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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89화 (89/201)

89화. Break On Through (To The Other Side) (5)

<어스퀘이크 바운드>.

특정 지점에 국소적인 지진을 일으키는, 꽤나 강력하기로 손꼽히는 아케인 파괴 마법.

지능 요구치와 마나 소모량이 큰 고위 마법이기에, 마법사 클래스만이 배울 수 있는 스킬이다.

그런데, 무투가 클래스에 속하는 자그말렉 피터스는 <어스퀘이크 바운드>를 쓸 수 있었다.

심지어 희한하게도 스킬을 시전할 때 마나 대신에 기력을 소모했다. 분명 마법인데도 말이다.

다들 이걸 버그라고 생각했다.

개똥겜인 <사이버판타지>에는 이런저런 어이없는 버그들이 넘쳐났으니까. 그런 부분 역시 어쩔 수 없는 똥겜 요소의 일환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건 버그가 아니었다.

자그말렉 피터스가 쓰는 <어스퀘이크 바운드>의 정체는, 순수한 힘만으로 지반을 뒤흔드는 것.

게임 시스템상 불가피하게 ‘마법’으로 설정되었을 뿐이지, 그것은 엄연히 놈의 ‘기술’이었다.

쿠구구구구궁―!!

지진의 강도는 점차 강해졌다.

단순히 흔들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땅을 아예 찢어발기는 균열을 일으킬 정도였다.

“큭……!”

균형을 잃은 몸이 상하좌우로 휘청거렸다. 제대로 서 있기가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발을 붙이고 있는 땅바닥이 조금씩 갈라지고 있는 게 보였다.

발밑에 균열이 생기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나는 몸을 숙여 손으로 바닥을 짚은 뒤, 마나를 방출하여 <강도 강화>를 시전했다.

지면을 따라 퍼뜨려진 불꽃은 내 주변의 아스팔트를 단단하게 굳혔다. 덕분에 트롤이 일으킨 진도 10짜리 지진에도 어느 정도 버텨낼 수 있었다.

“휘유! 하마터면 땅속에 파묻힐 뻔했군!”

땅의 흔들림이 약해지자, 어느 틈엔가 내 뒤에 따라붙은 잭 린든이 성질을 부리듯이 말했다.

“제엔장, 나 어렸을 때 책상에 앉아서 다리 떨 때마다 어무이가 지진 나겠다고 꼽을 주고 그랬는데, 설마 그게 실제로 가능한 일이었을 줄이야!”

“도살자 잭 린든한테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니, 난 그게 더 신기한데.”

“크핫! 원래 내 꿈은 변호사였어! 종족 차별하는 선생 놈을 쥐어패고 초등학교를 때려치우기 전까지는 말이지! 하여튼 그래서 이제 어쩌려고? 저놈 종아리에 쥐 날 때까지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기다릴 건가?”

“아니. 지반의 강도를 조금 강화시킨 것뿐이라 이대로 오래 버티지도 못할 거고, 뭣보다 자그말렉 피터스를 상대로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면 가망은 없어. 우리 체력이 남아 있을 때 끝장을 내야 해.”

“그렇구만. 계획은 있나?”

나는 찬찬히 상황을 되새겨 보았다.

<부름>을 먹이기 위해 자그말렉 피터스에게 접근한 순간, 놈은 순식간에 나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어스퀘이크 바운드>로 이동을 봉쇄하여 내가 자기한테 다가오는 것을 막고 있다.

마치,

내가 뭘 쓰려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사실 이전에 신제천의 보스, 불사신 장제광과 짧게 한판 겨뤘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때 장제광은 내가 <부름>을 사용하려고 하자, 왜인지 갑자기 나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동물적 육감이 위험을 감지하기라도 한 걸까?

아무튼 그때와 마찬가지로, 자그말렉 피터스에게서도 역시나 꺼림칙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확실한 건, 놈이 내가 접근하는 것을 극구 경계하고 있다는 것.

지진이 계속되는 이상 땅에서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무리다.

그러니까―

“날아서 간다.”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대와의 거리는 약 40미터.

점프 한방이면 금방 닿을 수 있는 거리.

하지만 그냥저냥 정직하게 날아들었다간 빌딩 유리창에 돌진하는 비둘기 꼴이 되어 버리겠지.

아직 출력 조절이 미흡한 것을 고려해서, 한 번에 거리를 좁히기보다는 서너 번에 걸쳐서.

좋아.

가볼까.

힘차게 발을 굴러 하늘로 뛰어올랐다.

공중에 머무른 발끝에 마나의 발판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밟음과 동시에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파아앗―!

<강화>를 담은 마나 폭발의 추진력을 활용하여, 나는 더욱더 높은 곳으로 새처럼 비상했다.

그동안의 무수한 연습 끝에, 드디어 실전에서 쓸 수 있을 정도가 된 도약 마법 <스카이하이>.

문자 그대로 하늘을 날았다.

움직이는 방향에는 제약이 없었다.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을 골랐다면 반드시 그리로 갈 수 있었다.

탓, 타앗―.

공중에서 두 차례의 도움닫기.

밤하늘의 공기를 한 모금 머금고,

자그말렉 피터스를 향해 날아갔다.

“그어어어어!”

놈이 휘두른 주먹에 맞기 직전.

한 번 더 발을 굴려 방향을 선회.

이어진 공격을 다시 또 회피하고,

곧바로 오른손에다 <부름>을 장전.

손가락 사이로 벌레 떼가 꿈틀댔다.

이대로 놈에게 먹여준다면― 이긴다.

승리가 코앞이었다.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자그말렉 피터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돌연히 입을 크게 벌렸다.

“……?”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이번에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자그말렉 피터스는 무시무시한 스펙과 달리, 실제론 누구라도 간단히 깰 수 있는 호구 보스였다.

그것은 <어스퀘이크 바운드>를 제외한 자그말렉 피터스의 모든 공격 판정이 근거리 스킬뿐인 것을 이용한 일종의 버그성 플레이.

특정 맵에서 플레이어는 자그말렉 피터스의 공격이 닿지 않는 장소에 자리한 뒤, 거기서 원거리 공격만으로 조금씩 데미지를 줌으로써, 아무런 디메리트 없이 놈을 손쉽게 때려잡을 수 있었다.

나는 <사이버판타지>의 완성판을 만들면서, 이런 노잼 플레이를 막는 모드들도 물론 설치했다.

그 모드의 내용은 이렇다.

만약 해당 버그를 사용해 자그말렉 피터스를 잡으려고 할 경우에, 자동으로 트리거가 발동하여―

자그말렉 피터스가,

입에서 광선빔을 쏜다.

“어.”

참고로.

맞으면 죽는 즉사기다.

***

지이이잉― 하고.

트롤의 입에서 번쩍 뿜어져 나온 빔을 본 순간, 정말이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물론 후회였다.

그딴 모드는 다운받지 말 걸 그랬다는,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쓸데없을 뿐인 후회.

<부름>을 쓰는 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멀쩡하게 살아있지 못했겠지.

카가각. 크가가가각―!

제때 몸을 감싸준 군체가 광선을 대부분 먹어 치워준 덕분에 다행히도 직격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즉사기’인 만큼, 그것은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상당한 수준의 데미지를 주었다.

“으윽…….”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몸을 가누기가 버거웠다.

아마도 뇌진탕 증세임이 분명했다. 광선빔을 막고 바닥에 떨어지면서 머리를 잘못 부딪친 듯했다.

멍 때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일단 거리를 벌려야 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좁혀서, 이번에야말로 <부름>을 먹여야 한다.

쿵―.

놈의 발소리다. 다가오고 있다.

다리가 안 움직인다. 뒤로 물러나려 했는데, 그쪽은 막혀 있었다. 나는 지금 쓰러져 있는 건가?

시야가 마구 흔들린다. 거대한 무언가가 내 앞에 섰다. 자그말렉 피터스다. 놈이 바로 코앞에 있다.

“마법사. 죽인다.”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그때쯤 시야가 조금 회복됐다.

아아, 이제 트롤 녀석이 내 몸을 부서뜨리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겠구나 싶었던 찰나.

자그말렉 피터스의 머리 위로,

힘껏 날아오른 실루엣이 보였다.

샷건을 든 천사, 도살자 잭 린든이었다.

높은 하늘로 도약한 오크가, 초승달의 그림자 밑에서, 펌프액션 샷건으로 트롤의 머리를 조준했다.

타아아앙―!

솟구친 격발음. 마석가공합금으로 피갑된 대전차용 슬러그탄이 트롤의 정수리에 꽂혔다.

타아앙, 타아아앙―!

잭 린든의 샷건은 슬러그탄을 두 번 더 같은 자리에 때려 박았다. 세 발 모두 정수리를 뚫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놈에게 충격을 준 것으로 보였다.

“거허억.”

트롤이 신음을 뱉으며 걸음을 주춤하는 사이.

잭 린든은 쓰러진 내 옆에 착지해 나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나를 자기 어깨 사이에 백팩처럼 짊어진 채 그대로 부서진 도로 사이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거참 미안하구만, 카이트! 아까 내가 자넬 존나게 띄워주긴 했는데, 가만 보니 저 트롤 자식은 못 이기게 맞는 것 같아! 이대로 도망이나 치자고!”

“……소용없어. 놈이 쫓아올 거야…….”

“멍청하긴. 지금 이 소리 안 들리나?”

소리……?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어디선가 들려오는, 계속해서 귓속을 울리는 어떤 소리가 있었다.

….

….

이건,

바이크 소리인가?

그래. 맞는 것 같다.

이건 바이크 소리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게다가 한둘이 아니다.

흐릿한 의식 속을 품고 소리에 집중했다,

귀를 기울인 채, 눈을 두어 번 깜빡였을 무렵.

―부아아아아아앙!!

우렁찬 엔진 소리와 함께,

수십 대에 달하는 바이크들이,

오르막 너머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저마다 디자인이 조금씩 다른 헬멧과 야상 재킷, 배기바지와 운동화 차림을 한 바이커들.

그중 일부 헬멧은 자주 봐서 익숙했다. 가끔씩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정체불명의 따봉맨이었다.

“보아하니, 자네 쪽 원군 같은데.”

나는 피식 웃으며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 선두에 있던 따봉맨이 유유히 바이크에서 내렸다. 잭 린든은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며, 자연스럽게 바이크에 나를 태우고 자기도 올라탔다.

“뒤는 부탁하지, 폭주족 친구들.”

따봉맨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쪽으로 뒤돌아보지 않고서, 그저 가만히 엄지를 척 올려 보였다.

이윽고 바이커들이 일제히 바이크에서 내렸다.

권총, 기관단총, 빠루, 회칼…… 각자 지닌 무기는 달랐다. 허나 분위기만은 모두가 비슷했다.

바이커들은 무너져 내린 도로 너머의 자그말렉 피터스를 향해 걸어갔다. 곧이어 장수말벌과 꿀벌 군단의 싸움과도 같은 치열한 전투가 시작됐다.

구경할 여유는 우리에게 없었다.

부아앙―! 잭 린든은 바이크를 몰고 시급히 그 장소를 떴다.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음에 안도했다.

“또 보자고, 따봉맨.”

부디 블랙 대거즈의 그들에게,

행운이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싸움이 시작하고.

세 시간이 지났다.

처음에는 1과 76의 싸움.

허나 지금은 양쪽 다 1이었다.

최후의 1인은 빠루를 들고 있었다.

그 금속 막대기만이 마지막 보루였다.

잭 린든의 슬러그탄이 세 번 명중했던 정수리.

그곳에 빠루를 몇 번이고 내리침으로써,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방금 전, 그 균열을 깼다.

콰직―!

두개골을 부수고, 뇌의 일부를 터뜨리는 소리.

바이커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른 빠루는 트롤의 정수리를 뚫고 들어가 머리 안쪽에 깊숙이 박혔다.

‘이겼다.’

그렇게 확신한 순간.

트롤의 손아귀가 바이커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대로 꽉 쥐어짜, 호두알처럼 으스러뜨렸다.

“…….”

자그말렉 피터스는 머리 터진 시체를 아무 데나 집어던진 뒤, 손에 남은 잔여물을 털어냈다.

그의 눈은 아까 전처럼 뒤집혀져 있지 않았다. 특유의 흐리멍덩한 눈동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걸로 끝인가.”

트롤이 혼잣말로 속삭였다.

정확하고 말끔한 발음이었다.

“머리가 좀 아프군.”

그는 자기 머리에 박힌 빠루를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렸다. 그러자 움찔하는 떨림과 동시에, 무언가 기분 좋은 해방감 같은 것이 뇌내에 밀려들었다.

“으흐음.”

그것은 틀림없이,

지적 쾌감의 전율.

“그래, 맞아. 나는 자그말렉 피터스.”

떠올랐다.

잊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암귀의 유지를 계승하는 자.”

그렇게―

괴물은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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