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Time to Move On (3)
사우스아치 10구역.
제3공단 <신타케미컬> 공장.
“오랜만에 뵙는군요, 미스터 연.”
안전모를 쓴 정장 차림의 사내, <슐츠텍> 영업 담당자 알랭 그루너가 내게 악수를 청하며 반겼다.
“발목은 좀 어떠세요, 그루너 씨?”
“거의 다 나았습니다. 깁스도 풀었고, 걷는 데 지장은 없어요. 심한 운동은 아직 무리지만요.”
나는 다행이라 말하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의 발목을 빠개 놓은 범인으로서 상당한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으나 이내 무시했다.
“여기까지 직접 오시게 한 부분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제 쪽에서 따로 윌슨앤코로 찾아뵈려 했었는데, 일정이 도통 비지를 않아서요.”
“아닙니다. 어차피 저도 이 근처 물류창고에 방문할 예정이었거든요. 그보다 오늘은 무슨 일로……?”
그즈음, 복도 저편에서 공장 시설 관리인이 서류 파일과 차트를 들고서 알랭 그루너에게 다가왔다.
알랭 그루너는 나에게 양해를 구한 뒤 관리인과 잠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야기는 금방 끝났다.
“바쁘실 텐데 자꾸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저보다 그루너 씨가 더 바빠 보이시는데요. 마나 전지 생산이 늘어서 재료 조달하러 오신 건가요?”
“예. 오늘 현장 방문은 정제 공정의 안전성과 품질 관리 실태를 확인하고, 생산 효율화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려는 게 목적입니다.”
“그렇군요.”
<신타케미컬>을 추천한 건 당신이었죠. 좋은 업체를 소개해주신 것에 대해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슐츠텍 디스트리뷰션>은 판매 및 유통 전반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제품 생산 관리와 마케팅 등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죠. 다양한 방면에 유능하지 못하다면 성과를 내기 어렵습니다.”
돌연,
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미스터 연.”
알랭 그루너는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와 함께 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흠칫.
나는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예?”
“실은 최근에 제가 승진을 했습니다. 이번에 신규 부서 치프 매니저로서 새로이 팀을 하나 꾸리게 됐는데, 파트너 매니저가 한 명 필요해졌거든요.”
“…….”
“당신이 그 자리에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미스터 연.”
잠시 침묵.
이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니까 지금 저를, <슐츠텍>에서 스카우트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어안이 벙벙했다.
한참 동안이나 할 말을 찾지 못해 멍청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그, 왜 하필이면 저를……?”
“당신이 충분한 능력과 자격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 평가하기 때문이죠.”
알랭 그루너는 말했다.
“앞서 말씀드렸듯, <슐츠텍 디스트리뷰션>에서는 다재다능한 인재를 필요로 합니다. 포트폴리오 작성 등 기본적인 사무 업무에 능해야 하고, 영업과 소통 능력이 뛰어나야 하며, 해당 분야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 발로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을 체력, 그리고 윗대가리들을 설득할 만한 실적이 있어야 하죠.”
나는 가만히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미리 준비한 것처럼 잘 짜인 대사였다.
“당신은 슐츠의 제품들을 전문가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고, 커뮤니케이션과 업무 능력도 평균 이상으로 훌륭합니다. 군인 출신이기에 피지컬도 매우 믿음직스럽죠. 영업 실적 또한 부족하지 않습니다.”
“…….”
“거듭 말씀드리건대, 당신이 적임자라 봅니다.”
알랭 그루너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또다시 긴 침묵을 이어갔다.
“…….”
무지막지하게 달콤한 제안.
그러나 덥석 물 수는 없었다.
“……죄송하지만, 그루너 씨가 잘못 알고 계신 게 있습니다.”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비로소 나는 입을 열었다.
“저는 사실 군인 출신이 아닙니다.”
“…….”
“슐츠와 큰 거래를 터보려는 욕심에 저지른 거짓말이었습니다. 속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선 정직하게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그 사실들을 숨겼다가 나중에 걸려서 짤리기라도 한다면 그땐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게다가 창피한 얘기지만 어린 시절에 잡다한 범죄들을 저질렀던 몸이라, 교도소까지 다녀왔던 전과자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아마 그루너 씨가 생각하는 훌륭한 인재와는 거리가 먼 녀석일 겁니다.”
아예 있는 치부 없는 치부를 몽땅 다 드러냈다. ‘날 데려가지 마세요’ 하고 선전하는 꼴이다.
이쯤이면 분명히 질려서 욕지거리를 막 내뱉겠지. 나는 상대가 무슨 말로 나를 매도할지 상상했다.
허나―
“상관없습니다.”
돌아온 것은,
뜻밖의 한마디.
“……예?”
“당신 인생 이력이 어떻든 그런 건 궁금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당신에게 충분한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만 따지면 될 일이니까요.”
“…….”
“슐츠에는 쓸데없이 보수적인 윗대가리들이 쫙 깔려 있긴 하지만 그래도 능력주의 성향이 강한 편입니다. 디렉터 쪽에서 컷하려 들어도, 치프 재량으로 당신 한 명쯤은 막무가내로 영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회적 윤리 따위에 휘둘리는 머저리가 아니니까요.”
이번 역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진심으로 나를 자기 회사에 데려갈 심산인 듯했다.
“조금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혹시 지금 다니시는 회사에서 급여를 얼마나 받고 계십니까?”
“주급 3만…… 이 아니라, 월 2,700달러요.”
“대기업 매니저치고 대우가 썩 좋지는 않군요. 만약 저희 쪽으로 오신다면 경력직 대우로 연봉 기본급 12만 달러를 보장해 드릴 겁니다. 성과급과 스톡옵션 등은 당연히 별도고, 협상도 물론 가능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선 뺄 이유가 없다.
12만 달러다. 무려 연 12만 달러 이상의 고액 급여를 합법적으로(※중요) 받을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닌 <슐츠텍>이잖나.
실상 암흑가 깡패들의 똥통 기업이나 다름없는 가짜 대기업 윌슨앤코와 달리, 어스테이트에서 <아세아 그룹>과 함께 제일로 잘 나가는 진또배기 1등 기업. 현실 회사로 치면 애플이나 구글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경사다.
무엇보다 목숨이 안전해진다.
2주 안에 벌어질 <우드게이트 웨어하우스> 습격 사건. 윌슨앤코를 붕괴시킬지도 모르는 어두운 미래.
슐츠로 이직한다면 더는 그것 때문에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윌슨앤코가 조져지든 말든 다른 회사로 직장 옮긴 나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이라 이거다.
이직 후에 혹시 모를 불똥이 튀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이미 대비는 철저하게 해 두었다.
슐츠텍으로의 탈출은 그야말로 ‘유진 연 생존 계획’의 완벽한 마침표를 찍어줄 마지막 퍼즐이었다.
“어떻습니까? 이직할 생각 있으십니까?”
몇 번이고 말하겠지만―
여기선 뺄 이유가 없다. 조금도.
“…….”
그런데.
어째서일까.
“말씀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선뜻 답하기 망설여졌다.
“일단, 조금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오케이를 외쳤어도 됐다.
조금만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은 에둘러 표현한 거절이나 다름없었다. 상대도 그리 생각할 터였다.
“……알겠습니다. 추후에 연락 주시죠.”
알랭 그루너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결국 제안에 확답은 하지 못한 채, 나는 흐지부지된 밝은 미래를 곱씹으며 그곳을 떠나야 했다.
“후우우.”
아까 전 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치고 나올 때보다 더욱 큰 한숨이 입술을 뚫고 억지로 뿜어져 나왔다.
……난 대체 왜 이럴까.
어느 쪽이 이득인지 알면서도, 쉬이 그쪽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행동에 이렇다 할 설득력도 없다.
게임을 할 때도 나는 이런 식이었다.
무조건 정석대로 공략대로 진행해 가려고 했다가, 어쩔 때는 내 맘대로 내키는 대로 선택을 하곤 했다.
살아남는 게 목적이었을 텐데.
왜 굳이 어려운 길을 고르는 거냐고.
“쯧.”
나더러 들으라고 혀를 찼다.
아무튼 이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 설마 점심시간 다 끝날 때쯤에 출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
공장 근처 길가에서는 택시를 잡기가 어렵다. 적어도 공단 입구 쪽의 6차선 도로까진 나가야 한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반대편 큰 도로로 향하는 지름길인 골목길로 유유히 들어섰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습기 찬 곰팡내 나는 골목 어귀에서,
대뜸 웬 덩치 큰 사내놈들과 마주했다.
놈들은 하나같이 매서운 시선으로 나를 봤다.
분위기가 묘했다. 점심밥 먹고 단체로 연초 태우러 나온 공장 노동자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스윽.
어느새 덩치들은 내 뒤에도 있었다.
대부분은 맨손이었으나, 일부는 쇠몽둥이나 몽키 스패너 같은 애매하게 살벌한 연장을 들고 있었다.
숫자는 총합 스무 명.
장소는 너비 5미터도 안 되는 좁은 골목.
“흠.”
놈들의 표적이 나란 사실은 라면을 국물 속에 오래 놔두면 불어 터지는 것만큼이나 확실해 보였다.
나는 앞뒤에 진을 친 깡패 놈들을 한 바퀴 슥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슬쩍 입을 열어 말했다.
“혹시 대화로 해결하고 싶은 사람?”
“…….”
“없어? 아무도?”
야단났네, 이거.
하필 오후에 중요한 미팅이 있어 가지고.
“셔츠 더러워지면 안 되는데.”
내가 슬며시 혼잣말을 뱉은 순간.
놈들 중 한 명이 내게 달려들었다.
어쭈.
용감한데.
나는 그 주먹을 가볍게 피하고, 들고 있던 서류 가방으로 주먹 날린 놈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경추를 제대로 맞았는지 놈은 비틀거리는 일도 없이 그대로 자연스럽게 바닥까지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른 깡패 놈들은 첫 빠따로 뛰쳐나간 놈이 된통 당하는 장면에 당황하여 섣불리 덤비지 못했다.
“자, 한 번만 더 묻는다.”
“…….”
“대화로 해결하고 싶은 사람?”
넌지시 물었다.
놈들은 침묵했다.
“아직도 없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를 했다.
<강화>는 마나가 드러나지 않는 최소 출력.
항시 유지 상태인 <시상 강화>로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 등의 운동 능력을 보좌. 그리고 서류 가방의 강도만을 금속 수준으로만 강화시켰다. 괜히 다른 곳을 추가로 강화할 필요는 없었다.
정면에서 달려드는 놈의 명치에 펀치.
옆쪽에서 덤벼드는 놈의 인중에 손날 어택.
후방에서 내지르는 놈의 공격을 가방으로 받아치기.
스무 명의 깡패들을 조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만 힘 조절이 어려웠다. 코피라도 잘못 터뜨렸다간 셔츠에 핏자국이 묻는 대참사가 일어날 테니.
죄다 한 대씩 패주는데,
대략 1분쯤 걸린 것 같다.
열댓 명의 깡패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머지 놈들은 내 눈치를 살피다 곧 부리나케 도망쳤다. 구태여 쫓을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흐음.”
그건 그렇고.
숫자로 보나 인상으로 보나, 단순히 회사원 삥 뜯으러 온 뒷골목 양아치들은 아닌 것 같은데.
“야.”
나는 쓰러진 놈들 중 한 놈에게 다가갔다.
“끄으윽…….”
놈은 대꾸도 않고서 혼자 아픈 소리를 냈다.
“누가 보낸 거냐?”
“…….”
“거참, 아까부터 질문에 얌전히 대답하는 새끼가 한 놈도 없네. 설득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나는 놈의 손가락을 하나 쥐어 잡아 꺾었다.
“아아아아악!!”
놈은 고라니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악, 그, 그만……!”
질문을 두 번 하는 것보다는 손가락을 두 번 꺾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물론 같은 손가락을 두 번.
“호, 홍룡파야! 중국인 놈들이 시켰어……!”
“뭐?”
“위, 윌슨앤코란 회사에 다니는 인간을 족치라고 했어. 카이트란 놈의 끄나풀이 거기 있다고…….”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깡패들을 고용한 범인은 홍룡파의 새로운 보스 데이빗 웡이었군. 이런 백주대낮에 노스네스트도 아닌 사우스아치에서 다짜고짜 민간인을 습격하도록 지시한 미친놈이 누군가 했더니…….
….
….
잠깐만.
놈들이 노린 게 내가 아니라…… 윌슨앤코라고?
“아.”
사장님. 타이퍼. 스몰필드 씨.
다들 지금, 회사에 있을 텐데……?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