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End of the Day (3)
점원은 잠시 말없이 나를 보았다.
그러다 이내, 나더러 저쪽을 한번 보라는 듯 창밖을 향하여 눈짓을 날렸다.
“퇴근하려면 오래 걸려.”
나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갓길에 주차된 바이크와, 지금 막 거기서 내린 헬멧 쓴 바이커가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얘기는 저쪽이랑 하도록 해.”
바이커는 이쪽을 돌아보더니 헬멧을 슥 벗었다.
그러자 드러난 얼굴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점원의 얼굴과 완전히 똑 닮아 있었다.
“주문은 취소해 드릴게요, 손님~.”
점원은 다시 활짝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창밖의 여자는 그녀와 다르게 무표정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갔다.
보이쉬한 인상의 남색 머리, 가죽 재킷과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여자― 지나 드비토와 대면했다.
“안녕.”
그녀는 쿨하게 인사를 건넸다.
블랙 대거즈의 따봉맨, 아니, 따봉걸.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 나를 도와줬던 수수께끼의 바이커.
“네가 본체냐?”
내가 묻자, 그녀는 뜸 들임 없이 답했다.
“일단은.”
그러고는 물었다.
“언제 눈치챘어?”
나 역시 대답하는 데 뜸을 들이지 않았다.
“일전에 내가 자그말렉 피터스에게 죽을 뻔했을 때 너희들이 구해주러 왔었지.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헬멧 쓴 녀석들은 키랑 체형이 다 똑같더라고. 마치 그 많은 인간들이 전부 동일 인물인 것처럼.”
내가 그렇게 느낀 건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동일 인물이었던 것이다.
“<분신을 만드는 능력>. 대충 그런 거지?”
블랙 대거즈는 소규모 단체가 아니다.
게임에서도 하급 단원들이 여럿 등장한다.
다만 이상한 점은, 블랙 대거즈의 모든 하급 단원 몹들의 레벨이 35로 고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통상 같은 이름의 몹이라 해도 개체별로 1~2 정도의 레벨 차이가 나는 것이 일반적인데 말이다.
<사이버판타지>의 설정집을 뒤져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그동안은 그냥 똥겜 특유의 줏대 없는 시스템의 일부라 생각했지만, 해답은 따로 있었다.
“몇 명이나 있는 거지?”
“평소에는 300명 정도.”
“예상보다는 적은 숫자군.”
“그 미친 트롤이랑 싸우다 많이 죽어 버려서. 그때 먹은 손해가 좀 막심했지. 한창 복구 중이야.”
지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서, 중요한 얘기란 게 뭔데?”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은 듯했다.
물론 나로서도 시간을 지체하고픈 맘은 없었다.
“토마가 죽었어.”
“알아.”
“차기 보스 후보는 누구지?”
“글쎄, 잘 모르겠네. 레오노프에 토마까지 죽어 버렸으니, 이제 남은 인원이라곤 나랑 인형술사 꼬마, 그리고 맨날 도망치는 겁쟁이밖에 없으니까.”
지나는 의미심장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누군가 보스가 되어야 한다면, 그건 아마 당신이겠지.”
나는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기 때문에.
“토마의 전언이다.”
입을 열고,
똑똑히 말했다.
“차기 보스는 암귀. 블랙 대거즈는 현 시점 부로 그의 수하 조직, <헬터 스켈터>에 편입한다.”
그래, 나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아 일상을 지켰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죽음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끝까지 몸부림칠 것이다.
“할 일이 좀 많아. 당장 시작할 것도 있고.”
“그래? 뭐부터 하면 되는데?”
“우선은.”
언제까지고. 영원히―.
“집 가서 좀 쉬자.”
***
이스트포레스트 1구역.
시민공원 <에버그린 파크>.
서쪽 입구로 들어가 분수대와 저수지를 지나 산책로 안쪽 깊은 곳에 다다르면 벚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의 벤치에는, 하얀 장발을 가진 중년의 다크엘프와 내가 나란히 앉아 있다.
“오늘은 날씨가 좀 별로네요.”
“그렇군.”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도시의 마천루처럼 칙칙한 회색을 띠었다. 곧 있으면 비가 올 것 같았다.
“비행기 시간이 몇 시라 하셨죠?”
“15시 40분.”
“한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공항에 빨리 가보셔야 하지 않나요?”
“지금 가봐야 기자들이랑 씨름할 시간만 늘어날 뿐일세. 그리고 VIP가 요청하면 항공사에서 30분 정도는 이륙을 지연시켜주니 조금 늦어도 괜찮아.”
“돈이란 게 좋긴 좋군요.”
“말해 뭐 하겠나. 돈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지. 그저 어떻게든 돈을 버는 것에 그동안 내 인생을 바쳐 왔는데…… 부질없는 일이 돼 버렸군.”
렘브란트는 궂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기 피부색과 비슷한 먹구름을 보며, 우수에 젖은 듯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회사를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네.”
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암흑가와 연루됐다는 스캔들이 터진 이후.
윌슨앤코 그룹은 그간 숨겨 왔던 어두운 속사정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되면서 결국 나락에 떨어졌다.
주가 폭락. 임원진 구속. 신용 등급 절하.
몰락의 결정타가 된 것은 금융당국에서 부과한 벌금 80억 달러였다. 벌금을 지불하기 위해 현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윌슨앤코 인터내셔널을 필두로 한 자회사와 계열사들을 대부분 회사째로 매각, 그렇게 그룹은 자연스럽게 와해되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게 하나 있다면,
지주회사 윌슨앤코는 살아남았다는 점.
“렘브란트 씨는 대만으로 가신다고 했죠?”
“그래. 옛날에 거기서 주재원을 했거든. 모아둔 돈이 많지는 않지만, 작은 회사 하나 차릴 돈은 있어서 말이지. 해운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일궈 볼까 해.”
합병 이후, 렘브란트는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요리조리 잘 피해 왔던지라 법적인 책임에서만큼은 자유로웠지만, 대신 윌슨앤코에 기생하던 갱단들에게 찍혀 버려, 계속 시에라시티에서 살아가는 것은 역시나 무리였다.
“자네도 짤렸다면 데려갔을 텐데, 아쉽군.”
“전과자라서 입국도 못 할걸요, 저.”
“그런가?”
중년의 다크엘프는 끌끌거리며 웃었다.
결국 비는 오지 않았다. 단지 흐릴 뿐이었다.
***
웨스트록 8구역.
베델스톤 빌딩 4층.
끼기기익―.
낡은 나무 문이 비명을 질렀다.
문고리를 돌리자 드러난 안쪽의 풍경은, 조금 많이 지저분했다.
“자아, 여러분. 여기가 저희 새 사무실입니다.”
나는 애써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지만, 모두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다들 하나같이 썩어 있었다.
청소한 지 몇십 년은 지난 것 같은 바닥.
대놓고 보이는 거미줄과 바퀴벌레 똥 자국.
에어컨조차 없어 후덥지근하게 달궈진 열기.
“여기 맞아요, 팀장님……?”
“내 아들내미 방보다도 더럽구만.”
「(⊙_⊙;)」
“와, 미친. 진짜 이건 좀 아닌 듯.”
스몰필드 씨도, 사장님도, 타이퍼도, 비너스도, 물론 나도, 눈앞에 주어진 이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현실인 것을.
“전에 설명했다시피, 벌금이랑 매출 손실 때문에 회사 건물이고 뭐고 일단 다 팔아넘겨야 했어 가지고, 부득이하게 사무실을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괜찮은 데는 없었던 거예요……?”
“미안해요, 스몰필드 씨. 급하게 옮기느라 월세랑 보증금을 맞출 수 있는 곳이 여기뿐이었어요.”
“유진 군. 아무리 그래도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 비슷한 가격대에 몇 군데인가 더 있었잖나!”
“하지만 무조건 여기로 하라고 사장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자기 집이랑 제일 가깝다고요.”
「실내 온도와 습도가 기준치 이상으로 높습니다. 이곳은 안드로이드에게 매우 나쁜 환경입니다.」
“좀만 참아. 나중에 꼭 에어컨 달아 줄게.”
“저 퇴사할게요. 안녕히 계세여.”
“가긴 가 어딜 가, 뒤질라고.”
반응이 나쁜 것은 당연지사였다.
으리으리하고 삐까뻔쩍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봐줄 만했던 멀쩡한 사무실이, 이렇게 다 쓰러져 가는 5층짜리 빌딩의 냄새 나는 골방으로 바뀌어 버렸으니.
그래도 뭐,
마냥 나쁘기만 한 건 또 아니다.
“아참, 건물 주인 분한테 들었는데, 여기 근처 골목에 은근히 가성비 좋은 맛집이 많이 있대요.”
“……그, 그래요?”
“안쪽 구석에 작은 창고가 하나 있던데, 거기에 책상 갖다 놓으면 사장실로 쓸 수 있을 겁니다.”
“……으흠. 개인 공간은 중요하지.”
“그리고 봐봐. 콘센트도 전에 있던 사무실보다 많이 달렸잖아. 충전할 때 아무 데서나 해도 돼.”
「……콘센트는 하나면 충분합니다.」
“참고로 여기 후미진 위치라 차 막히는 일도 거의 없고, 건물 뒤쪽에는 전용 주차장도 있어요. 그러고 보니 자가용 있었죠, 헬렌? 출퇴근 편해지겠네!”
“……그저께 폐차했는데요. 엔진 터져서.”
나는 사무실을 슥 돌아보며 웃었다.
이번만큼은 억지로 웃는 게 아니었다.
“일단 그럼, 청소부터 할까요.”
일상은 다시 시작된다.
조금 달라진 풍경에서.
***
비행기 안.
“저기, 죄송한데요.”
창가 쪽 좌석에 앉은 한 남자에게 옆옆 자리의 여성이 말을 걸었다. 남자는 살며시 눈을 떴다.
“무슨 일이시죠?”
“그게, 저희 애가 창가에 앉고 싶어 해서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바꿔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남자는 문득 옆자리에 앉은 꼬마를 보았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5살 남짓의 여자아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길 보고 있었다.
“창가 쪽에 앉고 싶니?”
“네!”
“후후, 그렇구나. 아저씨가 자리를 바꿔 줄 수 있단다. 원한다면 여기에 앉도록 하렴.”
“와아, 고맙습니다!”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겠니?”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요?”
“그냥. 우리 꼬마 아가씨가 창가 쪽에 앉았다가, 혹시라도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
아이를 쳐다보며, 남자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만약에 이 비행기가 사고로 추락하면 폭발해서 엄청 큰불이 나겠지? 그러면 우리 몸은 흔적도 남지 않고 바짝 타 버리는데, 지정된 좌석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나중에 신원 확인이 어려울 수가 있어. 아저씨가 너 대신 너희 엄마랑 같은 무덤에 묻히는 건 싫잖아?”
“…….”
“그리고 그거 알고 있니? 비행기 창문이 떨어지거나 깨져서 구멍이 생겨 버리면, 기압 차 때문에 창가 쪽에 앉은 사람이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단다. 너는 몸이 작아서 상반신이 쏙 들어가서 끼어 버릴 텐데, 비행기 밖은 영하 50도나 되니까 얼굴이 금세 꽝꽝 얼어버릴걸.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걱정하진 말렴. 네가 몸으로 구멍을 막아준 덕분에 나머지 승객들은 모두 무사할 수 있을 거야!”
아이와 엄마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자리, 바꿔 줄까?”
모녀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자는 미소를 유지한 채로 자리에서 슥 일어났다.
“아, 아저씨? 나 거기 안 앉을 건데…….”
“응. 나도 안 앉을 거야.”
그는 이코노미석의 좁은 좌석 틈을 지나쳐 복도로 향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실례합니다. 혹시 지금 비즈니스석이나 퍼스트 클래스로 좌석을 옮길 수 있을까요?”
“예? 아, 빈자리가 있어서 가능은 한데요. 도착까지 세 시간도 안 남았는데, 지금 업그레이드하시면 비용이…….”
“괜찮습니다. 상관없으니 옮겨 주세요.”
“아, 예. 승객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승무원이 물었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유클리드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