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95화 (95/201)

95화. The Masterplan (3)

불편한 고요가 흘렀다.

한태경은 저 수수께끼의 불한당이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날 죽이기 싫어……?”

가면을 쓴 남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전투인원까지 죽이고 싶지는 않아.”

“허, 내가 누군지 아는 것처럼 말하시네?”

“모를 거라 생각하나?”

단지 이유 없이 베푼 관용이 아니었다.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경찰국 본부 지원2팀 한태경 경장.”

움찔―.

한태경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기에.

“무전 채널 주파수를 훔쳐서 듣고 있었나 보군.”

“…….”

“작전 계획도 미리 알고 빼돌렸겠지. 데이터센터 서버를 해킹해서 자유의 몸이 되고 싶었나 보지?”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속으로 생각했다.

‘뭐라는 거야.’

하나도 맞는 말이 없었다.

유진이 한태경을 알고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유진의 사회 복귀 프로그램 담당자였기 때문.

헬멧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지만 목소리를 듣고서 바로 그녀란 걸 알아챘다.

무전을 훔쳐 들었다거나 작전 계획을 빼돌렸다거나 그런 일은 전혀 있지도 않았다.

데이터센터를 습격한 이유 역시 한태경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지금 유진의 수하에는 정부 서버를 손쉽게 해킹할 정도의 능력자가 없었다.

목적은 ‘1급 관리자용 키 카드’를 입수하는 것.

그것은 <사이버판타지> 중반부를 수월하게 플레이하기 위한 중요 아이템 중 하나인데, 경찰국 데이터센터 던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조차도 당장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고,

나중을 위해 겸사겸사 챙긴 것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우린 네놈들 손에 놀아난 거야. 경찰을 가지고 놀다니, 가증스러운 악당들 같으니.”

보안이 약해진 틈을 타 조용히 잠깐 들렀다 갈 심산이었는데, 어째 심각한 오해를 받고 있었다.

“본부 들립니까. 여기는 한태경.”

「듣고 있다.」

“현재 암귀 코스프레 2인과 조우. 도주할 우려가 있으며 중범죄 사실이 명백함. 그니깐 파워 레벨 2 이상의 마법 사용 좀 제발 허가해주길 바란다.”

「작전 지역 외에서의 긴급 요청에 대해서는 허가할 수 없다. 오버.」

“아효, 개시발럼들.”

한태경은 헬멧을 벗고는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러고서 찬찬히 저울질을 해보았다.

“…….”

여기서 둘 다 놓치는 게 나을까. 아니면 확 그냥 화끈하게 저질러 버리고 징계 먹는 게 나을까.

“아, 몰라.”

말할 것도 없이,

후자 쪽이 나았다.

“너네 다 뒤졌어.”

파직, 파지직―!

한태경의 몸 주위에,

붉은 가시가 피어났다.

전격 마법의 기본 마나 형태.

번개의 형이라 불리는 ‘아카샤’.

“<뇌격>.”

콰르르르르릉―!!

한태경이 팔을 휘두르자, 날카롭게 뭉쳐진 마나의 끝에서 집채만 한 번개가 솟구치며 내리꽂혔다.

내려친 붉은 번개는 그녀의 적들이 서 있던 대지를 통째로 박살 냈다. 그 진동과 충격이 어찌나 거셌던지, 주변 건물들이 순간 휘청거릴 정도였다.

시뻘겋게 이글거리는 불길 사이로 그림자가 드러났다. 아스팔트 지면에 큼지막하게 박힌 탄 자국 한가운데서, 적들은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쿨럭, 쿨럭……!”

백인 남자는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는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가면을 쓴 남자 쪽은 비교적 무사한 편이었지만, 공격에 제때 반응을 못 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괜찮냐, 애런?”

“살아는 있습니다…….”

공격에 앞서 미리 전 방위에 <마나 배리어>를 펼쳐둔 덕분에 살았다. <신체 강화>만으로 버텨보려 했더라면 꼼짝없이 전기구이 신세가 될 뻔했다.

‘그나저나, 이 정도 파괴력이라니…….’

예상을 한참 넘어서는 위력이었다.

최대한 마력을 두껍게 쌓았음에도, <마나 배리어>의 방벽은 상대의 마법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마나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포스 디펜더>라면 혼자 버티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옆에 있는 애런을 지키면서 싸우긴 어렵다.

‘곧 지원이 올 거다. 시간을 끌면 위험해.’

이번 계획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속전속결.

빠르게 치고 빠지면서, 가능한 한 최소한의 피해로 일을 끝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부름>을 쓸 수밖에 없어.’

마법사를 상대로 <부름>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이전에 멜리에스와의 전투에서 뼈저리게 느꼈던 바가 있다.

악마의 벌레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

그것은 바로 ‘마력’이다. 녀석들은 그걸 먹게 될 때마다 기뻐서 날뛴다. 미칠 듯한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는 자신까지 먹어 치우려 덤벼든다.

……제어할 수 있을까?

……만약 하지 못한다면?

불길한 상상이 가득 들어찼다.

하지만 망상이라 믿어야만 했다.

당연히 그것은 도박이었다.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챙기는.

알지 못하는 미래가 다가올수록,

불안감은 점차 커져만 갔음에도.

“카인 나호르.”

그는 언제나 그 이름을 불렀다.

부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기에―.

***

콰릉, 콰르릉, 콰르르르르릉―!!

웬만한 마법사들의 일격필살급 위력을 가진 무시무시한 파괴 마법이 세 번 연속으로 가해졌다.

전심전력으로 날린 <뇌격>의 3연타.

한태경은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단순 위력만 본다면 가이우스급에 필적하는 자신의 풀파워 <뇌격>을 3타씩이나 맞고 무사할 인간은 없었다.

하지만,

놈은 멀쩡했다.

“……어……?”

상처 하나 없는 대신에,

어떤 기이한 것이 있었다.

놈의 손끝에서 자라난 보라색의 군체.

부글부글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무언가.

그것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야금야금 집어삼키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날린 <뇌격>의 마나마저도.

뒷목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마치 광인이 썩은 시체를 뜯어먹는 장면을 보는 것처럼 구역질이 났다.

그리고 그때쯤.

한태경은 떠올렸다.

‘……보라색……?’

자색 마력을 가진 흑마법사.

악마의 힘을 부리는 살인귀.

그는 자기 손에서 뻗어 나온 흉측한 벌레 떼를 어떻게든 도로 집어넣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허나 벌레들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거대하게 몸집을 불린 그것은 이미 자아를 가진 하나의 괴생명체나 다름없었다.

그그극―!

키게가가각―!

자색 군체는 더 많은 식사를 원했다. 녀석들은 이리저리 날뛰며 주인이 움직이도록 부추겼다.

“아.”

한태경은 어렴풋이, 본인이 그 끔찍한 벌레들의 먹잇감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방금 먹었던 그녀의 마법이 끝내주게 맛있었던 모양이다. 과즙이 달콤했으니, 과육 또한 그렇겠지.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맞서 싸워?

쉽사리 선택할 수 없었다.

용기와 공포 사이에서, 수도 없이 망설여졌다.

그리고 그즈음.

유진이 입을 열었다.

“가.”

….

….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

“가라고!”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강한 충격 덕인지, 판단력이 돌아왔다.

한태경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뒤로 돌아 달렸다. 멈추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한없이 달려, 그 자리에서 멀찌감치 벗어났다.

“헉, 헉…….”

뛰고 또 뛰었다. 그러다 겨우 멈췄다. 아무도 없는 공허한 거리에 다다라, 가쁘게 숨을 골랐다.

지직―.

그때 무전이 들려왔다.

「한태경이.」

「어이. 살아있냐.」

아서 깁슨이었다.

한태경은 숨을 마저 고르고 난 뒤에 무전기를 들어, 자신이 무사함을 경위에게 알렸다.

“저, 봤어요…….”

「뭐? 누굴?」

“카이트. 진짜로, 카이트였어요…….”

불안하게 목소리를 떠는 한태경.

아서 깁슨은 한숨을 쉬고서 말했다.

「방금 우드게이트에서 확보한 증거물들을 이송하던 트럭이 습격당해 화물이 전부 사라졌다.」

“네……?”

「오늘 작전으로 경찰 병력들을 몽땅 다 투입해서 놈들의 원수 척결과 증거 인멸을 도와준 셈이 됐지. 렘브란트가 우릴 완전히 가지고 놀았어.」

“…….”

「데이터센터는? 못 막은 거냐?」

“죄송합니다…….”

「후우, 됐어. 이제 철수한다.」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의 탄식뿐이었다.

「좆같은 날이구만, 아주.」

***

목요일 저녁.

회사 앞 식당가의 한국식 고깃집.

“자자, 다들 편한 자리에 앉게나!”

오늘은 윌슨앤코에 신입 사원이 들어온 기념으로 퇴근 후에 이렇게 모여 회식을 하게 되었다.

사장님, 스몰필드 씨, 비너스, 타이퍼까지. 회사 사람 전원이 한자리에 모인 유례없는 날이었다.

“다들 맥주 한 잔씩은 괜찮지?”

“앗, 죄송한데, 제가 술을 잘 못 마셔서요…….”

“그런가? 무어, 안 마셔도 상관없으니까 리타 양 몫도 일단 시켜는 두겠네. 혼자서만 잔이 비어 있으면 섭섭하잖나. 헬렌 양은 어떻게, 술 좀 먹을 줄 아나?”

“에이, 먹을 줄 몰라도 우리 싸장님이랑은 당연히 한잔 걸쳐야죵!”

“오, 사회생활을 아주 잘하는군! 나도 사실 상사한테 아양 떠는 거 하나만으로 이 자리까지 왔지!”

사장님은 타이퍼 몫까지 다섯 잔의 맥주를 주문했다. 고기도 비싼 부위 위주로 잔뜩 시켰다.

“자아, 그러엄, 모두 잔 번쩍 들고…… 우리 사무실의 평안과 안녕과, 평화를 위해! 건배애!”

우리는 건배부터 외쳤다.

목소리가 제일 컸던 사람은 물론 하인즈 사장이었으며, 나머지 목소리를 다 합쳐도 그보다 작았다.

“아고, 참. 요즘 애들은 ‘건배’ 대신 ‘짠’이라고 한다던데. 이거 노땅처럼 보였겠구만. 파하핫!”

「주인님. 여기 젓가락 받으십시오.」

“어, 땡큐. 타이퍼.”

“고기는 제가 구울까요?”

“리타 양, 고기란 자고로 제일 나이 많은 어른이 굽는 걸세.”

“(그럼 우리 비너스 할머니가 구워야겠는데?).”

“(조용히 하세요, 제발…….).”

곧 불판 위에 고기가 올려졌다.

하인즈 사장은 소고기 부위별로 맛있게 굽는 법에 대해 일장 강의를 하며 고기를 구웠고, 비너스는 사장님의 얘기를 열심히 듣는 척 맞장구를 치면서 잘 구워진 고기를 은근슬쩍 모두 자기 입에 가져다 넣었다.

스몰필드 씨는 소중히 맡아 둔 고기를 비너스의 젓가락질에 빼앗길 때마다 분노의 시선을 날려댔으며, 타이퍼는 불판에서 흘러나온 기름을 나중에 바이오 연료로 재사용하기 위해 차곡차곡 모았다.

나는 생맥주를 가볍게 홀짝이며 회식 자리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겼다.

걱정도 불안도 없는,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오늘은 <사이버판타지> 메인 스토리의 시작일. 원래대로라면 윌슨앤코 그룹이 붕괴하는 날.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3개월의 노고가 비로소 결실을 맺었다.

윌슨앤코는 무사하다. 사무실 사람들이 전원 실종되지 않았다. 보다시피 모두 잘 살아 있다.

나는 살아남았다.

최악의 결말은― 피했다.

「주인님. 고기 안 드십니까?」

“먹고 있어, 인마. 왜? 너도 먹고 싶냐?”

「‘맛있다’란 문장에 대해 기능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나중에 업그레이드 시켜서 입이랑 소화기관 달아줄게. 그때 실컷 먹어라.”

「!!!(◉0◉)!!!」

「방금 주인님께서 하신 말씀을 메모리 디스크와 백업 데이터 클라우드에 영구 보존하였습니다.」

“약속했다는 말을 참 과하게 표현하는구나.”

타이퍼에게 약속을 한 순간.

어쩐지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맥주 한 잔을 비우고 나서, 한 잔을 더 시켰다. 오늘만큼은 조금 취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회식의 분위기가 진하게 무르익었을 즈음.

“유진 군.”

이제 막 500cc짜리 맥주를 넉 잔째 비운 하인즈 사장이, 살짝 취한 목소리로 넌지시 나를 불렀다.

“잠깐 담배 태우러 나갈 건데, 같이 안 가겠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