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107화 (107/201)

107화. It’s a Sin to be Rich (1)

이스트포레스트 2구역.

<세계수 신전> 조화의 방.

“다들 모이신 것 같군요.”

현기증처럼 까마득하게 이어진 나선 계단의 가장 아래쪽 중심에 자리한 지하 공간의 원탁.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둥근 탁자에는 각자 개성이 넘치는 인물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국가 지정 최강의 9인― 나인 서클Nine Circle.

자타공인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아홉 마법사들의 모임.

“그럼, 지금부터 정기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100세는 먹었을 것으로 보이는 지긋한 나이의 노인이 자신의 길게 뻗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 또한 원탁에 앉은 이들의 일원이었다.

“결원 사실 알림 드리겠습니다. 제1원 ‘천년마녀’ 슈이. 제2원 ‘청룡’ 미르각시. 이상 두 분은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여 대리인을 입석시키셨습니다.”

노인의 오른쪽에 나란히 앉은 두 명은 검은 양복과 선글라스 차림으로, 확실히 이곳에 있는 다른 이들과는 살짝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띠었다.

“마녀님은 또 불참이신가―.”

“어쩔 수 없죠. 그녀는 10년도 더 전부터 사실상 행방불명 상태니까요.”

「저는 솔직히 마녀님보다도 용님의 행태가 안드로이드적으로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 히키코모리 드래곤이 겨울잠을 잔다는 핑계로 회의에 안 나온 지가 벌써 3년이 넘었습니다! 심지어 거처인 메이슨 타워는 여기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지 않습니까?」

“미호도 같은 의견이에요. 우리라고 뭐 미치게 한가해서 여기 꼬박꼬박 참석하는 게 아닌 것인데……. 마스터 귄터, 총회장으로서 당신이 그분에게 따끔하게 한 말씀 전해주시는 건 어떨까요?”

“이런, 좀 봐주시지요. 이 늙은이 남은 생의 유일한 소망은 침대서 눈 감고 죽는 거란 말입니다.”

노인은 허허 하고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웃으며 말하긴 했지만, 마냥 농담인 것만도 아니었다. 나인서클의 제3원이자 아케인 마스터란 칭호를 가진 비전 마법의 달인 귄터 사지타리우스에게조차, 청룡 미르각시는 그만큼 두려운 존재였다.

“무어, 일부 회원의 결석 문제에 관해서는 기관 쪽과 함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처리할 안건이 제법 많으니, 우선 해야 할 일에 먼저 집중해 주셨으면 하는군요.”

총회장 귄터의 말에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다.

없는 자리서 볼멘소리를 뱉을지언정 그 미치광이 드래곤을 직접 찾아가 면전에서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들 용기가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좋습니다. 회의를 시작하지요.”

<나인서클>이 하는 일은 간단했다.

일단 그들의 실질적인 역할은 정부의 마스코트. 참새를 내쫓는 허수아비와 같이 존재만으로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쿠데타를 막아내는 억제책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정기총회 때마다 정부는 나인서클에게 도시 치안 상황 등을 보고하며, 이따금 공권력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대형 빌런이 나타났을 경우 그들에게 나서줄 것을 요청한다.

정부에서는 한 달마다 갱신되는 주요 범죄자들의 랭킹 리스트를 나인서클에 제출하게 되는데, 이것은 ‘배드 피플 50’이라 하여 대중에도 공개된다.

“당월 상위 10위권 내에 특별한 변동 사항은 없습니다. 1위는 <페르골리치 패밀리>의 보스 아르투로 페르골리치, 2위는 <유성회> 두목 야나기 코우키로 각자 순위 유지. 3위는 미발흉검 도그아이드 킴, 전월 대비 5순위 상승…….”

배드 피플 50 리스트에 들어가는 이름들은 전원 시에라시티에서 그 악명이 자자한 네임드 빌런.

「뭐 딱히 눈에 띄는 놈은 없군요!」

“현상금 1위가 꼴랑 2억 달러어―? 세금 떼면 1억도 안 남겠구만, 이걸 누구 코에 붙이란 게야?”

“예전에 비해 확실히 네임밸류들이 줄어들긴 했네요. 도시 치안이 안정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스트로베리 시장이 이 흐름을 잘 이어가야 할 텐데.”

허나 <나인서클>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흉악 범죄자라 해도 위협이 되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기에, 그들로서는 심드렁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정부 측의 특별 처단 요청은 있었나요?”

“아니요. 이번에도 없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의견을 하나 말씀드리자면…….”

총회장 귄터 사지타리우스는 리스트의 이름 하나를 짚었다. 그가 짚은 이름은 맨 아래에 있었다.

“50위. 암귀 카이트.”

배드 피플 50 리스트에 신규 진입.

최초로 이름을 새긴 뉴 페이스 악당.

“이자는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나인서클의 일원들은 침묵했다.

정적의 틈바구니에서 입을 연 것은 제8원, ‘아홉 꼬리 여우’ 구로사와 미호였다.

“그리 말씀하신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마스터 귄터?”

여우의 중성적이면서도 요염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귄터 사지타리우스는 곧바로 답했다.

“‘암귀’가 누구인지는 다들 아실 테지요.”

공식적으로는 ‘언디파인드’라 칭해졌던 살인마.

단 2년 만에, 시에라시티에 있는 가이우스급 이상의 마법사들을 절반 가까이 숙청한 공포의 존재.

정부는 전무후무했던 특별 처단 요청을 통해 암귀를 처리해줄 것을 <나인서클>에 의뢰했고, 이 요청은 회의 결과 만장일치로 수락이 받아들여졌다.

“당시 제4원이었던 ‘업화의 마도사’ 카미유 레이 공이 직접 나서 암귀를 처단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 싸움에서 큰 부상을 입어 버리고 말았지요.”

「음, 업화 그 친구에겐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만, 덕분에 제가 이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죠.」

“하지만 마스터 귄터, 암귀는 그때 죽은 것이 아니었나요? 돌아왔다고 해봤자 가짜일 텐데요?”

“그 가짜에게 제 친우, 스테파노 멜리에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디바인 마스터 스테파노 멜리에스.

치매를 앓기 이전의 전성기 기량으로는 나인서클에 준하는 강함을 지녔다고 알려졌던 실력자.

“이 카이트란 작자는 필히 10년 전과 같은 거대한 지옥을 이 도시에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

“고로, 최소한 특별 관리 대상에는 포함시켜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귄터 사지타리우스가 일동에게 말했다.

원탁에 앉은 이들은 썩 달갑지 않아 보이는 태도였으나, 그렇다고 아주 비협조적이지도 않았다.

「저는 찬성입니다. 악은 멸해야 마땅하죠!」

“난 반대. 그런다고 돈 더 줄 것도 아니잖아―?”

“흐으음, 전 아직 잘 모르겠네요. 판단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미호도 기권할게요. 귀찮아 보이는 일에는 되도록 끼지 말자는 주의라서.”

귄터 사지타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찬성은 저까지 둘. 반대 하나. 기권 둘이군요.”

제1원과 제2원은 불참.

제9원은 공석이므로, 현재 인원은 여섯.

“그렇다면…….”

회의가 시작된 이래로 이 원탁에서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은 이가, 딱 한 명 있었다.

“알리시아 공.”

제5원. 알리시아 벨카폴리아.

눈처럼 깨끗한 순백의 머릿결을 지닌 엘프가 귄터 사지타리우스의 부름에 느지막이 반응했다.

“귀공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암귀 카이트를 위험한 존재라 생각하시는지요?”

그가 그녀에게 묻고서, 한참이 지났다.

알리시아 벨카폴리아는 질문이 뭐였는지 잊어버려도 이상치 않을 때가 돼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난 별로.”

세 음절의 짤막한 답변.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여자가 대뜸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핫! 설마 지가 가짜 마녀라서 가짜 암귀 편을 드는 거야? 찐따끼리 동병상련 개웃기네!”

「어허, 미스 바르베이라! 말조심하세요!」

“고물덩어리는 닥치시지, 에베베벱―.”

「하여간 못 배워먹은 티를 철철 내시는군요. 이래서 마족이랑은 말을 섞으면 안 된다니까.」

“이 깡통 로봇 새끼가…… 말 다 했냐? 시팔 너 이 새끼 처음 봤을 때부터 맘에 안 들었어.”

「누군 당신이 맘에 들었는 줄 아시나요. 천박한 오우거 주제에 인간 세상에 빌붙기나 하고. 돈만 주면 뭐든 다 한다니 매춘부랑 다를 게 뭡니까?」

몇몇 일원 간의 유치한 말다툼 탓에 회의실의 분위기는 급격히 안 좋은 방향으로 꺾이고 말았다.

“그만. 진정하십시오. 여러분!”

귄터 사지타리우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재차 말길을 돌려 원탁에 앉은 모두에게로 향했다.

“투표 결과, 찬성 둘, 반대 둘, 기권 둘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당분간 보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지요.”

***

아침.

도마를 탁탁 두드리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일어났어, 아들?”

그리고 내가 눈뜨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부엌의 여자가 싱긋 웃으며 이쪽을 돌아봤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다 되니까.”

파자마 차림의 검은 머리 여인― 메리.

겉보기엔 대략 스무 살 언저리로 보이는, 그럼에도 자기가 내 엄마라고 주장하는 미친 여자다.

“냄새 좋네요. 된장국 끓였어요?”

“아들이 먹고 싶대서, 어제 한인 마트 가서 재료 사 왔어.”

“위험하니까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요.”

“괜찮아. 혼자 안 갔어.”

그녀는 옆옆 집인 210호에 사는데, 가끔 이렇게 밥을 차려주러 내 방에 불쑥 찾아오곤 한다.

문을 잠가 놓으면 열 때까지 콩콩콩 두드리며 기다린다. 내가 방에 없어도 말이다. 그래서 요즘엔 출근할 때도 그냥 문을 열어 놓고 나가는 편이다.

“맛있어?”

“음, 맛있네요.”

“다행이다. 처음 만든 건데.”

된장국과 계란말이만으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이런 집밥을 먹어 본 게 얼마 만이던가.

“저기, 아들 먹고 남은 반찬은 저쪽 집에 챙겨 가도 될까? 애들 아침 먹여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딸이 두 명 있다고 했죠?”

“응. 큰애가 스칼렛. 작은애가 시안.”

“반찬 가져가는 건 상관없지만, 다음에는 그냥 그 애들도 여기 데리고 와서 다 같이 밥 먹죠.”

“그래도 돼?”

“예. 아무 때나 괜찮아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집에 왔을 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분 좋고 행복한 일인지, 최근에야 깨달았다.

“잘 먹었습니다. 재료비 얼마 들었어요?”

“아냐, 돈 안 줘도 돼.”

“그럴 순 없죠. 염치없이 공짜로 얻어먹는 건…….”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다 순간 멈칫.

안에 들어 있는 것은, 1달러 두 장뿐.

“……미안해요. 지금 현금이 없어서.”

“괜찮아. 아들한테 밥값 받는 엄마가 어디 있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와중에 지출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참 역겹구나.

“다녀와, 아들.”

출근하는 길에도 한숨은 멈추지 않았다.

솔직히 최근 재정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오늘만 해도 메리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아침 내내 굶고 점심도 컵라면으로 때워야 할 판이었다.

“후우.”

8월.

‘유진 연’이 된 지도 어느덧 반년 차.

“월급날이 언제더라…….”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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