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91화 (91/201)

91화. Space Oddity (2)

“잘 들어. 일단 상대한테 ‘확신’을 줘야 해.”

리타 스몰필드는 ‘연애 마스터’라 자칭하는 동갑내기 룸메이트 폴리 보일이 해준 조언들을 떠올렸다.

“애들끼리의 연애에서는 소위 썸이라고 하는 프롤로그 단계가 중요시되지.”

“하지만 다 큰 어른들, 특히 사회인끼리는 그런 식으로 서로 간 보고 그러면 절대 안 돼.”

“아무렴 상장폐지가 다가오는데 그러고 있을 여유가 어디 있어?”

“우선은 ‘아, 이 사람이 나한테 관심이 있구나.’라는 걸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거야.”

계획의 첫 단추는 데이트 신청.

둘이서 같이 오붓하게 사적인 시간을 보내자는 제안만큼이나 호감을 어필하는 확실한 수단은 없었다.

“평소에도 밥은 자주 같이 먹는다며? 그럼 평소랑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야지.”

“평소랑 다른 분위기는 어떻게 연출하냐고? 그야 겉모습에서 80은 먹고 들어가지.”

“당연하지만 외모에 신경 쓰는 것도 상대방한테 확신을 주는 과정의 일부야.”

“‘어때? 나 오늘 쥰내 이쁘지? 너 보라고 꾸민 거야, 이 자식아!’라는 티를 팍팍 내야 돼.”

본판을 최대한 살리는 내추럴 메이크업.

헤어스타일은 대충 뒤로 묶은 떡진 머리가 아닌, 공들여 말리고 땋아서 만든 공주풍 반묶음 머리.

동글이안경 대신 낀 도수 있는 컬러렌즈.

큰맘 먹고 구입했던 매스티지 블라우스에.

캐주얼한 스쿨룩 느낌의 줄무늬 스커트까지.

그야말로 놀라운 변신.

겉모습의 준비는 완벽했다.

선거일인 관계로 오전 근무만 마치고 나면 바로 퇴근인 오늘은 다시는 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타이퍼는 회사에 남아 잡무를 처리할 예정이고, 인턴인 헬렌 스미스는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었기에, 손쉽게 단둘이 되는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팀장님, 회사 끝나고 시간 있으세요?’

‘실은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식당이 있는데, 혼자 가긴 뭐 한 곳이라…… 혹시 같이 안 가실래요?’

권유할 대사까지도 미리 생각해 두었다.

폴리 보일 가라사대, 그가 거절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 이렇게 예쁜 애가 대놓고 꼬시는데 안 넘어가면 그자는 틀림없이 고자 혹은 게이일지니.

결과적으로 함께 외출하는 것까진 성공했다.

다만―

‘……이게 맞나……?’

원초 계획과는 다르게도,

둘만의 데이트는 아니었다.

“오빠, 빨리 와! 파란불 끝나 버린다구!”

어쩐지 유진의 곁에는 다른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다. 경쟁자라 보기엔 너무 많이 어린 여자였다.

“아리엘. 사람들 많은 데서는 뛰어다니지 마.”

“지금 못 건너면 지하철 놓친단 말야! 빨―리이!”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소녀.

행동거지는 그보다도 훨씬 어려 보였다.

“죄송합니다, 스몰필드 씨. 모처럼 일찍 퇴근하는 날인데 이렇게 갑자기 끌고 나와서…….”

“앗, 아뇨! 제가 좋아서 따라 나온 건데요, 뭘!”

리타 스몰필드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좋아서 따라 나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막상 먼저 나서서 데이트를 권유하려고 보니 아무래도 말할 용기가 부족해 선뜻 입을 열지 못하던 찰나, 유진의 친척이라는 저 아이가 나타나 준 덕분에 자연스럽게 퇴근 후 일정에 동반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역시 데이트는 아니지 않나…….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사실 혼자 애 보는 건 자신이 없었거든요. 스몰필드 씨 덕에 살았네요.”

“…….”

“시간 많이 뺏진 않겠습니다. 이따가 투표도 해야 하니 저녁 전까진 해산할 수 있도록 할게요.”

“……네에.”

“일단 이스트포레스트 도착하면 점심 식사부터 해결하죠. 혹시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리타 스몰필드는 물론 알고 있었다.

데이트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

“…….”

데이트는 아니라지만.

기분 정돈 내도 되잖아.

“실은,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식당이…….”

“언니이! 오빠아! 빨리 오라니까 뭐하고 있어어! 나 진짜로 화낸다아!”

“이런, 지금은 좀 뛰어야겠는데요, 스몰필드 씨.”

“네? 아, 네엡!”

두 사람은 헐레벌떡 횡단보도로 달려 나갔다.

아무튼 그렇게 리타 스몰필드가 언짢은 마음을 다잡고 데이트 기분을 만끽하고자 결심했을 무렵.

‘죽겠네, 진짜.’

유진은 속으로 깊이 한탄을 내뱉고 있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괴물 트롤 자그말렉 피터스와의 사투. 그때 입은 데미지와 더불어 그동안 쌓인 피로가 심신에 오롯이 누적돼 있는 현재. 또 하나의 거대한 스트레스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이건 그냥 놀러 나온 게 아니야.’

천진난만한 소녀의 탈을 쓰고 있으나, 아리엘은 신원 미상의 AA급 수배자로 지정된 흉악 범죄자.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한낮의 대형 쇼핑몰에서 폭탄을 터뜨리려고 했던 미치광이 테러리스트다.

심지어 한때는 자신을 죽이려 했으며, 언제든 또다시 그럴 마음이 들어 실행에 옮길지도 모른다.

‘녀석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돼.’

블랙 대거즈는 분명 같은 편이지만, 그들이 통제 불가능한 악당들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유진은 언제 폭발해 버릴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가지고 거리로 나온 셈이나 다름없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라…….’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

그것만이 그의 절실한 바람이었다.

***

오후 12시 30분.

프렌치 레스토랑 <러프>.

“식당 분위기가 제법 괜찮네요.”

“그쵸? 친구한테 들었는데, 여기 셰프가 미쉐린 가이드에서 3스타 받았던 레스토랑 출신이래요.”

“미쉐린 가이드가 뭐야, 오빠?”

“가격이 비싸도 되는 밥집 리스트.”

“거기서 3스타를 받으면 뭐가 좋은데?”

“가격을 더 비싸게 해도 돼.”

세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살폈다.

레스토랑 메뉴판에 적혀 있는 음식들의 이름은 어쩐지 외국어 시험의 지문처럼 느껴졌다.

“파쿠킹한 오리 콩피에 사프란을 곁들인 오렌지 소스…… 파쿠킹이 뭐야, 언니?”

“으음, 파를 요리한 게 아닐까?”

“콩피는?”

“콩의 껍질이려나?”

“사프란은?”

“섬유유연제!”

“다 틀렸어요. 스몰필드 씨.”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식사는 맛있게 했다.

“얻어먹어서 죄송해요, 팀장님…….”

“아닙니다. 억지로 끌고 나온 거나 마찬가진데 밥값까지 받아 버리면 제가 나쁜 놈이죠.”

“오빠,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그래, 알았어. 가서 사 줄게.”

“앗, 잠깐만요! 아이스크림은 제 돈으로 살게요!”

“안 됩니다. 오늘 스몰필드 씨는 돈 쓰시면 안 돼요. 얻어먹기만 하세요. 이건 상사 명령입니다.”

“에, 그치만…….”

“저기, 오빠? 나 바닐라 맛이랑 초코 맛 둘 다 먹으면 안 돼?”

“맘대로 해. 배탈 나도 상관없으면.”

“히힛, 아싸―!”

“스몰필드 씨는 무슨 맛이 좋으세요?”

“…….”

“스몰필드 씨?”

“그으, 저도 두 개 먹어도 돼요……?”

“아. 예. 그러시죠.”

***

오후 1시 30분.

안드로이드 매장 <슐츠 스토어>.

“저어, 팀장님? 여긴……?”

“마침 근처길래 한번 와 봤어요. 저도 요즘 타이퍼 때문에 관심이 좀 있고, 뭣보다 스몰필드 씨가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아, 네에…….”

“혹시 별로인가요?”

“아니, 여기는 뭐랄까……. 그야 솔직히, 좋긴 좋죠. 데이트 코스로는 정석이기도 하고…….”

“예? 무슨 코스요?”

“아어아으아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그보다 오늘은 아리엘이랑 놀아 주기로 한 날이잖아요. 굳이 저한테 맞춰 주실 필요는 없는데, 왜……?”

“딱히 맞춰 준 건 아니고요. 그냥 아리엘도 스몰필드 씨도 이 시간을 즐겁게 보냈으면 해서요. 기왕 여럿이 이렇게 놀러 나온 건데, 누군가 희생하는 것보다는 다 같이 즐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자기는 맨날 희생만 하면서…….).”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처음엔 약간 불편한 기색의 리타 스몰필드였으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금세 주변에 널린 안드로이드에 눈이 돌아가 매장 구경 삼매경에 빠졌다.

그동안 유진은 아리엘을 돌봤다.

아리엘은 매장 안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이 장소가 그렇게까지 재미없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 여기 며칠 전에도 와 봤어.”

“그래?”

“응. 여기서 인형 놀이했어.”

“인형 놀이?”

“내 능력은 <인형 같은 걸 조종하는 능력>이잖아. 대충 사람 비슷하게 생긴 건 다 조종할 수 있거든. 그러니까 안드로이드도 조종할 수 있어.”

“잠깐, 설마……?”

“맞아. 이 매장 안에 있는 모든 안드로이드를 조종해서, 아주 무시무시한 짓을 저질렀지―.”

유진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지나가던 직원을 얼른 붙잡아 세웠다. 그러고는 혹시 최근에 매장에서 아주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직원이 말했다.

“뻐큐 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유진은 침묵했다. 뻐큐 사건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는 단박에 이해했기에,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아리엘. 그런 짓은 하면 안 돼.”

“폭탄 터뜨리는 것보단 낫지 않아?”

***

오후 3시.

시내의 한 프랜차이즈 카페.

“으으, 죄송해요.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려 가지고, 한 시간이나 넘게 있어 버려서…….”

“아녜요. 저희도 재밌게 구경했는걸요.”

스몰필드 씨는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고, 나는 그녀를 위로한 뒤에 카푸치노를 한 모금 홀짝였다.

“언니, 오빠, 다음엔 어디 갈까?”

아리엘은 빨대를 쪽 빨아 레모네이드를 마신 뒤 한쪽 손에 든 쿠키를 앙 물어 반으로 쪼갰다.

“으음…… 메이슨 타워는 어때? 오늘 날씨도 좋아서, 전망대 올라가서 보면 꽤 멋질 것 같은데.”

“와, 좋아! 나 거기 갈래!”

“팀장님은 메이슨 타워 가 보신 적 있으세요?”

“예에, DLC 막퀘 깨는 던전이라 자주…… 아, 아니, 아뇨. 저는 아직 한 번도 안 가 봤습니다.”

“저도요. 명색이 도시 상징인데 어쩐지 잘 안 찾게 되더라구요. 이번 기회에 가보면 되겠네요.”

나는 다음 행선지에 동의했다.

여기서 조금만 쉬다가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언니, 나도.”

두 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혼자 남은 나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후우.”

시간이 참 빠르게도 흘러갔다. 생각보다 별일이 없어서 그런가, 긴장이 풀려 급속도로 피곤해졌다.

피곤함과는 별개로, 이런 평화롭고 소모적인 일상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슥 감은 눈이 잘 떠지지 않아,

잠깐 눈 좀 붙일까 싶었던 찰나.

아무도 없었던 자리에서,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

익숙한 기시감이었다.

나는 지그시 눈을 떴다.

아무도 없었던 자리에,

그 녀석이 앉아 있었다.

복고풍 교복과 학생모.

검은 머리의 앳된 소년.

“안녕하세요, 유진 씨.”

블랙 대거즈의 보스― 토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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