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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88화 (88/201)

88화. Break On Through (To The Other Side) (4)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뭐……?”

잭 린든은 핸들에서 반쯤 손을 뗀 채, 허망한 눈으로 계기판에 뜬 주유 경고등을 쳐다보았다.

“출발할 땐 분명 만땅이었는데, 갑자기 연료량이 확 떨어졌어. 빌어먹을 가짜 석유가 들어 있었던 거지.”

“잠깐, 그러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는 백미러를 보며 탄식했다.

“우린 좆됐어.”

쿵. 쿵. 쿵―.

계기판에서 깜빡거리는 경고등의 리듬에 맞춰, 뒤에서 다가오는 소리 또한 점차 커져만 갔다.

쿵. 쿵. 쿵―.

그 소리는 이제 곧 다가올 절망의 순간을 우리에게 알리는, 일종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

쿵. 쿵. 쿵―.

트럭이 평지 한가운데에 다다랐을 무렵, 파르르 떨리는 진동과 함께…… 시동이 꺼졌다.

쿵―!

그리고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절망은 우리 바로 뒤에 있었다.

“젠장.”

기껏 거리를 벌려 놓았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관성으로 굴러갈 뿐인 트럭은 자그말렉 피터스의 추격에 금세 꽁무니를 따라 잡혔다.

“차에서 내려!”

잭 린든이 소리쳤고, 나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트럭의 뒤편에 괴물 트롤이 냅다 박치기를 넣기 직전, 우리는 각자 차 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쿠웅, 콰지직―!

우직한 충돌이 일어났다. 트럭의 후면은 폐차장 압축기에 짓눌린 것마냥 초라하게 찌그러졌다.

자그말렉 피터스는 맹렬한 돌진의 기세를 그대로 이어갔다. 놈이 탑차를 끌고 수십 미터를 나아갈 동안, 나는 아스팔트 바닥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꽤나 심하게 구르긴 했지만, 전신에 <강화>를 두르고 있었던 덕분에 큰 데미지는 없었다.

“괜찮은가, 카이트?”

“대충은.”

“크하핫! 역시나 터프하군!”

잭 린든도 그런대로 멀쩡해 보였다. 오크라 하면 피부의 튼튼함만은 비견할 종족이 없었기에.

“그건 그렇고, 이거 제대로 큰일났구만.”

도로 위에서 몸을 일으킨 우리는 저편의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쿵, 콰앙, 콰직―!

자그말렉 피터스는 이미 반파된 상태나 다름없는 트럭을 마구잡이로 때려 부수고 있었다.

제어할 수 없는 듯한 분노에 휩싸인 놈의 모습은 흡사 새끼를 잃은 어미 곰처럼 보였다.

“괴물같이 강한 놈이라더니……. 저건 뭐 괴물 그 자체잖나.”

잭 린든은 질렸다는 듯이 혀를 찼다.

저기 저 트롤은 분명 그가 살면서 보아 왔던 이들 중 단연 최고로 강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싸운다면 진다. 거의 반드시.

“놈이 노리고 있는 건 나야.”

나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마법사란 걸 알자마자 저렇게 폭력적으로변했어. 구체적인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아마 저놈은 마법사를…… 나를 죽이고 싶은 모양이지.”

생각해 보면 그리 뜬금없는 상황도 아니었다.

자그말렉 피터스는 원체 마법사를 증오하는 단체인 블랙 대거즈의 보스로 군림하는 인물이니까.

“나밖에 없어. 지금 놈의 눈에 뵈는 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자네?”

“당신은 도망쳐도 된다는 얘기야.”

현 상황에 쪽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싸움을 건다면 이쪽에 승산은 대기 밖 열권의 산소보다도 희박하다. 한 명이 덤비든 두 명이 덤비든 매한가지다. 시체의 숫자가 달라질 뿐이다.

“도망치라고?”

“그래.”

“동료를 미끼로 써서?”

“어려운 일 아니잖아.”

잭 린든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시에라시티의 용병이라면, 지금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맞아. 못 이길 싸움에 목숨을 거는 건, 똥 같은 낭만에 물든 얼간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말이야. 이길 수 있는데도 도망치는 건, 바로 앞에 변기가 있는데 굳이 똥을 참는 거나 다를 바 없어. 생병신이나 마찬가지다 이거지.”

그렇게 말하며―

오크 사내는 씩 웃었다.

“난 자네한테 걸겠네.”

미친놈이나 지을 법한 미소였다.

“이 개 같고도 엿 같은 동네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자기 목숨 줄을 맡길 동료를 잘 고르는 거야. 10년 넘게 이 바닥서 뒤지게 구를 동안 사람 보는 안목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다졌지.”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가 질 것 같단 생각은 도저히 안 들어.”

“……진심이야? 저런 괴물이 상대인데도?”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 기준에선 그쪽도 괴물이거든. 암귀 형씨.”

확신에 가득 찬 눈빛.

잭 린든은 여기서 죽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전개로 향할 가능성조차 고려치 않는 듯했다.

“자, 오랜만에 같이 한번 싸워 보자고.”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그의 허술한 판단력과 얄팍한 동료애는 나까지 헛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뭐, 그러든가.”

쪽수는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조금은 든든했다.

때마침―

트롤 녀석의 무지성 트럭 부수기가 끝났다.

“그르륵…….”

놈은 자기가 부서뜨린 차 안에 내가 없었다는 걸 깨닫고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곧 먼발치의 나를 발견했고, 이내 그르렁거리며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법사…… 죽인다…….”

지금껏 30분 넘게 자동차와 추격전을 벌인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놈의 거동은 쌩쌩해 보였다. 체력을 소진하긴커녕 이제야 워밍업이 끝난 듯했다.

“샷건 탄약은 얼마나 있지?”

“100발 정도. 하지만 평범한 12게이지 산탄은 저놈에게 먹힐 것 같지가 않군. 대전차용 마금피갑 슬러그탄은 지금 딱 세 발 가지고 있어.”

“슬러그탄은 최대한 아꼈다가 긴급할 때 쓰도록 해. 그거면 피부를 까지게 할 정도는 될 테니까, 근접 상황에서 눈 주변을 쏜다면 잠깐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샷건 말고 다른 보조 무기는?”

“수류탄이 넉 개. 연막탄이 두 개. 섬광탄도 하나 있기는 한데 개활지라 쓰기 좀 그래.”

“놈이 다가오면 연막탄 먼저 던져 줘. 신호 보낼게.”

“오케이.”

잭 린든은 장전된 샷건을 치켜들었다.

나는 마법 시전을 위한 마나를 방출했다.

화륵―.

둥글게 빚어낸 화염을 각진 형태로 가공하고, 열과 마력 에너지에 강화를 가했다.

방출. 가공. 강화.

다시 방출. 가공. 그리고 강화.

이러한 시퀀스를 무한히 반복.

처음에 단 한 송이에 불과했던 불꽃은, 어느새 수백 대의 불화살이 되어 가로로 나란히 늘어섰다.

가용 최대 출력의 <버닝 샷>.

그 화력은 다연장로켓에 준할 터.

한꺼번에 발사된 불꽃의 화살들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자줏빛의 화염비가 내릴 지점에는 눈알이 뒤집힌 트롤 자그말렉 피터스가 있었다.

화아아아악―!

트롤의 주위로 불길이 세차게 번져 나갔다. 그때 내 신호를 받은 잭 린든이 연막탄 두 개를 연달아 집어 던졌다. 곧 그곳은 연기와 화염으로 뒤덮였다.

―좋았어. 놈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다. <버닝 샷>으로 놈에게 데미지를 입힐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내 마법의 화력으로 그게 가능할 턱이 없었으니까.

자그말렉 피터스의 체력과 방어력은 전 캐릭터를 통틀어 가히 최강급. 웬만한 파괴 마법으로는 놈의 피부에 흠집을 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이길 방법은 단 하나.

<부름>을 사용하는 것.

무엇이든지 먹어 치우는 악마의 벌레 떼.

접근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끝낼 수 있다.

놈의 눈을 가리는 것은 그 첫 번째 단계.

연막과 불꽃으로 시야가 차단된 지금이 기회다.

잭 린든이 샷건을 쏘면서 엄호했고, 나는 그 틈에 쏜살같이 앞으로 전진했다. 까맣게 피어오른 연기 너머로 트롤 녀석의 큼직한 실루엣이 보였다.

체크메이트까지 한 발짝.

걸음을 내딛으려던 그 순간.

“마법사.”

오싹―.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죽인다.”

차디찬 육감의 손아귀가 내 목덜미를 꾹 잡아당겼다. 나는 반항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때, 부우우우웅―!

묵직한 바람이 코앞을 스쳤다.

그것은 자그말렉 피터스가 휘두른 주먹이었다. 하지만 난 그게 주먹이라는 사실을 한동안 깨닫지 못했다. 아니, 뭔가가 내 앞을 지나갔다는 사실마저도 의식이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뒤에야 알았다.

걸음을 내디뎠다면…… 죽었다.

풍압만으로 타박상을 입을 뻔했다. 방금 그 주먹을 맞았더라면, 머리가 통째로 증발해 버렸을 것이다.

자그말렉의 실루엣이 좀 더 선명히 드러났다.

진하게 폐색된 두려움. 죽음이 눈앞에 있었다.

공포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허나 입술만은 움직여야 했다.

“…….”

죽음을 이기고자,

그 이름을 불렀다.

“카인 나호르.”

….

….

카각.

그그그그극―.

악마의 벌레들이 나의 <부름>에 응했다.

손끝에서 부글거리는 자색 군체를 보자 두려움이 퇴색됐다. 나는 죽음보다도 이것들이 더 무섭다.

어찌 됐건 간에 이것 역시 내 힘이다.

공정한 계약으로 손에 넣은 정당한 대가. 이 힘을 부리는 마음과 행동에는 일말의 거리낌도 없다.

<부름>으로 자그말렉 피터스를 죽인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그것뿐.

나는 연기와 화염 너머에 있을 트롤 녀석의 실루엣을 향해, 오른팔을 휘둘러 벌레 떼를 날렸다.

군체는 자신과 맞닿은 모든 것들을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연기와 화염이 벌레들의 먹이가 되어 사라졌다. 다음은 자그말렉의 차례였어야 했다.

그러나,

“……?!”

놈은 거기에 없었다.

도대체 어느 틈에 뒤로 물러난 건지, 여기서부터 한참 떨어진 도로 저편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째서지?

……방금은 놈의 입장에서도 나에게 유효타를 먹일 찬스였을 텐데?

의문을 해소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거리가 멀어졌다면 다시 접근하면 될 뿐이다.

나는 <부름>을 그대로 오른손에 유지한 채, 저 멀리에 있는 자그말렉 피터스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 순간.

……또다시 오싹해졌다.

뒷목 언저리에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았다.

이번에도 육감이 제일 먼저 이변을 감지했다.

―뭔가 온다.

….

….

쿠구구구궁!

땅바닥이 거세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다.

아까 전에 자그말렉 피터스에게 주먹을 맞을 뻔한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 진동이 시작되고서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무슨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를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지진이었다.

다만 자연 현상이 아닌,

인위적으로 발생시킨 지진.

“미치겠네.”

지반을 흔들리게 한 범인은―

자그말렉 피터스의 발바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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