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Peace Sells… But Who’s Buying? (3)
질문이 날아든 순간.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
“아뇨?!”
사무실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는, 어색한 변명의 시간.
“아, 저기, 사,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고, 직장 상사로서는 그, 좋은 분이라고는, 생각, 해요…….”
리타 스몰필드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눈을 돌린 것만으로는 붉어진 뺨을 감출 순 없었다.
“흐음, 그래요?”
비너스는 리타 스몰필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괜찮겠어요?”
“네?”
“너무 여유 부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유진 씨는 딱 봐도 여자 잘 꼬이게 생기지 않았어요?”
“아니, 그러니까 저는…….”
“우물쭈물하다가 뺏길지도 모르는데에.”
그녀는 수상쩍게 흥얼거리듯 말했고, 리타 스몰필드는 덜컥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아, 아까 전에는 팀장님 같은 남자랑 사귈 생각 없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어엥? 제가 언제 유진 씨를 노리고 있다고 했나요? 저는 그냥 경쟁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죠. 그게 저라는 말은 저언―혀 한 적 없는데요?”
“…….”
“뭐어, 노리고 있는 건 맞지만요.”
순간.
리타 스몰필드는 귀를 의심했다.
“……지, 진짜요?”
“넹. (심장 얘기지만).”
그녀의 눈에서 안광이 사라졌다.
비너스는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니까아, 그렇게 마냥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딴 년한테 확 뺏겨 버릴지도 모른다구요―?”
정적.
침묵이 감돌았다.
에어컨을 틀어 놓지 않았음에도,
싸늘한 바람이 부는 사무실이었다.
***
시에라시티의 동서남북은 각기 다른 녹색을 품고 있다.
웨스트록의 녹색은 시시각각 뒤바뀌는 신호등의 초록불이고, 사우스아치의 녹색은 산업 폐수로 물든 공장지대의 시궁창이며, 노스네스트의 녹색은 에테르암페타민에 중독된 약쟁이들의 혓바닥이다.
그리고―
이스트포레스트의 녹색은 바로 이곳.
호수와 산책로. 잔디밭과 떡갈나무 숲.
대도시의 중심에 자리 잡은 초록빛 자연.
1구역의 시민공원 <에버그린 파크>.
총 면적 4.5km²의 이 드넓은 녹지는 이스트포레스트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다.
뉴욕에 센트럴 파크를 만들지 않는다면 언젠가 똑같은 크기의 정신병원을 지어야 할 것이라 주장했던 한 건축가의 신념은 여기 시에라시티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공원을 탄생시켰다.
다만 서민이든 갑부든 노숙자든 공평하게 거닐 수 있는 뉴욕 시민 모두의 공원인 센트럴 파크와는 달리, <에버그린 파크>는 오직 이스트포레스트에 거주하는 부유층들의 전유물, 연간 1억 2,000만 달러의 유지비가 들어가는 더럽게도 비싼 힐링의 공간이었다.
나는 서쪽 7번 출입구로 공원에 들어섰다.
분수대를 통과하여, 저수지의 보트하우스를 지나, 자전거길 산책로 중간의 한적한 지점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찾고 있던 사람을 발견했다.
벚나무 아래, 홀로 벤치에 앉아 비둘기들에게 빵조각들을 나눠주고 있는 백발의 다크엘프.
나는 그가 있는 벤치 끝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한가해 보이는군, 팀장.”
렘브란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말했다.
“아침부터 남의 동네 공원에서 땡땡이라니. 아니면 나한테 무슨 중요한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
“물론 후자입니다, 렘브란트 씨.”
“용건이 있으면 전화로 하지 그랬나.”
“전화로는 말씀을 제대로 안 들어 잡수시길래, 얼굴 맞대고 직접 얘기할 셈으로 찾아온 겁니다.”
“그렇구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잠깐이면 되는 데다, 어차피 그쪽도 꽤나 한가해 보이시는걸요.”
그는 곧 벤치에서 일어났다. 바닥의 비둘기들이 부산스럽게 푸드덕거리며 저편의 뜰로 날아갔다.
“날도 좋은데, 좀 걷지.”
렘브란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뒤를 쫓아 산책로를 걸었다. 조금 뒤, 주변에 듣는 귀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전에 드린 말씀은 재고해 보셨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가 없어서 그러지 않았네.”
“그건 그냥 공연히 꺼냈던 얘기가 아닙니다. 제가 몇 번이고 설명해 드렸지 않았습니까.”
“몇 번을 물어도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않을 걸세.”
렘브란트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자수를 하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지.”
나는 턱까지 차오른 한숨을 도로 집어삼켰다.
“자수가 아니라 사법 거래입니다.”
“경찰한테 달려가 자기가 지은 죄를 실토하는 것이 자수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
“많이 다르죠. 자수가 항복이라면 사법 거래는 윈윈 전략이에요. 일종의 비즈니스라 이겁니다.”
“막심한 손해를 볼 게 분명한 비즈니스를 굳이 이쪽에서 나서서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더 큰 손해를 막아야 하니까요.”
뒷짐을 진 그의 등을 보며, 나는 말했다.
“당신은 지금 윌슨앤코 내에 존재하는 모든 불순분자 세력을 뿌리 뽑으려 하고 있죠. 검은돈과 관련 없는 깨끗한 기업을 만들겠다는 일념만으로요. 하지만, 그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소리를 하고 있군. 이미 산지브 크리슈나를 필두로 한 불량 임원진과 사내외의 조력자들은 대부분 정리가 끝났어. 남은 건 윌슨앤코와 연관된 뒷세계의 조직들을 청소하는 것뿐이야. 그리고 그건 내가 아닌 자네가 할 일이지, 팀장.”
렘브란트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나를 보았다.
“이리 쓸데없는 이야기를 반복할 시간에 차라리 일 처리를 서두르는 편이 낫지 않겠나?”
“말씀드렸다시피 완전한 청소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거야말로 쓸데없는 일이 될 겁니다.”
“또 우는 소리인가. 자네는 벌써 한참 전에 데스트루퍼를 가볍게 없앤 바가 있잖나. 그리할 능력이 있으면서 왜 불가능이라 단언하는 거지?”
“그야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시에라시티에는 데스트루퍼처럼 만만한 조직들만 있는 게 아니라서요.”
페르골리치 패밀리. 신제천. 로스 세타스.
유성회. 성전기사단. 언더도그마 브라더후드.
도시의 뒷골목을 지배하는 암흑가의 마왕들.
아직 그들과 깊게 엮이지 않은 것은, 순전히 행운의 덕. 그 행운이 영원히 지속되진 않으리라.
“윌슨앤코와 연관된 조직들을 전부 부수려 하다 보면, 언젠가는 부딪혀선 안 되는 이들과도 부딪히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단언컨대 승산은 없어요. 이건 우는 소리가 아니라 현실적인 관측입니다.”
“…….”
“아까 말씀하신 대로, 현재 그룹 내 주요한 불량분자들은 거의 정리가 끝난 상태죠. 여기서 더 파고들다가 자칫 뒷세계의 역린을 건드려 버리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멈춰야 합니다.”
내가 제안한 것은 경찰과의 사법 거래.
그동안 회사가 저지른 배임과 횡령 등의 부정들을 자발적으로 신고하는 대신, 가장 위험한 요소였던 뒷세계와의 커넥션은 비밀리에 보전시키기로 한다.
윌슨앤코는 기업적인 측면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겠지만, 자금책으로서의 기능이 유지되는 한 뒷세계 조직들의 심기는 크게 거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몇몇 사원들이 미스터리한 사유로 실종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터.
“회사의 모든 악을 완전히 제거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평화를 위해선, 공존을 택할 수밖에 없어요.”
“평화를 위한 공존이라…….”
“사실은 지금도 상당히 위험한 지점에까지 와 있다고 봅니다. 저도 마찬가지지만, 렘브란트 씨. 당신도 목숨이 노려지고 있을지 모른단 얘깁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위험해? 목숨이 노려져?”
렘브란트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마치 내 말이 허풍처럼 들리는 양.
“설마 나에게 경고하는 건가?”
“허투루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에 습격을 당한다 해도 이상치 않은 상황이에요.”
“제발, 호들갑 좀 그만 떨게.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건가. 여긴 이스트포레스트야.”
“이런 넓고 한산한 공원만큼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짓을 저지르기 좋은 장소도 없죠.”
“정말로 자네는 어리숙하기 짝이 없군.”
그는 또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혼자서 무방비 상태로 있다고 생각하나?”
그 말을 듣고서, 나는 주변을 살폈다.
그제야 보이기 시작한 것들이 있었다.
하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드론.
산책객 사이에 끼어 있는 덩치들.
경비 안드로이드의 너무 잦은 왕래.
―렘브란트의 보호자들.
“자네 말대로야. 나는 꽤 예전부터 몇몇 조직들에게 목숨이 노려지고 있어. 습격도 몇 번인가 받았고.”
“…….”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내가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네. 유능한 경호원들 덕이지.”
그는 여유롭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자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걸세.”
중후한 목소리에는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물론 내가 보기에도, 어떤 식으로든 렘브란트가 위험에 처하는 광경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 오든.
그는 안전하다. 100%.
이래서야,
내 말에 설득력이 없을 수밖에.
“……협조는 역시 곤란하시겠죠?”
“그래. 자네의 주장엔 설득력이 부족했어.”
“……알겠습니다, 렘브란트 씨.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시면 그때는 말씀해 주십시오.”
“미안하군. 먼 곳까지 왔는데 성과도 없이 돌아가게 해서. 혹 바삐 돌아갈 필요가 없다면 점심이라도 같이하는 건 어떻겠나? 여기 공원 안에 제법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어서 말이지.”
렘브란트는 느긋하게 물었다.
내가 상관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타다닷―.
어디선가 분주한 발소리가 들렸다.
곧 내 옆을 작은 실루엣이 스치고 지나갔다.
소녀였다.
몸집이 자그마한 소녀가 장난스럽게 까르륵거리며 신난 뜀박질로 산책로를 달려 나갔다.
그리고, 타다닷―.
이어서 들려온 발소리.
“야, 거기 서!”
이번엔 소년이었다.
뒤쪽에서 튀어나온 소년이 나와 렘브란트를 피해 가려다, 투욱―. 우리와 살짝 부딪치고 말았다.
“으악, 죄송합니다!”
녀석은 부랴부랴 우리에게 사과한 뒤,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저 멀리 도망치는 소녀를 쫓아 달렸다.
“애들이 참 귀엽네요.”
“흠.”
“아, 그리고 실은 본사 측 업무 제휴 관련해서도 말씀드릴 게 조금 있거든요. 식사 자리에 함께하면서 천천히 이야기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늙은이랑 같이 밥 먹어준다면야 이쪽이 영광이지.”
렘브란트는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웃었다.
설득은 실패했지만,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식당은 여기서 먼가요?”
“500미터 정도만 가면 되네.”
이제는 플랜B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일단 지금은 직장 보스와 밥을 먹으러 갈 시간이다.
우리가 산책로를 빠져나와,
분수대 앞에 다다랐을 무렵.
헌데 바로 그 무렵에―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
뭔가 이상했다.
공원이 너무 조용했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단 한 명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렘브란트의 경호원들마저도.
“저기, 렘브란트 씨? 지금 뭔가……?”
뭔가 이상하다고 말하려 했다.
허나, 그러기 전에 입이 막혔다.
“……!?”
어느샌가 소리 소문도 없이 다가온 등 뒤의 그림자들이, 젖은 수건으로 나와 렘브란트의 숨구멍을 모조리 틀어막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처 저항을 해볼 새도 없었다. 렘브란트의 눈이 금세 감겨졌고, 나 또한 그와 똑같이 눈을 감았다.
맑은 날의 공원에서,
우린 그렇게 납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