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Break On Through (To The Other Side) (3)
정적.
침묵이 흘렀다.
“…….”
“…….”
나도, 잭 린든도, 똑똑히 들었다.
자그말렉 피터스가 무어라 말했는지.
그래. 틀림없이.
놈은, 똥꼬에 털이 있다고 말했다―.
“똥꼬에 털 잇슴.”
아. 지금.
또 말했어. 똥꼬에 털 있다고.
“근데 털에는 똥꼬가 업슴.”
“…….”
“이게 말이 댐? 진자 개신기함.”
불가사의한 혼돈이 느껴졌다.
형언할 수 없는 공포까지 엄습해 왔다.
“카이트, 저놈이 자네가 말한 트롤 맞지?”
“그런 것 같아.”
“아이큐가 300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
우리는 가만히 트롤을 쳐다보았다. 놈은 자기 엉덩이에게 말을 거는 중이었다. 대화가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인지 애꿎은 소파에 화풀이를 해댔다.
“30도 높게 쳐준 것 같은데.”
“…….”
뭔가 이상했다.
내가 알고 있는 자그말렉 피터스는 저런 인터넷 정박아 같은 모습을 보일 위인이 결코 아니다.
어쩌면―
“연기일 가능성이 있어.”
“흠?”
“일부러 바보인 척을 하는 걸지도 몰라.”
우리는 재차 트롤을 쳐다보았다. 놈은 지금 막 엉덩이와 화해를 마친 듯했다. 악수를 요청했으나 엉덩이가 손을 내밀지 않아 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저게 연기라면 오스카를 줘야겠는데.”
“…….”
뭔가 이상했다.
엄청나게 이상했다.
……얘가 자그말렉 피터스인 건 맞나?
그런 원초적인 의심까지 들기 시작한 찰나.
문득, 방 안 구석에 마련된 구형 PC 단말기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리로 가서 단말기를 만졌다.
16비트 화면을 이리저리 조작해, ‘챔피언 프로필’이란 제목의 문서 파일을 열어 보았다.
─이름: J. 피터스
종족: 트롤
성별: 남성
나이: 모름
직업: 없음
출신: 밤비타운
─저해상도의 사진과 간단한 프로필이 나왔다.
사진 속 인물은 똥 씹은 표정을 한 못생긴 트롤. 지금 이 방에 있는 놈과 동일 인물로 보였다.
“자네가 말한 놈은 이놈이 맞았군.”
잭 린든의 말에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좌우지간 일이 꼬인 것만은 변함없었다.
<사이버판타지>의 본편 메인스토리 시작 시점은 이틀 뒤인 목요일. 날짜로 따지면 6월 13일.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자그말렉 피터스는 블랙 대거즈의 보스로 군림하고도 남았어야 한다.
본디 내가 세운 계획은 자그말렉 피터스와 접촉하여, 토마와 아리엘을 비롯한 기존 블랙 대거즈 단원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었지만…….
“돈 꿔달라고 했더니 똥꼬를 줫슴.”
“…….”
“똥꼬랑 돈고don’t go는 발음이 비슷함.”
놈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머리에 쇠 파이프도 꽂혀 있지 않고, 지능엔 심각한 이슈까지 있다. 하여간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
….
혹시,
벌써 미래가 바뀐 게 아닐까?
그동안 내가 알게 모르게 이곳저곳에 영향을 줘서, 그게 나비효과가 되어 자그말렉 피터스와 블랙 대거즈의 미래를 변화시켜 버린 걸지도 모른다.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자그말렉 피터스가 블랙 대거즈를 집어삼킬 일은 없으며, 토마와 아리엘 또한 죽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미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어쩔 셈인가, 카이트?”
“…….”
잭 린든이 아까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볼일은 끝났어.”
나는 한껏 후련해진 맘으로 답했다.
“철수한다.”
더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허공을 향해 연신 헛소리를 내뱉는 바보 트롤을 그 자리에 두고서, 우리는 나갈 채비를 했다.
개인실을 빠져나온 순간.
복도 건너편에서 누군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아까 전에 복도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었다.
다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등 뒤로 주르륵 늘어선 것은,
검은 양복을 입은 수십 명의 떡대들.
“미스터 카이트.”
그 떡대들 사이에서, 사근사근한 말투의 한 남자가 나타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맥스페인>의 총괄 매니저인 파비앙 모리에르라고 합니다.”
“…….”
“방금 전에 당신이 챔피언에게 도전 신청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직원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만.”
어쩐지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가면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군. 그건 없던 일로…….”
“아니요.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지요.”
그는 도중에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이곳은 챔피언과 도전자만이 입장할 수 있는 전용 대기실입니다. 도전 신청을 하셨으니 응당 이렇게 발을 들이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
“그게 아니라면, 당신과 당신의 친구분께서는 <페르골리치 패밀리>의 사유지에 무단 침입을 한 셈이 될 텐데, 정말 그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을 리가 없었다.
<페르골리치 패밀리>라 하면 시에라시티에서도 가장 막강하기로 손꼽히는 거대 마피아 조직.
사업을 중시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돈벌이에 도움 되는 대부분의 조직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다.
<페르골리치 패밀리>를 적으로 둔다는 것은, 사실상 뒷세계 전체를 적으로 두는 것과 마찬가지.
“어쩌시겠습니까, 미스터 카이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나와 같은 판단을 내릴 터였다.
나는 한 번 더 천천히 가면을 고쳐 썼다.
그러면서 뒤쪽의 잭 린든을 슬쩍 흘겨보았다.
툭―.
고개를 까딱였다.
그에게 주는 신호였다.
다시 앞을 보았다.
입을 열어 말했다.
“조까.”
그리고 곧바로,
<폭렬파>를 날렸다.
콰아아아아앙―!!
자색의 충격파가 온 공간을 휘감았다.
눈앞에 있던 놈들은 대부분 폭발에 휘말려 복도 저편으로 날아가 전투 불능에 빠졌다.
탕, 타앙, 타앙―!
간신히 몸을 추스른 녀석들도 곧 잭 린든의 반자동 샷건에 머리와 몸통을 차례대로 꿰뚫렸다.
“이런, 젠장.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보이는 대로. 페르골리치 패밀리한테 아주 커다란 빅엿을 날려 줬지.”
이 선택에 후회는 없다. 자그말렉 피터스랑 옥타곤에서 일대일로 맞다이를 까느니, 차라리 페르골리치 패밀리랑 척을 지는 편이 몇 배는 더 나았다.
“당분간 4구역은 얼씬도 못 하겠군.”
“크하핫, 자네는 정말로 미쳤어! 그래서 더 맘에 든다니까! 자넬 따라오길 정말 잘한 것 같군!”
손바닥에 남은 얼얼한 진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폭발음을 들은 놈들이 반대편 복도에서 몰려왔다.
탕, 타앙―!
잭 린든은 놈들이 벽 너머로 나오지 못하도록 산탄총으로 위협 사격을 가했다. 그사이에 나는 원거리 광역 마법 시전을 준비했다.
<강화>로 만든 고열의 화염탄을 조심스럽게 포개어, 둥근 불꽃의 형상을 직각으로 접어낸다.
여러 겹으로 접어 곧게 세운 불꽃에, <폭렬파>와 같이 한 점에 뭉친 척력을 순차적으로 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화염탄은 로켓 추진식 미사일처럼 고속으로 날아가는 불꽃의 포탄이 된다.
이는 곧 <파이어볼>의 상위 마법.
“<버닝 샷>.”
파바바밧, 화르륵―!
총알처럼 날아간 화염탄은 벽면에 도탄되어 반대편 벽에 숨어 있던 놈들의 옷자락에 옮겨붙었다.
“끄아아아악!!”
화염이 피부를 태우자 놈들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자색 마력의 불꽃은 금세 꺼져 버리지만, 열은 그대로 남아 평범한 불로서 다시 피어난다.
적들이 전의를 상실한 틈에 여길 벗어나야 했다.
복도 가장 안쪽에 밖으로 빠져나가는 비상구가 있었다. 나와 잭은 헐레벌떡 그리로 달려갔다.
발을 구르던 와중.
뭔가가 눈에 띄었다.
“……?”
챔피언 대기실의 문 앞쪽에,
자그말렉 피터스가 서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때.
눈이 마주친 듯했다.
….
….
아니.
착각이 아니다.
놈은 틀림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마법사.”
그 두 눈에 담겨 있던 것은,
증오와 혐오로 가득 찬 분노.
“죽인다.”
***
괴수 영화를 본 적 있는가?
‘클로버필드’나 ‘괴물’ 같은 영화들을 보면, 무시무시한 괴수로부터 도망치는 장면이 꼭 나온다.
상식 불통의 괴생명체한테 쫓긴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지금 나는 실감나게 체험하는 중이다.
“헉, 허어. 허어어억……!”
미치도록 발을 굴렀다.
앞만 보고 달려야 했다.
뒤돌아보는 순간 죽는다.
―쿵, 쿠웅, 쿠웅!!
소리가 들린다.
다가오는 소리다.
죽기 싫어 달린다.
“서두르게, 카이트!”
빛이 보인다. 드디어 바깥이다.
나는 잭 린든의 뒤를 쫓아 계단을 빠져나와, 비로소 네온사인이 가득한 밤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괴물도 함께 나왔다.
―쿠우우우우웅!!
건물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마구잡이로 휘두른 트롤의 주먹질이 기둥 몇 개를 부순 탓이었다.
자그말렉 피터스는 부서진 건물의 잔해 사이로 유유히 걸어 나왔다. 놈의 눈은 회까닥 뒤집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누런 침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마법사…… 죽인다…….”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진득진득한 살기.
저 괴물은 명백히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이봐!”
그즈음 잭 린든이 소리쳤다.
그는 지상 주차장에 있던 2톤 트럭의 운전석에 올라탄 채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서 타!”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트럭으로 뛰어갔다.
내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잭 린든은 곧바로 기어 단수를 올리고 엑셀을 들입다 밟았다.
부르르릉―!
디젤 엔진의 굉음과 함께 탑차가 달리기 시작했고, 자그말렉 피터스도 트럭 뒤를 바짝 쫓아왔다. 자기가 지나간 도로를 완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돌겠네, 저거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잘은 모르겠지만 나 때문인 것 같아. 내가 마법사인 걸 알고는 왠지 개빡쳐 하더라고.”
“됐으니까 안전벨트나 매! 이젠 저놈한테 뒤지든가 교통사고로 뒤지든가 둘 중 하나니까!”
잭 린든은 노스네스트의 좁은 도로 사이를 뚫고 곡예 같은 운전을 펼치며 아찔한 도주를 계속했다.
허나 아무리 도망쳐도 트롤과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좁혀지는 모양새였다.
“미친 괴물 자식, 지금 시속 90km인데……!”
“더 빨리는 못 달려?”
“무리야! 화물차라 그런지 최고 속도에 리미트가 걸려 있나 봐! 암만 밟아도 여기서 더 안 빨라져!”
“이대로 가면 따라잡힐 것 같은데.”
“최고 속력은 우리가 탄 트럭 쪽이 더 빨라! 다만 시내는 굽이진 길이 많아서 속도를 유지하기가 어려우니 시골길로 빠져야겠어! 그전에 제발 저 괴물 자식이 지쳐서 나가떨어져 주면 좋겠구만!”
그렇게 외치며, 잭 린든은 핸들을 격하게 돌렸다. 트럭은 유도선을 따라 화려하게 드리프트를 하며 사거리를 통과했다. 자그말렉 피터스의 뜀박질은 교차로 한가운데에 방지턱을 몇 개 만들었다.
도주와 추격은 30분 정도 이어졌고,
마침내 노스네스트 교외에 다다랐다.
시골길로 빠지는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직진만 있는 산길을 오르는 동안 놈과의 거리가 꽤나 멀어졌다. 이제 조금 뒤에 내리막을 지날 때쯤에는 놈을 완전히 따돌릴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쯤.
“좆됐군.”
잭 린든이 말했다.
“기름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