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Time to Move On (4)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불현듯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달리고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차에 몇 번씩 부딪힐 뻔하며 큰길까지 허겁지겁 뛰쳐나가 택시를 붙잡고, 이미 한창 과속 중인 택시 기사를 더러 왜 F1 드라이버처럼 달리지 못하냐며 내리 보채고, 혼잡한 교통에 도로가 밀려 막히자 조마조마 떨다 못해 결국엔 택시에서 내려 멈춰 있는 차들 사이를 유례없는 뜀박질로 가로질렀다.
뚜루루루루―.
사무실에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불길한 연결음만이 울렸다.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겠지.
……제발. 아니어야 한다.
휴대전화를 한시도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가쁘게 숨을 몰아 뱉으며 쉴 틈 없이 내달렸다.
비로소 다다른 회사 건물. 굼벵이마냥 기어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대신 지체없이 계단 쪽으로 뛰었다. 한 번에 계단을 두세 개씩 넘어가며, 13층을 향해 정신없이 오르고, 또 올라갔다.
“헉, 허억……!”
그리고 13층.
윌슨앤코 사무실 앞.
“제발……!”
사무실 문을 부술 기세로 당겨 젖혔다.
쿠웅―!
문이 열렸다.
호흡이 정지했다.
….
….
눈에 들어온 것은―
평범한 사무실의 전경.
“……허…….”
조용했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이다.
“팀장님?”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스몰필드 씨?”
고개를 돌리자, 사무실 앞의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스몰필드 씨가 거기에 있었다.
“조금 늦으신다더니, 설마 이제야 오신 거예요?”
“…….”
“그래도 그렇지. 점심시간 다 끝나서 출근하는 게 어딨어요. 결재 밀려서 오전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구요. 다음부턴 콱 제가 도장 찍어 버릴 거예요, 진짜.”
그녀는 잔뜩 볼멘 어조로 말했다.
“근데, 왜 그렇게 숨을 헐떡대세요? 땀까지 엄청 흘리시고. 운동이라도 하고 오셨어요?”
나는 말하기 전에 잠시 숨을 돌렸다.
“그, 늦을까 봐 뛰어왔어요. 오면서 회사에 계속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아무도 안 받아서…….”
“저는 점심 먹으러 밖에 나와 있었는데요.”
“아…….”
“타이퍼도 지금 충전하는 중이라 못 받았을걸요.”
“그럼, 사장님은……?”
“당연히 아직 출근 안 하셨죠.”
아아,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허무함보다도 내심 다행이라는 마음이 더 컸다. 뒤숭숭한 내용의 꿈속에서 이 모든 게 사실은 꿈이란 걸 깨달았을 때와 비슷한, 일종의 후련한 기분.
“…….”
허나 기분만 그러할 뿐.
불안감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아까 전 사우스아치에서 홍룡파가 보낸 불한당들의 습격을 받았다. 놈들은 ‘유진 연’이나 ‘카이트’가 아닌 <윌슨앤코>를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스몰필드 씨. 사장님. 그리고 타이퍼.
회사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 아까 전의 나처럼 언제 어디서 습격을 받는다 해도 이상치 않다.
……그들을 지켜줘야 하는 걸까?
내 미래의 안전을 위해 윌슨앤코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지금까지는 그랬으나,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미스터 연.”
“저와 함께 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슐츠텍으로부터 받은 스카우트 제의.
나는 이제 윌슨앤코에 있을 필요가 없다.
더 나은 조건.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미래.
어느 면에서나 이쪽보다는 저쪽이 우월했다.
윌슨앤코를 떠나 슐츠텍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렴 누가 봐도 그랬다.
그런데도,
나는 왜 망설이는 걸까.
“…….”
나는 왜 여기까지,
죽을힘을 다해 달려온 걸까.
“스몰필드 씨.”
“네?”
“우리 회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그게?”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시면 돼요.”
“으음……. 별로 아무 생각도 없는데요.”
나는 싱긋 웃었다.
“저는 좋아해요. 우리 회사.”
진심만을 담은 미소였다.
“스몰필드 씨도 좋아해요.”
“……ㅇ누ㅖ?!”
“타이퍼도 좋아하고. 사장님도 꽤 좋아해요.”
3개월.
이 사무실에서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
짧다면 짧은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정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역시 거짓말이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니까, 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회사에서 오래오래 같이 일하고 싶어요.”
망설임의 끝에, 끝내 나는 결심했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지켜내기로.
“……팀장님. 오늘 왠지 좀 이상해요.”
“하핫, 좀 들떴죠? 늦게 출근해서 그런가.”
“……또, 어디 가시려는 거 아니에요?”
이 모든 게 사실은 꿈이란 걸 알면서도,
뒤숭숭한 꿈을 계속 꾸기로 마음먹었다.
“아뇨.”
왜냐하면.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아무 데도 안 갈 거예요.”
그게 전부다.
다른 이유는, 없다.
“뭔 소리예요. 외근 가셔야죠.”
“아.”
***
목요일 밤.
노스네스트 11구역.
“어이. 이쪽이야.”
비니를 쓴 2인조가 거리에서 합류했다.
“너도 애런 형님 호출이냐?”
“어.”
두 남자의 생김새는 사뭇 달랐으나, 같은 모양의 문신 자국이 목의 피부 둘레에 남아 있었다.
“작업 뛰러 나온 것도 참 오랜만이네.”
“아지트 습격당하고서는 처음이지. 그때 우리 애들 열 명 넘게 당했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랬지. 어우, 이 동네는 그새 또 오질라게 추워졌구만. 잠바 좀 두꺼운 거 입고 나올걸.”
왼편에 선 남자는 으슬으슬 떨며 본인이 걸치고 나온 얇은 재킷을 원망했다. 초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노스네스트의 밤은 설녀의 품처럼 서늘했다.
온 하늘을 천장처럼 뒤덮은 티타늄 결계막이 일부 구역을 제외하고는 365일 햇빛을 차단하기 때문도 있었고, 무엇보다 대기와 지반에 스며든 에테르 낙진이 정상적인 에너지 순환을 방해해 국지적인 이상기후를 발생시키는 점이 컸다.
“그나저나, 오늘 우리 뭐 하는 거래냐?”
“몰라. 형님은 별말씀 없으시던데. 너랑 나 둘만 부른 거 보면 딱히 별일 아니지 않을까?”
“물어보긴 했고? 난 문자만 받아서.”
“일단 카이트 씨 직통 명령이라고만 들었어.”
‘카이트’란 이름이 나오자, 오른편의 남자는 살짝 불편한 듯한 기색을 내보였다.
“스읍, 그렇단 말이지…….”
“보스 명령이라 부담스러워?”
“아니……. 사실, 난 그 사람이 우리 큰형님이 맞기는 한가,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자기 속내를 털어놓았다.
“뭐랄까, 예전에 데스트루퍼에 있었을 때는 그래도 뭔가 우리가 좀 잘나가는 날라리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근데 요즘은 그런 게 전혀 없으니까.”
“지금 조직 생활이 맘에 안 든다는 거야?”
“아, 물론 돈이랑 워라밸 많이 챙겨주고 그런 건 좋아. 좋긴 좋은데, 뭔가 좀 아니라는 거지. 우리 갱단 아직 이름도 없잖아. 애초에 갱단이 맞기는 한 거냐?”
“으음, 듣고 보니…….”
“솔직히 그 카이트란 인간도 두목으로 모시기에는 영 못 미더워. 뭐랬더라, 암귀? 하여튼 아주 무시무시한 흑마법사라고 하던데, 싸우는 거 본 녀석 얘기로는 마법도 <폭렬파> 하나밖에 못 쓴다고 하더라. 마나 출력만 좀 괜찮은 정도라나.”
“에이, 그래도 강하긴 하겠지. 러시안 하운드에 상하이맨까지 원큐에 족쳤다는데, 설마 약하겠어?”
“그거 다 그냥 소문이잖아. 직접 본 사람 한 명이라도 있대? 없어! 한 명도 없는 게 말이 되냐?”
“음…….”
“진짜로 소문처럼 강하다면 홍룡파쯤은 진작 정리하고도 남았겠지. 근데 보라고. 여태 쩔쩔매고 있잖아. 그 카이트란 놈, 실은 별것도 아닐지 몰라.”
어느새 그는 자기 조직의 보스 격 존재인 카이트를 ‘놈’이라 지칭할 정도로 낮춰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꽤나 합당한 하극상 같이 느껴질 만큼, 그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수다를 좀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 왔군.”
11구역 최외곽 경계지.
C구역으로 향하는 뒷길.
“여기서 있으라 했는데.”
두 남자는 노스네스트 구역 경계의 나직한 장벽 앞에서 한동안 담배를 태우며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잠시 후, 인적 하나 없는 골목에서부터, 누군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어엇…….”
두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뜻밖의 인물이 등장한 탓이었다.
“보, 보스……?”
검은 가면을 쓴 사내. 암귀 카이트.
두 남자가 몸담은 조직의 우두머리였다.
“기다리게 했나?”
“앗, 아, 아뇨! 저희도 방금 왔습니다!”
그들은 카이트, 유진을 보자마자 깍듯이 차렷 자세부터 잡았다. 수년간의 갱단 생활 덕에 이제는 완벽하게 몸에 익은 똘마니 행동 지침 중 하나였다.
“흠.”
유진은 두 똘마니의 외양을 훑었다.
방금 전까지 상사 뒷담을 하고 있던 이들은 바짝 쫄아든 상태로 보스의 시선을 힘겹게 견뎌냈다.
“고든.”
“예?”
“둘 중 어느 쪽이 고든이지?”
“아, 접니다!”
부리나케 손을 든 곱슬머리 남자에게, 유진은 들고 있던 알루미늄 케이스 하나를 넌지시 건넸다.
“받아.”
“어, 이건……?”
“오늘 쓸 준비물이야. 열어 봐.”
곱슬머리 남자는 유진에게 받은 케이스를 의아한 눈으로 살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바닥에 내려다 놓고, 잠금을 풀어 내용물을 보았다.
철컥―.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총이었다.
“우왓.”
다만―
뒷골목에 널린 평범한 총은 아니었다.
“보, 보스, 이거…….”
“슐츠 G-98 ″게베어″. 고든이란 친구는 중거리 정밀 사격에 능한 샤프슈터Sharpshooter라고 애런이 그러길래, 어울릴 만한 걸로 대충 가져와 봤어.”
게베어라 하면 슐츠의 고급 전술소총. 일반 총포상에서는 아예 구할 수도 없는 플래그십 장비다.
“그쪽이 헨리겠군. 맞지?”
“예, 옙! 저 맞습니다!”
“이건 슐츠 TOR ″토르″. 그쪽은 좀 더 막장으로 쏴 제끼는 코만도Commando타입이래서, 최대한 손맛 좋고 액세서리 잔뜩 붙인 놈으로 골랐는데. 어떻게 취향에 맞았으면 좋겠네.”
토르 역시 마찬가지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품.
둘 다 암시장에서 구하려고 한다면 최소 1만 달러는 쉬이 깨질 각오를 해야 하는 물건들이었다.
“너희 둘이 사격술로는 우리 애들 중에서 투탑이라고 들었어. 내가 사실 원거리 대응은 약간 후달려서, 오늘은 두 사람 역할이 아주 중요할 거야.”
“그, 저흰, 이제부터 뭘 하는 건가요……?”
곱슬머리 남자가 물었고,
유진은 뜸 들임 없이 답했다.
“홍룡파를 쳐부수러 간다.”
….
….
뭐지?
잘못 들은 건가?
“호, 홍룡파로 쳐들어간다고요……?”
“그래.”
“저, 저희 셋이서요……?”
“원래는 한 명만 부르려고 했는데, 단둘이면 좀 어색할 것 같아서.”
“…….”
“총기 상태 확인하고. 탄창 똑바로 챙겨.”
사색이 된 두 명의 똘마니 사이로,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갔다.
“움직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