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Space Oddity (1)
수요일 아침.
리타 스몰필드는 방금 우려낸 따끈한 드립 커피를 후릅 하고 홀짝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출근하기 싫다…….’
그러면서 이 세상 모든 직장인들이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에 반드시 하게 되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회사가 콱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라.’
다만 예전에 그녀가 으레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일하기 싫은 맘에서 나온 투정만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좀 더 센서티브하고, 델리케이트한, 프라이버시와도 연관돼 있었다.
‘…….’
그녀는 그저께 일을 떠올렸다.
월요일에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 헬렌 스미스라는 이름의 그 여자가 자기한테 했던 말들.
“괜찮겠어요?”
“너무 여유 부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러니까아, 그렇게 마냥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딴 년한테 확 뺏겨 버릴지도 모른다구요―?”
왜 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계속 맴돈다. 마치 그 말에 자기가 엄청난 충격을 받기라도 한 마냥.
리타 스몰필드가 무지막지하게 우울한 표정으로 잼 바른 식빵의 귀퉁이를 한입 베어 물었을 즈음.
“흐아암. 졸려엉.”
그녀의 룸메이트, 곱슬머리 폴리 보일이 민소매와 속옷 차림으로 방문을 열고 거실에 나왔다.
“일찍 일어났네, 폴리.”
“으으응, 지금 몇 시야아?”
“7시. 오늘은 오전 시프트인가 봐?”
“그렇지, 뭐. 마감 뛴 다음 날에 오픈 뛰는 거야말로 알바를 벗어난 자의 특권이지. 하여간 개 같은 점장 시끼. 시급은 꼴랑 50센트 더 주면서 진짜 오질라게도 부려 먹는다니까. 아으, 출근하기 싫다.”
“언제는 1년도 안 돼서 매니저 달았다고 좋아했으면서.”
“근데, 넌 왜 아침부터 표정이 죽상이야?”
뜨끔.
리타 스몰필드는 움찔했다.
“뭐, 뭐가……?”
“오랜만에 얼굴이 아주 제대로 썩었잖아. 뭔 일 있어?”
“벼, 별로? 아무 일도 없는데……?”
“회사에 무슨 일 있구나? 또 그 팀장인가 뭔가 하는 그 자식이야?”
“아, 아냐, 팀장님 때문이 아니고…… 아니, 그게, 사실 팀장님 때문이 맞기는 한데…….”
“이번엔 뭐라고 했길래? 네가 옛날에 했던 얘기들 생각하면 그놈 진짜 쓰레기 같은 새끼더만.”
“아, 글쎄 아니라니까! 것보다 팀장님 이제는 안 그래! 오히려 엄청 잘 챙겨 준다고! 근데 뭐랄까, 요즘 따라 뭔가 상황이라든지 분위기이라든지 그런 걸로 막 사람 헷갈리게 하고, 물론 고의로 그러는 건 아니겠지만, 왠지 미묘하게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내가 혼자 그냥 맘이 살짝 좀 그런 것뿐이지……. 아무튼, 팀장님 잘못은 아니야!”
잔뜩 흥분해서 말들을 쏟아낸 리타 스몰필드에게, 폴리 보일은 별생각 없이 한마디를 던졌다.
“너 그놈 좋아하냐?”
“#@%^$ㅇ닛!?”
갑자기 얼굴색이 RGB에서 R만 255를 찍을 정도로 빨갛게 달아오른 리타 스몰필드.
어떻게든 둘러댈 말을 찾으려다 도저히 안 됐던 모양인지, 그녀는 결국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티 나……?”
“어. 쥰내 많이 나.”
말 못 할 부끄러움에 더욱 숙여진 고개.
폴리 보일은 반대편 식탁 의자에 가서 앉아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이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우리 철의 여인 스몰필드 양께서 짝사랑을 다 하시고~.”
“…….”
“어디 스토리 좀 한번 자세하게 풀어 봐봐. 연애 마스터인 이 언니가 듣고 친히 조언을 해주마.”
평소 같았으면 그냥 무시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리타 스몰필드에게는 고뇌의 스트레스를 함께 나눌 누군가가 매우 간절했다.
결국,
그녀는 전부 털어놓았다.
“흐으음. 그렇단 말이지이.”
폴리 보일은 리타 스몰필드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것을 머릿속에서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즉, 상대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는 애매~ 한 상황인데, 회사에 새로 들어온 인턴이란 년이 뭔가 옆에서 묘~ 하게 견제 아닌 견제까지 놓는 중이고, 그래서 너는 앞으로 뭘 어찌해야 할지 전~ 혀 모르겠다― 이거구만.”
리타 스몰필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읍, 솔직히 말해줄까? 풋풋한 짝사랑 스토리? 어. 그거 좋아. 재밌어. 로맨틱해. 근데, 이게 시팔 무슨 하이틴 로코는 아니잖아. 뭔 말인지 알겠어?”
“……?”
“현실 연애는 다르다고요. 게다가 지금은 니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거잖아요. 근데 너 뭐 해? 응? 아무것도 안 하잖아. 설마 저쪽이 먼저 꼬실 때까지 계속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을라고?”
“…….”
“귤이 먹고 싶으면 가만히 앉아서 누가 까주길 기다리지 말고 니 손으로 까라 이 얘기야.”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리타 스몰필드 역시 그 의견엔 동의했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다들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
“그치만…… 내가 뭐라고…….”
폴리 보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와, 나왔다. 전형적인 찐따식 변명.”
“…….”
“그래. 상처받기 무서워서 회피하는 건 인정. 하지만 리턴을 원하면 리스크를 감수할 줄도 알아야지. 도대체 왜 벌써부터 패배자 마인드인 건데?”
“겨, 경쟁자가 너무 강한 걸 어떡해…….”
“누구? 그 새로 들어온 인턴?”
“엘프인데 나이도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고, 진짜 무슨 영화배우 급으로 예쁘단 말이야…….”
“알빠여? 그리고 와꾸로는 솔직히 니가 어디 가서 꿀릴 애가 절대 아닌데 뭔 외모 타령이여.”
리타 스몰필드는 침묵했다.
자주 듣는 소리였다. 그러나 화장도 제대로 못 하는 안경잡이에 옷 입는 센스까지 전혀 없는 그녀가 본인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오, 안 되겠다. 안 되겠어.”
울적한 표정으로 연신 쭈뼛거리는 리타 스몰필드의 답답한 태도에, 참다못한 폴리 보일이 일어섰다.
“내가 그동안 네 그 빌어먹을 찐따 감성을 최대한 존중해서 여태 계~ 속 참아 왔는데. 이번 기회에 갱생시켜야지, 안 그러면 이건 내가 죄인인 거다.”
“……으응?”
의아한 표정의 리타 스몰필드에게,
폴리 보일은 음흉한 미소를 보였다.
“너. 오늘 내가 시키는 대로 해.”
***
오전 9시.
윌슨앤코 사무실.
“자아, 무역 업무는 기본적으로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된다고 했지. 뭐뭐인지 한번 말해 볼래?”
「트레이딩. 마케팅. 엑시큐션. 프라이싱. 프레이트. 그리고 리스크 매니지먼트입니다.」
“맞았어. 트레이딩이란 건 말 그대로 물건 팔아 돈 벌어오는 거야. 마케팅에서 하는 일은 시장 조사와 현지 대응. 프라이싱은 가격 책정 후 선물 주문. 프레이트는 물류 기획. 리스크 매니지먼트는 줄여서 RM이고, 이쪽의 주된 업무는 채권 관리 등이 있어.”
「확인했습니다.」
“좋아. RM이 뭐라고 했지?”
「랩몬스터.」
“병신아.”
나는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타이퍼한테 업무 관련 교육을 해주고 있다.
확실히 녀석은 옛날 깡통 시절보다 월등하게 똑똑해지긴 했지만, 그딴 사실이 전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실무 능력은 여전히 개판이었다.
정시를 조금 넘겼을 쯤.
스몰필드 씨가 출근했다.
“아, 스몰필드 씨. 좋은 아침입니다.”
그녀는 웬일로 고개를 90도로 꾸벅 숙이고는, 숙인 상태 그대로 자기 책상까지 가서 앉았다.
“팀장님. 어젯밤에 오퍼 메일 새로 와서 깃발 꽂아 놨는데 혹시 체크하셨어요?”
“예, 봤어요. CIF 조항이 몇 개 바뀌었던데, 선적서류 아직 안 받았으니까 매입원가부터 재책정하고 프라이싱 다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본사에도 그렇게 전달해 둘게요.”
평소처럼 일을 시작하려는데,
문득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저기, 스몰필드 씨?”
“네?”
나는 책상에 앉은 스몰필드 씨의 정수리에 대고 말했다.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 있나요?”
그녀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왜요?”
“그게, 오늘따라 스몰필드 씨가 저랑 눈을 안 마주치려 하시는 것 같아서요.”
어쩐지 그녀는 대답 없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반응을 보니 내 착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스몰필드 씨?”
“…….”
잠깐의 침묵 이후.
끝내 결심을 한 듯.
스윽―
비로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응?”
그런데,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오늘은 안경 안 쓰셨네요?”
“…….”
왠지 스몰필드 씨의 눈 주변에,
항상 쓰고 다니던 안경이 없었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연한 톤이긴 하나, 얼굴은 아예 눈코입부터 피부까지 완벽히 풀메이크업.
지금 보니 옷도 거의 새것 같은 순백의 블라우스에, 평소에 입는 일이 드문 스커트 차림.
“흠.”
나는 대충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리 곱게 차려입은 걸 보니, 아마도―
“회사 끝나고 약속 있으신가 봐요.”
오늘은 선거일이라 회사 재량으로 오전 근무만 하기로 정했기에, 점심시간 되면 바로 퇴근이었다.
“……아니, 저어, 약속은 없는데요…….”
“어라? 그래요?”
“……티, 팀장님은, 저기, 그으, 오늘 일찍 끝나는데, 혹시, 저어, 끝나고 뭐 하세요……?”
“음, 저도 딱히 일정은 없습니다. 그냥 투표만 얼른 하고, 바로 집에 가서 푹 쉬려고요.”
스몰필드 씨는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그녀가 뭔가 말하려 하던, 바로 그 순간.
똑똑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사무실에 누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예. 들어오세요.”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노크에 응답했다.
그러자, 끼익―. 문이 열리며, 뜻밖의 자그마한 손님이 사무실 안으로 총총거리며 입장했다.
새하얀 로리타 드레스를 입은,
장난기 넘치는 빨간 머리 소녀.
“안녕, 오빠!”
블랙 대거즈의 인형술사― 아리엘이었다.
놀라 자빠질 뻔했다.
일단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부리나케 아리엘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여긴 대체 왜 온 거야……?”
“놀러 왔어.”
“뭐……?”
“오빠가 약속했잖아. 엘프 할아버지를 납치하는 걸 도와주면 나랑 하루 종일 같이 놀아주겠다고.”
내가 그런 약속을 했었던가.
낭패였다. 블랙 대거즈 쪽에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건 물론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대놓고 회사로 직접 찾아올 줄을 누가 알았겠나.
“응? 놀아줄 거지?”
“…….”
“안 놀아주면 나 화낼 거야.”
상당히 위협적인 발언이었다. 테러리스트를 섣불리 삐지게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했다.
사실은 그때 당황해 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스몰필드 씨 역시 적잖이 놀란 것처럼 보였다.
“어, 팀장님? 그 애는……?”
나는 둘러댈 말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아, 그게, 친척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제가 잠깐 맡고 있는 중인데, 실은 오늘 회사 끝나고 같이 놀러 가기로 했거든요. 그래도 그렇지 욘석아, 회사까지 찾아오면 어떡하니. 삼촌 일해야 되는데.”
“아깐 오늘 일정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이고, 그러게요. 까먹고 있었네요. 하하.”
내가 어색한 연기를 펼치고 있었을 무렵.
“저 언니, 오빠랑 아는 사람이야?”
아리엘이 나에게 물었다.
“맞아. 같이 일하는 직장 동료분이셔.”
“언니도 우리랑 같이 놀러 가자!”
“어허,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떼쓰면 못 써. 보렴. 스몰필드 씨가 곤란해하시잖니.”
“저, 저는 놀러 가는 거 좋은데요!”
“……스몰필드 씨?”
그리하여―
난데없는 외출 이벤트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