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85화 (85/201)

85화. Break On Through (To The Other Side) (4)

화요일 저녁.

웨스트록 13구역.

<메이슨 월>을 경계로 노스네스트와 맞닿아 있는 이 구역은 북쪽 장벽 너머의 빈촌 못지않게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세민가다.

‘돈을 버는 것’과 ‘범죄를 저지르는 것’ 사이의 구분이 희미한 노스네스트와 벽 하나를 두고 이웃한 동네지만, 이곳 웨스트록 13구역의 범죄율은 의외로 시에라시티 전역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삶의 궁핍이 절정에 달했음에도, 끝내 정의라는 좀스런 미덕을 버리지 못한 양심적인 바보들. 13구역에 터전을 마련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나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주택가의 거리를 걸었다. 가난한 자들의 마을은 기름칠이 덜 된 톱니처럼 생기라곤 전혀 없이 까끌까끌한 분위기를 띠었다.

노을을 등진 채로 쭉 걷다가,

어느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긴가.”

다 쓰러져 가는 빅토리아풍 목조 저택.

영화 ‘파이트 클럽’에서 브래드 피트가 살았던 쓰레기 집과 매우 흡사한 건축물이었다.

“…….”

주소상으로는 여기가 맞았다.

이곳이, 블랙 대거즈의 아지트다.

현관 나무문에 다가가 노크를 해보았다.

퉁퉁―. 옛날 창호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자칫 잘못하면 문짝이 부서질 듯했다.

노크에 응답은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어젖혔다.

끼에엑―.

마녀의 비명 같은 문소리.

어두컴컴한 실내가 드러났다.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집안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가 싶었는데, 문득 현관 앞 계단 밑에서 희미하게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집안에 들어가 계단을 내려갔다.

끼긱, 끼긱―. 불안한 신음 소리를 내는 계단을 끝까지 내려가자, 약간 탁 트인 공간이 펼쳐졌다.

10평 남짓한 크기의 지하실.

가죽이 다 뜯어진 소파에 앉아 브라운관 TV를 보고 있는, 공주님 같은 원피스와 헤드 드레스를 갖춰 입은 빨간 머리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앗, 오빠다!”

그리고 그 소녀는, 문간에 선 나를 발견하고는 해바라기처럼 환한 얼굴로 총총거리며 뛰어왔다.

“안녕, 아리엘.”

“어서 와, 오빠!”

블랙 대거즈의 간부급 인물.

인형을 다루는 에스퍼― 아리엘.

“에헤헤, 진짜 오랜만이다. 그치?”

“어제도 얼굴 봤잖아. 이스트포레스트에서.”

“치, 아니거든. 그거는 얼굴 본 걸루 치면 안 되지. 오빠랑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는걸.”

어제 오전, 에버그린 파크에서 렘브란트를 납치하는 과정에서 블랙 대거즈의 도움을 받았다.

그때 아리엘의 역할은 시선 분산과 자연스러운 터치를 위한 ‘뛰노는 소녀’였다.

“토마는?”

“아직 안 왔어. 오늘은 늦게 온다고 했는데.”

렘브란트 납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블랙 대거즈의 보스― 토마가 지닌 초능력.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에스퍼인 녀석이 능력을 사용하여 렘브란트의 경호원들을 포함한 주변의 보는 눈을 전부 없애주었다.

그 틈에 우리는 렘브란트를 납치.

‘뒷세계 조직으로부터 위협받는 상황’을 훌륭히 연출해, 결과적으로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너는 이 집에서 토마랑 둘이 사는 거야?”

“응. 원래는 레오랑 체스터도 같이 살았는데, 레오는 오빠가 죽였고, 체스터는 며칠 전에 또 도망갔어.”

“……도망갔다고?”

“지나가 잡으러 갔으니까, 곧 돌아올 거야.”

지나. 체스터.

둘 다 모르는 이름이다.

내가 아는 게임 속 블랙 대거즈의 간부들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캐릭터는 없었다.

토마도 그렇고,

아리엘도 그렇다.

게임 속에 없는 캐릭터란 것은,

이미 그전에 죽은 캐릭터란 것.

“…….”

<사이버판타지> 본편 메인스토리가 시작되는 시점은 시장 재보궐 선거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

선거일은 내일이다.

본편 시작은 내일모레.

어쩌면 이틀 안에, 지금 블랙 대거즈의 보스를 포함한 간부들 전원이 숙청당할지도 모른다.

“아참, 이번 일 도와주면 나랑 하루 종일 놀아줄 거라고 약속했잖아. 그거 진짜지? 거짓말 아니지?”

아리엘은 맑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보챘다.

“그래. 거짓말 아니야.”

내 말에 녀석은 기쁜 얼굴로 방방 뛰었다.

이렇게만 보면 그냥 귀여운 여자아이다. 잔악무도한 테러리스트 따위가 아닌, 그저 평범한 소녀.

비즈니스 관계에 불과하지만,

내 편에 있는 동료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켜야겠지.

미래를 바꾸고 싶다면.

윌슨앤코든.

블랙 대거즈든.

그 누구도 죽게 하지 않으리라.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미래를 망칠 각오는 끝났다.

***

화요일 밤.

노스네스트 3구역 <펍 미드나이트>.

“오우, 왔는감.”

시끌시끌한 주점 안에 들어서자, 바 너머의 주인장이 평소처럼 시크하게 나를 반겼다.

“오랜만이야, 주인장.”

“오랜만이긴 하네. 요새 방문이 좀 뜸했잖나.”

“현상금 걸렸던 탓이지. 가면만 쓰고 있으면 냅다 덤비는 놈들이 튀어나왔으니. 뭐, 대충 해결했어.”

“아, 얘기는 들었어. 이번엔 차이나타운을 완전 뒤집어엎어 놨다면서? 그래도 한때는 고객이었던 놈들인데 이리 냉혹하게 묵사발을 내다니. 역시 암귀답게 피도 눈물도 없구만 그래. 크하핫!”

“주인장도 배신하면 가만 안 둘 거야.”

“뭣 좀 마시겠나? 오랜만에 커피는 어때?”

“차라리 커피 리큐르를 먹고 말지.”

주인장은 깔깔 웃으며 깔루아 섞은 흑맥주를 내 앞에 따라주었다. 나는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기에 대충 잔을 입가에 적셔 맛만 보고 말았다.

“그보다 마침 잘 왔군. 안 그래도 오늘 한번 가게 들르라고 연락해 볼까 하던 참이었거든.”

“왜?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그건 아니고. 실은 자네가 오길 애타게 기다린 손님이 있어서.”

“……?”

“이봐, 잭! 왔어! 그 친구야!”

주인장이 외치자, 구석진 자리에 용병들과 함께 앉아 있던 누군가가 테이블을 쿵 내려치며 벌떡 일어나더니, 화난 듯한 걸음걸이로 내 쪽에 다가왔다.

“젠장할! 드디어 만났군!”

우락부락한 덩치. 굵직한 저음.

어깨너비가 1미터를 넘기는 오크.

“어이, 이봐, 자네. 나 기억하지? 기억한다고 말해야 할 거야. 안 그럼 내가 많이 속상할 테니까.”

그가 나를 위협하듯이 말했다.

나는 넌지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기억하지.”

다섯 정의 샷건을 몸에 지닌,

‘도살자’라 불리는 네임드 용병.

“잭 린든.”

내가 이름을 말하자, 부글부글 분노로 끓는 듯했던 그의 표정이 단번에 기쁨으로 누그러졌다.

“그렇지! 기억하셔야지! 아무렴 생사를 함께했던 동료였잖나! 으하하하핫!”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주인장 역시 자연스럽게 맥주를 내놨다.

도살자 잭 린든.

<사이버판타지>에서는 최고의 동료 캐릭터 중 하나로 꼽히는 NPC 캐릭터다.

나와 그가 서로를 알게 된 것은 석 달 전, 내가 처음으로 용병 의뢰를 받아 뛰었을 때다.

사우스아치에서의 밀항자 호위. 그때 의뢰를 같이 수행했던 동료가 바로 잭 린든이었다.

“으하핫. 잘 지냈나, 카이트?”

“그럭저럭. 그쪽은 어떻게 지냈어?”

“몇 달 동안 아주 그냥 꼴값을 떨며 지냈지. 내가 그동안 자네 얼굴 한 번 좀 보려고, 어? 이 술집에 몇 번을 찾아왔거늘! 근데 여태 단 한 번도 자네를 못 봤어! 이게 말이나 되냐고, 엉?”

겨우 임무 한 번 같이 뛴 걸로 심하게 친한 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것도 고증이었다.

게임 속에서 잭 린든은 플레이어와의 관계도를 올리기 가장 쉬운 NPC. 대화에서 무슨 선택지를 고르든 호감도가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동료로 영입하기도 쉽고, 능력치도 좋은 편이라, 육성과 장비 관리만 잘해준다면 게임 후반부까지도 동료로서 활약이 가능한 국밥 같은 캐릭터였다.

“아아, 그때 자네 모습이 아직도 떠오르는군. 스캐빈저 놈들의 총알 세례를 뚫고 전진하는 걸 봤을 때는 정말 소름이 다 돋더군. 내 살면서 그런 건 처음 봤다니까! 꼭 뭣이냐 그, 톰 크루즈 같았어!”

“음.”

“그나저나 가면 멋진데. 어디서 샀나?”

“<끈적한 용암 공방>.”

“내일 투표는 할 건가? 난 물론 스트로베리 뽑을 거야. 왜냐고? 나랑 똑같은 오크니까! 게다가 쭉빵하기까지! 이거야 원, 안 뽑을 이유가 없잖나?”

“으음.”

“아이고, 이럴 때가 아니지. 당장 전화번호 내놔! 정기적으로 연락하며 지내자고, 우리!”

하여간 이 더벅머리 오크 아저씨는 일일이 상대하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호감을 표해 왔다.

앞서 말했다시피, 잭 린든은 최고의 동료 캐릭터였기에 친해져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오케이, 번호 교환 완료. 이걸로 우린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됐어. 요즘 애들 말로는 ‘짱친’이지!”

“으으음.”

“뭔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게. 만약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하다 해도 문제없어. 사실, 요즘 내가 적잖이 한가하걸랑! 으하하핫!”

잭 린든은 호탕한 소리로 웃었다.

이번에는 그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그러면, 사람 찾는 것 좀 도와줄 수 있을까?”

그는 살짝 놀란 눈치로 흥미를 띠었다.

“오호? 누굴 찾고 있지?”

“트롤. 이름은 자그말렉 피터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이름을 뱉었다.

자그말렉 피터스. 게임 속에서는 토마 대신 블랙 대거즈의 보스 자리에 군림해 있는 캐릭터.

레벨은 무려 83.

피지컬과 브레인을 겸비한 만능 트롤 싸움꾼.

시에라시티에 기거하는 수많은 강자들 중에서도 단연 ‘괴물’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은 존재다.

“머리 한쪽에 쇠파이프가 꽂혀 있는 놈이야.”

“흐음, 트롤이라…….”

“혹시 아는 놈인가?”

잭 린든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기억을 되짚으려고 애쓰는 모양새였다.

“그으, 내가 언제 아는 친구한테서 뭔 얘기를 들었는데, 아마 4구역이었나? 거기 있는 어떤 투기장에 괴물같이 강한 트롤이 있다고 했거든.”

나는 흠칫 놀랐다.

“4구역의 투기장이라면…… <맥스 페인>?”

“오 맞아. 거기일 거야. 맥스 페인 투기장.”

<맥스 페인>이라 하면 예전에 들렀던 곳이다. 투기자로 10연승 찍고 60만 달러쯤 벌어 갔었지.

“그 트롤이 거기 있는 게 확실해?”

“나야 모르지. 듣기만 했으니까.”

괴물같이 강한 트롤.

떠오르는 놈은 자그말렉 피터스 외에 딱히 없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이상한 일이다.

쪼렙들 놀이터인 투기장에서 자그말렉 피터스가 어슬렁거릴만한 이유는 전혀 없을 텐데…….

“흐음.”

아무래도.

직접 가서 확인해봐야겠군.

“정보 고마워, 잭. 나중에 한턱 쏠게.”

나는 잭 린든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 순간,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잠깐, 이봐.”

“응?”

“나도 같이 가도 되겠나?”

잠깐 고민에 빠졌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나.

“뭐, 그러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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