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Use Your Illusion (5)
드래곤.
날개 달린 뱀의 형상을 한 신수神獸.
그 신비한 마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화와 전설 속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북유럽의 요르문간드.
메소포타미아의 티아마트.
알베르. 샐러맨더. 헝가리안 혼테일.
실존했던 수많은 드래곤 가운데, 개중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존재를 하나만 뽑으라 한다면 누구나 그 이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미르각시.
먼 옛날 아메리카에서는 케찰코아틀이란 이름의 용신으로 칭송받았으며, 또 어느 시기에는 레비아탄이라 불리는 지중해의 괴물로서 악명이 자자했다.
전성기 때는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과 동쪽을 하루 사이에도 몇 번씩 오가며, 카이사르의 유럽 정벌과 진시황의 중화 통일을 곁에서 재미로 돕기도 했다.
초대 검성 잔 다르크의 칼에 역린을 찔려 반만년 용생 최초로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기적적으로 생환. 이후 잠적하여 중세 서양사에서의 기록은 묘연하다.
한반도에 머물던 시절에는 바리미리, 혹은 이무기라 불렸다. 훗날 신성 아티팩트 여의보주의 힘으로 마력을 되찾아 부활했다. 그때 얻은 이름이 ‘미르’다.
이후 그녀는 동양의 수호신으로 기려졌다.
청룡, 혹은 타츠미노쿠즈류. 지금까지도 그녀를 일컫는 대표적인 별호는 청룡이다.
……여기까지가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사이버판타지>의 등장인물 ‘미르각시’에 대한 설정.
가장 위험한 드래곤이자,
현세대 세계 최고의 마법사.
강함으로 따지면 게임 속에 등장하는 모든 NPC 중에서 단연 1위. 문자 그대로 세계관 최강자다.
기본적인 스탯과 보유 스킬의 성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 치트를 쓰지 않고서 쓰러뜨리는 것은 이론상 불가능에 가까워, 어지간한 고인물이라 해도 일반적으로는 건들지도 않는다.
‘미르각시 사냥’은 그야말로 <사이버판타지>의 엔드 콘텐츠, 아니, 꿈의 콘텐츠라 봐야 할 터였다.
하여튼 그런 미친 캐릭이,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있다.
주변의 이미지가 온통 일그러진 회색의 땅.
죽음 이후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 같은 기이한 공간에서, 미르각시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대는 내가 누군지 아는가?”
인간 폼의 모습은 20세 전후의 미녀.
한복과 기모노를 섞은 듯한 아방가르드한 동양풍 의상에, 불씨를 심은 듯 연신 번쩍이는 눈동자와, 길고 영롱한 청록색 머리카락 위로 돋아난 사슴뿔이, 그녀의 정체가 인간이 아님을 보는 이로 하여금 짐작게 했다.
“……알지. 그 유명한 용님이시잖아.”
“오호라, 알면서도 반말을 하는 겐가.”
용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예쁜 미소가 사실 어이가 없어서 튀어나온 실소에 가까웠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건방지구나.”
섬뜩―.
숨이 덜컥 막혔다.
피부가 떨리며 오금이 저려왔다. 노려보는 눈빛의 위압감만으로, 심장의 고동이 잠시 동안 멈췄다.
“언행을 잘 고르도록 해라. 나는 기분이 좋다가도 나빠지는 경우가 잦으니. 이걸 아마 분노조절장애라고 한다지?”
“…….”
“그대가 나를 알고 있듯 나 또한 그대를 알고 있다. 유진 연. 카이트. 암귀.”
용은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8년 전에 죽었을 놈이 돌아왔다기에 거짓부렁인 줄로 알았는데, 아주 그런 건 또 아니었군그래.”
“……내가 암귀란 걸 어떻게 알았죠?”
나는 의식적으로 반말 대신 존댓말을 했다.
“자그말렉 피터스. 옛적에 좋은 샌드백이었던 그 천치 트롤 놈이 서신을 보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다만, 최근 나인서클에서도 그대가 언급되었지. 내 홀연 관심이 생겨서 한번 만나보기로 한 것이다.”
예전에 비너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얘기한 상황이 딱 지금이군. 설마 진짜로 대마법사급의 스토커가 나한테 따라붙었을 줄이야.
“그래서, 언제 눈치챈 것이냐?”
미르각시가 내게 물었다.
이 마을 자체가 통째로 환각이었다는 사실을 언제 눈치챈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바로 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의심할 정황은 꽤 많았다. 돌이켜 보면 너무 많아서, 진지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던스타.”
“흠?”
“게임에 나오는 마을 이름이죠. 그거.”
“오? 아는구만? 그래, ‘스카○림’은 갓겜이지!”
“언덕 위에 있었던 교회는 존 카펜터 감독의 ‘인 더 마우스 오브 매드니스’에 나오는 교회랑 똑같이 생겼고. 호텔에서 묵은 객실 1408호는 스티븐 킹 소설. 보안관 레스트레이드와 FBJ 요원 레이먼드 펜버는 각각 ‘셜록 홈즈’랑 ‘데스○트’에 나오는 조연 캐릭터 이름에서 따온 거죠.”
“호오, 알아낸 건 그것뿐이냐?”
“델핀 부인의 목소리.”
왜인지 말하는 동안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매지컬 아이돌 나에리쨩’의 시즌1 메인 악역 잿빛여왕의 성우랑 똑같은 목소리죠.”
그때.
미르각시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정답이다! 알아주다니 참 기쁘구나!”
그녀는 마치 자기만 아는 원작의 오마주를 또 다른 찐팬에게 발견 당한 동인 작가처럼 기뻐했다.
……그래. 원래 이런 캐릭터였지.
21세기에 들어와 나인서클의 제2원으로 선출된 이후, 현시점에서 미르각시는 별달리 하는 일 없이 그저 몇 날 며칠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게임과 만화나 영화 따위에 환장해 사는 히키코모리 오타쿠였다.
게임에서도 미르각시를 만날 수 있는 건 그녀의 거주지인 메이슨 타워의 숨겨진 맵으로 들어갔을 때뿐.
다만 실질적인 상호작용이나 관련 퀘스트 하나 없는 시크릿 NPC이기 때문에 설정상의 맥거핀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이야, 그대도 나와 같은 씹덕이었을 줄이야.”
“아니 저기, 씹덕까진 아니고, 그, 아무거나 두루두루 잘 보는 스타일이긴 합니다.”
“그래도 자기만의 취향 정도는 있을 테지. 좋아, 어디 한번 알아보자꾸나. 제일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은 무어냐? 참고로 나는 ‘드래곤 길들○기’다. 감히 드래곤을 길들이겠다는 인간의 그 발상이 귀여워 죽겠지 않느냐? 그리고 또, ‘○바야시네 메이드래곤’도 꽤 재밌게 봤다. 거기에 나도 캐릭터로 나오던데, 나랑 생김새가 얼추 비슷해서 깜짝 놀랐느니라.”
“그렇군요.”
“그대는? 뭘 좋아하나?”
“아, 저는…….”
왠지 묘한 전개였다.
긴장감으로 그득했던 상황은 어느새 느슨하게 풀어져, 졸지에 덕후들끼리의 수다 판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애니 얘기로만 거의 1시간여를 보내고 난 뒤.
“……결론은 노래 빼고 작품만 본다면 ‘겨○왕국’보다 ‘라푼○’이 낫다는 거다. 물론 내 기준이지만.”
미르각시는 저 혼자 멋대로 논쟁의 여지가 짙은 결론을 내리더니, 후련한 듯 긴 숨을 뱉었다.
“하아, 오랜만에 참 많이도 떠들었구나. 너무 말을 많이 해서 그런가, 목이랑 입이 바싹 말랐어.”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아무것도 없었던 허공에 캔콜라 하나가 뿅 하고 생겨났다. 미르각시는 콜라를 따서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캬 하고 소리 냈다.
“그대도 마시겠나?”
“……아, 예. 감사합니다.”
새것을 주는 줄 알았더니 자기가 마시던 캔을 고대로 나에게 넘겼다. 나는 용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몇 모금을 마셨다. 콜라는 냉장고에 넣어둔 것처럼 시원했다.
“즐겁게 해줘서 고맙구나.”
“…….”
“인복이 모자람을 내세워 창피하다만, 내 주변에는 이런 얘기를 나눌 상대가 좀처럼 없어서 말이지.”
용이 웃으며 말했다.
멋쩍은 듯한 어조였다.
“뭐어, 잘 즐겼으니.”
미르각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서, 떠드느라고 한 시간 동안 앉아 있던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이제 벌을 줄 시간이군.”
그때쯤.
분위기가 변했다.
변한 것은 비단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주변 공간의 구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어?”
거꾸로 된 중력이 나를 잡아당겼다.
두둥실 떠오른 몸이 공중에 고정됐다.
“요 이틀 동안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대가 너―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지.”
쿵, 하는 북소리 같은 소리와 함께.
붉고 푸른 꽃들이 주위에 피어났다.
그것은 적색 마력과 청색 마력.
두 가지 빛깔의 마나 불꽃. 역사상 단 두 명만이 이룩했다는 다중 색채 마력의 구사.
“암귀 주제에 왜 사람을 안 죽이는 겐가?”
“외부와 단절된 시골의 마을. 마음껏 살인하고 다니기엔 그야말로 딱 좋은 환경이 아닌가?”
“기껏 판을 깔아줬더만. <부름>도 쓰지 않고.”
사방에서 거센 촉감이 느껴졌다.
짓누르는 힘. 순수한 마나의 압력.
서걱, 주륵―. 피부에 생채기가 났다.
마나는 아직 내 몸에 직접 닿지도 않았다. 단지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진동만으로 이 정도였다.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다.
“스토리랑 연출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그대의 소심한 행동거지가 죄다 잡쳐 버렸다. 내 기분까지도.”
오타쿠 토크에 정신이 팔려 그만 잊고 있었다.
내 앞의 상대가 대체 어떤 존재인지를 말이다.
백년 전쟁. 임진왜란. 제1차 세계 대전.
미르각시는 전쟁의 화신이었다.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는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 어떤 전쟁은 본인이 심심하단 이유로 일부러 일으킨 것이었다.
폭력. 그 용이 사랑해 마지않는 것.
한때 심심풀이로 나라를 멸망시키기도 했던 악한에게, 고작 사람 하나를 죽여 버리는 것쯤은 미시적인 예사에 불과했다.
“나는 그대가 재미있는 녀석이라 생각해서 데려온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게지.”
“…….”
“방금 전에 그대와 나눈 대화는 매우 즐거웠었다만, 그것도 이제는 질리기 직전이구나.”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있어 나는,
노리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장난감.
“내가 그대를 살려둘 이유가 있을까?”
미르각시가 내게 물었다.
살고 싶다면 마지막 발버둥으로 한마디라도 해보라는 질문이었다.
“조용하군. 할 말은 없는 겐가?”
“…….”
밑도 끝도 없는 목숨 구걸 따위가 통할 리는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용을 설득해야만 했다.
“……저는…….”
나는 재미있는 녀석이라는 것을,
훌륭한 장난감임을, 증명해야 했다.
그리하여 입을 열었다.
입에 담은 말은 단 한 줄.
“미래에서 왔습니다.”
이렇다 할 고심도 없이 내뱉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쌩구라였다.
“……뭣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것도 꽤 자세히요.”
“…….”
“뭐, 당장엔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를 죽이지 않고 살려 놓는다면 얘기는 다르겠죠.”
미르각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허나 최소한의 흥미를 끌었음은 명백했다.
“어쩌시겠습니까?”
용은 굳은 무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노려보는 시선이 한참 동안 쪼았다.
“하.”
잠시 후.
그녀는 피식 웃었다.
“거참 웃기는 놈이로구나.”
피부를 조여 오던 압력이 조금 사라졌다.
살기가 줄어들고, 주변에 날카롭게 뻗어 있던 마나 불꽃들이 차츰 둥근 모양으로 사그라들었다.
“미래에서 왔다고…… 하핫. 이거 완전.”
미르각시는 신이 난 듯 웃음 지었다.
“‘시간을 달리○ 소녀’ 같구나!”
역시.
오타쿠라 먹히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