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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96화 (96/201)

96화. The Masterplan (4)

그렇게 우리는 잠시 가게 밖으로 나왔다.

“크으, 알딸딸하구만.”

하인즈 사장은 꽤나 취기가 오른 듯,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몸의 축이 약간씩 흔들렸다.

“거참, 오랜만에 마신 거래도 겨우 맥주 몇 잔 부었다고 이래 되다니. 내가 늙기는 했나 봄세.”

“너무 빨리 드셔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런가? 하긴, 오늘은 신입 템포에 끌려다닌 느낌이 없잖아 있군. 헬렌 양이 술을 참 잘 마시더만. 원샷이 그냥 기본이던데? 여튼 굉장한 술꾼이야.”

나는 사장의 말을 조용히 웃어넘겼다.

실은 비너스가 오늘 회식에 참여한 이유는 순전히 공짜 맥주를 위해서였다. 술고래인 녀석과 먹성 좋은 스몰필드 씨의 조합이라면 법카 한도가 아슬아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굳이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담배 피웠던가?”

“가끔이요. 기분 나쁠 때만 한 대씩 피웁니다.”

“나랑은 반대군. 난 기분 좋을 때만 피우걸랑.”

하인즈 사장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한 대 피우겠나? 멘솔인데.”

“주신다면야 기쁘게 받겠습니다.”

“됐어. 그냥 한 소리야. 지금은 피우지 말게.”

그는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휘저었다.

“오늘 자네는 기분이 좋아 보이니까.”

그렇게 말한 뒤, 혼자서만 연초를 태웠다.

항상 그랬듯이 웨스트록의 밤은 낮보다도 눈부셨다. 수많은 네온사인과 할로겐 조명 사이에서, 사장의 담뱃불 또한 그 눈부심에 자그마한 보탬이 되었다.

“처음 회식했던 날, 기억하나?”

불현듯 하인즈 사장이 질문을 던졌다.

물론 나로서는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내가 ‘유진 연’의 몸에 빙의하기 한참 전의 일이었을 테니.

“그때의 자네는 기분이 많이 나빠 보였었지. 회식 자리가 불편했다기보단, 그냥 언제가 됐든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고 다녔어. 솔직히 말하자면, 옛날의 자네는 뭐랄까…… 개자식 같았지.”

“죄송합니다. 그땐 개인적으로 좀 힘든 일이 있었던 시기라…….”

“알고 있네. 그래도 내 주변에 빵 다녀온 사람들 중에 자네만큼 정상적으로 살고 있는 인간은 한 명도 없어. 정말 대단한 거야, 그건. 다들 어푸어푸 허우적거리다 가라앉아 버리곤 하잖나.”

하인즈 사장은 잠깐 조용해졌다가, 이어서 다시 말을 꺼냈다.

“부사장님께 얘기는 전해 들었네.”

그가 말한 ‘부사장’이란 윌슨앤코 인터내셔널의 VP, 존 렘브란트 버미어를 가리켰다.

“당분간 경찰들이 사무실에 들락날락할 거라 하더군. 이번에 꽤 큼직한 일을 저질렀다면서 말이야.”

“그렇군요.”

“자네도 물론 거기에 한몫했겠지.”

그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말했다.

나와 렘브란트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대략적인 현황은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나중에 혹시나 회사가 잘못된다고 해도, 난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걸세.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흩날리는 담배 연기처럼 초연한 태도였다.

나 역시 그의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 몇 달 알고 지낸 상사와 부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괜찮을 겁니다.”

그럼에도 서로 이해하는 척쯤은 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라도.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어른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파핫. 그래, 아마 괜찮겠지.”

하인즈 사장은 내 말에 피식 웃고는 가게 밖에 마련된 재떨이에 담뱃불을 비벼 껐다.

“내가 평소에 표현은 잘 안 하지만 말이야, 유진 군. 난 자네란 인간을 아주 높이 사고 있어.”

“하하, 빈말이라도 감사드립니다.”

“진짜라니까? 우리 딸내미가 조금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자넬 사윗감 후보에 넣어 뒀을 거야.”

“따님이 작년에 초등학교 입학했다고 하셨죠.”

“꼰대 같은 참견인 건 알지만, 자네도 슬슬 짝을 찾아야지 않겠나. 애인은 있고?”

“아뇨. 지금은 없습니다.”

“호오, 그렇구만? 무어, 한번 가까운 주변에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게야. 암, 그렇고말고!”

그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 혹시 자네가 그쪽 취향이라면 내가 실수로 들어갔던 게이 만남 주선 사이트를 알려주겠네. 다만 그 몇 번의 실수는 굉장히 유용했어. 나는 그냥 작품성 있는 게이 포르노를 좋아할 뿐이란 것을 알았으니까. 게이가 아닌 자네에게 충고를 하자면, 왼쪽 귓불에 바나나 모양 피어싱을 한 남자의 집에는 절대로 따라가지 말게. 절대로…….”

술기운에 젖어 저 혼자 신명나게 떠들어 대는 하인즈 사장과 함께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팀장네엠!”

룸에 돌아오자, 스몰필드 씨가 우리를 반겼다.

“아, 왜케 늦게 와여어! 고기 다 탔자나!”

어쩐지 벌겋게 상기된 얼굴. 가만 보니, 그녀 앞에 놓인 맥주잔의 내용물이 반쯤 비어 있었다.

“……스몰필드 씨? 맥주 드셨어요?”

“왜여. 저는 술 머그면 안 대여? 느ㅖ?”

라면 면발처럼 꼬부랑거리는 목소리. 맥주 몇 모금에 취하는 사람이 진짜로 있구나.

“사장넴이랑 둘이 먼 얘기 햇서여?”

“그냥 잡담만 했는데요…….”

“이씨, 자기들끼리만. 나랑두 얘기해여!”

“어, 그럴까요…….”

“조아, 빨랑 옆에 앉아! 팀장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똒바로 잘 들으어라거!”

거하게 취한 스몰필드 씨가 마구 꼬장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타이퍼는 절전 모드로 들어가 있어 내내 조용했고, 사장님과 비너스는 서로 본격적으로 술판을 벌였다. 결국 스몰필드 씨의 주정을 받아주는 것은 온전히 나만의 몫이었다.

“캬하아. 맥쭈 마시따아.”

“저기, 술은 이제 그만 드시면 안 될까요?”

“무여? 팀장넴이 먼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예여? 팀장넴이 내 엄마야? 어! 당신이 내 엄마냐구으!”

“스몰필드 씨, 일단 진정 좀…….”

“아, 진짜아! 저기여! 신입은 맨날 이름으로 불르면서, 왜 나는 계속 성으로 불러여? 나도 이름 있거든여! 팀장넴 내 이름 먼지는 알아여? 몰르져?”

“알아요, 리타. 그러니까 진정 좀 하세요.”

“에헤헷! 그랭, 유진아!”

“…….”

“하아암. 나 졸리니까 잠깐 잘게.”

스몰필드 씨는 방석을 베개 삼아 눕더니 그대로 쿨쿨 곯아떨어졌다.

그즈음 하인즈 사장과 비너스가 저들끼리 무언가 쏙닥거리더니,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흐흠, 리타 양이 많이 취했나 보구만?”

“어우 그러게요. 2차는 못 데려가겠어요―.”

“술에 저리 떡이 돼서야 집에 혼자 돌려보내기도 겁나지. 요즘같이 흉흉한 세상에는 더더욱.”

하인즈 사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런고로, 유진 군! 리타 양을 부탁하겠네!”

“예……?”

“우린 지금 바로 2차를 가야 해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자네가 그녀를 좀 돌봐주도록 하게나.”

“아니, 잠시만요. 사장님……?”

“계산은 하고 가지. 그럼 수고하게!”

“수고하세용!”

사장과 비너스는 그렇게 훌렁 가게를 떠났다.

“…….”

룸에는 이제 나와 인사불성이 된 스몰필드 씨, 그리고 절전 모드의 타이퍼만이 남아 있었다.

“스몰필드 씨. 스몰필드 씨?”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술이 다 깰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그게 언제가 될지 기약도 없는 데다, 가게에도 상당한 민폐였다.

그렇다면…….

데리고 나갈 수밖에 없나.

“야, 타이퍼.”

「삐빅.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미안한데, 보다시피 스몰필드 씨 상태가 메롱이라. 너 혼자 회사까지 돌아갈 수 있겠냐?”

「회사까지 거리는 약 837미터이므로 현재 배터리 잔여량으로 충분히 복귀 가능합니다.」

“다행이네. 그럼 일단 너 먼저 들어가.”

「참고로 현재 더블 침대와 피임 기구 제공이 포함된 근처 숙박업소가 예약 가능 상태입니다.」

“됐고. 밖에서 택시나 좀 잡아줘.”

「알겠습니다.」

나는 술에 뻗은 스몰필드 씨를 등에 업고서 가게를 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어디까지 가심까, 손님?”

택시 기사가 물었다. 스몰필드 씨의 거주지 주소는 아까 전 타이퍼가 사무실 컴퓨터에 연결하여 사원 정보 파일을 확인해 알아낼 수 있었다.

“6구역 잭슨 빌리지 아파트 3단지요.”

“웨스트록 6구역이요?”

“맞습니다.”

“스읍, 거긴 안 되겠는데요.”

“예? 왜죠?”

“그쪽 일대 도로가 지금 완전히 통제 중이에요. 지하에 무슨 마나 원자로 케이블인가 뭐시기가 터져가지고, 그거 복구하느라 못 지나간다든디요.”

아무래도 스몰필드 씨 집 주변에서 사고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러면…….”

망설여지기는 했다만,

선택지는 이것뿐이었다.

“7구역 에덴파크 모텔로 가주세요.”

***

“잘 들어. 중요한 건 ‘둘이서만’ 있는 거야.”

리타 스몰필드는 룸메이트 폴리 보일 a.k.a. 시에라시티 연애 마스터가 해준 조언들을 떠올렸다.

“저번 데이트는 별 소득 없이 끝났지. 왜겠어? 둘만 있는 상황을 못 만들었으니까 그런 거야.”

“야밤에, 좁은 공간서, 단둘이, 그렇게 끈적끈적하고 야리꾸리한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정 안 되겠으면 취한 척이라도 해봐. 암만 젠틀한 남자라도 바로 그냥 모텔로 끌고 갈 거니까.”

하필이면 회식 도중에 그게 떠올라 버렸다.

폴리 보일 가라사대, 행동하는 여자에게 복이 있을지니, 기회가 왔으면 그것을 놓치지 말라.

리타 스몰필드는 태어나서 한 번도 술을 제대로 마셔 본 적이 없었다. 냄새만 맡아도 헤롱거리기 일쑤라,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기회를 잡고자 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맥주잔을 들이켰다.

문제는, 취한 척을 하며 은근슬쩍 상황을 만들어가 볼 셈이었으나…… 진짜로 취해 버렸다는 점.

다만 빨리 취한 만큼 빨리 깨긴 했다.

유진의 등에 업히고 나서 택시 뒷자리에 태워질 때 즈음엔, 아주 살짝 정신이 들어 있었다.

“7구역 에덴파크 모텔로 가주세요.”

그걸 들은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

‘뭐야?! 뭐야?! 뭐야?!’

‘모텔이라고 한 거야?!’

부릉―.

택시는 달렸다. 그동안 리타 스몰필드는 자기가 들은 게 맞는지 수도 없이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30분 후.

택시가 멈춰 섰다.

<에덴파크 모텔>

리타 스몰필드는 슬쩍 실눈을 떠서 창밖의 건물과, 입구 맡에 놓인 거대한 간판을 확인했다.

‘진짜로 모텔……!?’

유진이 그녀를 업고 택시에서 내렸다.

리타 스몰필드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숨기고자 열심히 코를 고는 척했다.

‘으아아, 아직 마음의 준비가아……!’

유진은 계단을 올라 208호 앞에 섰다.

열쇠를 문고리에 꽂고 돌려 문을 열었다.

끼익―.

방안에 들어왔다. 리타 스몰필드를 침대에 가지런히 눕혔다. 리타 스몰필드는 거의 죽은 척에 가까운 자는 척을 이어갔다.

….

….

유진은 그대로 다시 일어나,

혼자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그는 복도에 우뚝 섰다.

방문 앞에 놓여 있던 물건을 집어 들었다.

“…….”

그것은 곰 인형이었다.

군데군데 묻은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인형의 등짝에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살려줘

거기 적혀 있던 것은,

세 글자의 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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