴 하죠. <시간의 틈>까지 쓰게 만들어서 한단 짓이 기껏 인간 하나 갖고 논 정도니까요. 소행성 충돌이나 태양 폭발 같은 우주급 천재지변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 개발한 비술인데, 하아…….”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르각시는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확실히 이건 정말 대단하더구나. 시공상으로 바깥과는 완전히 독립된 고유 결계 공간. 이쯤 되면 거의 새로운 우주를 하나 창조한 셈이 아니더냐?”
“대단한 건 당신이죠. 원래는 물리 법칙마저 존재하지 않았던 무無의 공간에 사물을 만들고, 그것들에 일일이 상호 작용형 술식을 적용시켜 현실 세계와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아니. 제대로 만든 오픈 월드 게임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역시 나는 플레이어 쪽이 적성에 맞아.”
용은 겸손을 떨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겸손이었다. 미르각시의 환영 마법은 그 수준이 극단적으로 높아, 어느 정도냐 하면 만들어진 환영에게 자아를 주입시키는 것까지 가능했다. 그녀를 제외하고는 세상에 그 어떤 마법사도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자아가 생긴 인격체의 환영은 자신이 환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해 혼란에 빠지고 말았고, 그 결과 세계가 점차 붕괴했다. 인공지능이 너무 사실적이었기에 벌어진 참사였다.
“그나저나, 제프. 그대는 혹시 정말로 나인서클에서 탈퇴할 셈인가?”
“아까 그 친구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응. 일단은 믿어 보기로 했다.”
남자는 또 한숨을 내쉬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실은, 솔직히 저도 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고 있었던 거거든요.”
“뭐야? 정말로 관두려고?”
“생각은 꽤 예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제 동생 일도 있고, 말 안 듣는 누구누구 씨 꼬붕 짓거리나 뒤치다꺼리를 하는 데도 회의감이 들어서요.”
“하하. 농담이 심하구나.”
“농담 같습니까?”
“으흐음, 아무튼 고놈 말이 맞았구만그래.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었어. 진짜 미래인이었나 본데……. 와하하! 대박이군! 스즈미○ 하루히 같은 일이 나에게 벌어지다니! 참으로 유쾌하구나!”
미르각시는 몹시 신이 난 듯 야호 소리를 외치며 어린아이처럼 제자리서 방방 뛰었다. 아무래도 친한 벗의 숨겨 왔던 고민 따위는 뒷전인 모양이었다.
“뭐, 비폭력 평화주의자인 제 입장에선 그래도 잘됐네요. 괜히 사람 목숨 뺏을 일은 없어졌으니.”
“응? 아니,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예?”
“죽이기엔 아까웠다. 여러모로.”
용은 빙긋 웃으며 유진에 대해 떠올렸다.
자신과 대면한 그 남자의 얼굴, 그리고 눈빛을.
“나랑 같이 있는 내내 오른손과 단전에 마나를 장전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바로 쏠 셈이었겠지.”
“…….”
“재미있지 않으냐? 내가 자기를 살려줄 것 같지 않으면, 감히 나랑 한바탕해볼 생각이었다는 게다.”
세상의 그 누구도 대적할 자가 없다는 최강의 드래곤.
그런 자신에게 이빨을 들이밀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영감탱이의 유산이니까.”
유진의 심장에 깃들어 있던 무한의 마나.
그것만으로도, 죽이지 않을 가치는 충분했다.
“뭐랄까, 키워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