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I’m Only Sleeping (3)
수요일.
이날은 연차를 내서 조금 늦게 기상했다. 멜리에스의 강의는 오늘도 오후 2시에 치러질 예정.
오후 1시.
웨스트록 시내 역전에서 비너스(63)와 합류.
이후는 어제와 같았다. 녀석이 내 얼굴에 변장 마법을 걸어준 뒤, 차를 타고 샌마대로 이동했다.
“이 차 얼마 주고 산 거냐?”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요?”
“나도 자가용 한 대 뽑을까 해서.”
“으음, 이거 30만 키로 넘게 탄 중고라 엄청 싸게 업어 온 거긴 한데……. 아앗!? 그러고 보니 그쪽이 전에 내 차랑 완드 가져갔죠?!”
“어, 맞아. 그랬지.”
“씨이, 당장 내놔요!!”
“말본새가 별로다, 너?”
“……가 아니라, 아하하, 저어, 유진 씨? 혹시 이번 일이 잘 풀리게 되면은 그, 제 로마냐랑 바르베이라 완드, 돌려주실 수 있을까용……?”
“둘 다 지금 나한테 없는데.”
“……?”
“완드는 팔았고, 차는 어디 건물 지하 주차장에 받혀 놨는데 며칠 이따 가보니까 없어졌더라.”
“아…….”
“그렇게 금방 도둑맞을 줄 알았으면 폐차장에라도 갖다 팔아 버리는 건데. 아까워 죽겠네.”
“아니, 그거 10대밖에 안 나온 한정판 모델인데…… 인간적으로 좀 너무한 거 아녜요……?”
“너 인간 아니고 엘프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남의 것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죠!”
“니가 할 소린 아닌 듯.”
30분 정도 걸려 샌제이비어 마법학교에 도착.
기숙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서 곧바로 강의실이 있는 본관으로 향했다.
강의실에는 어제보다도 빈자리가 많았다.
나와 비너스는 전날과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유진 씨, 그동안 마법 공부 열심히 하셨나 보네요. 대학 강의에도 따라갈 정도라니.”
“별로 그렇게 열심히 하진 않았는데.”
“어제 강의 내용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이 안에 몇 명 있지도 않을걸요. 그 와중에 유진 씨는 교수한테 제법 날카로운 질문까지 날렸잖아요?”
“정보 차이야. 멜리에스 교수의 강의 커리큘럼은 10년 넘게 그대로라 강의 내용도 매번 똑같다더군. 인터넷을 좀 뒤져 보니까 어떤 블로그에서 예전 강의를 녹음한 오디오 파일도 다운받을 수 있더라.”
“과연, 그걸 들으면서 예습을 한 거군요?”
“아니. 따로 공부할 시간까진 없었어.”
“잉? 그러면요?”
“그 강의 녹음 파일 올린 블로그 주인장한테 연락해서 돈 주고 족보를 샀지. 시험 문제랑 퀴즈 답안지 같은 거. 교수한테 질문할 내용은 그거 훑어보고 대충 핵심만 간추려서 만든 거야.”
“……정보 차이라기보단 꼼수 차이 같은데요.”
“뭐, 자본 차이도 있고, 행동력 차이도 있지.”
오후 2시.
스테파노 멜리에스가 강의실에 입장.
“10주 차 강의를 시작하겠다.”
“…….”
“교재 160페이지 세 번째 문단부터다.”
역시나 수업 양상은 어제와 비슷했다.
멜리에스는 변함없이 어렵고 따분한 강의를 독고다이로 이어갔다. 그걸 듣고 앉아 있는 학생들은 학술적인 고문을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질문 있습니다, 교수님.”
그리고 나는, 기회가 올 때마다 어김없이 손을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거의 10분에 한 번꼴로.
이틀 동안의 강의에서 멜리에스 교수와 직접적인 소통을 시도한 학생은 오직 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눈도장은 확실히 찍은 셈이다.
“그럼 이것으로, 오늘 강의를 마친다.”
멜리에스가 교재를 덮고 교단에서 내려온 순간, 2시간짜리 강의가 드디어 끝이 났다.
나는 비너스를 포함한 다른 학생들보다 몇 발은 앞서 제일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복도 저편,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본관 출구로 걸어가는 늙은 교수의 뒷모습이 보였다.
“멜리에스 교수님!”
지금 놓치게 되면 답이 없었다. 나는 큰 목소리로 그를 부르고는 헐레벌떡 그쪽으로 뛰어갔다.
우락부락한 경호원들이 나를 막아서려던 찰나, 멜리에스가 가벼운 손짓으로 그들을 만류했다.
“자네는……?”
“유클리드입니다. 오늘 강의 시간 내내 교수님을 귀찮게 해드렸죠.”
그제야 멜리에스 교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본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댔다.
“또 나한테 질문할 것이 있어서 왔나?”
“맞습니다. 다만 강의 내용이랑 상관없는 주제라서, 이렇게 따로 찾아뵐 수밖에 없었네요.”
“그래, 이번엔 어떤 걸 물어보려는 겐가?”
“혼효 마법에 대해 조금 여쭙고 싶습니다.”
그 순간,
멜리에스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혼효 마법이라고?”
혼효 마법, 즉― 퓨저널.
한 종류의 언어로만 술식이 이뤄지는 일반적인 마법과 달리, 두 종류 이상의 언어로 지은 혼합 술식을 통하여 구사되는 특수한 마법을 뜻한다.
게임에서도 비슷한 시스템이 있었다.
마법사 캐릭터가 일정 레벨에 도달하면, 두 개 이상의 마법을 조합해 더욱 강력한 마법, 혹은 완전히 색다른 마법을 구사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를테면 <파이어볼>에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섞어 만든 <염뢰유성탄>이라거나.
아니면 <천리안>에 <엑셀러레이션>을 조합시켜 <이동식 감시 와드>를 사용할 수도 있었다.
“기존에 우리에게 익숙한 혼효 마법이라 함은 보통 비전 언어를 바탕에 둔 것이잖습니까? 그래서 정보도 대개 그쪽 중심으로 편향되어 있고요.”
“…….”
“제가 알고 싶은 건 신성 언어 기반의 혼효 마법들, 그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삼중혼효나 미스틱과의 결합식에 대해서입니다. 그 분야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교수님께서 세계 최고의 권위자이시지 않습니까.”
멜리에스는 피식 웃었다.
“내가 쓴 논문을 읽었나 보군.”
“외람되지만, 네. 조금 읽어 봤습니다.”
“혼효 마법에 대해서라……. 자네가 정확히 무슨 질문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질문을 한다고 해도 얘기는 길어질 수밖에 없겠군그래.”
나는 살짝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혹시 시간이 없으시다면…….”
“그러는 자네 시간은 어떤가? 노인네랑 떠드는 일에 청춘의 오후를 다 뺏겨도 괜찮겠나?”
“그거야…… 영광이지요, 물론.”
“허허, 특이한 친구로군. 자네 뜻은 알겠네. 사실은 나도 밤까지 여가가 좀 남아서 말이지.”
결과적으로―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지금부터 교수실에 갈 건데, 같이 가세나.”
***
오후 4시 11분.
신관 2동 수석교수실.
“들어오게.”
복도에는 경호원들이 쫙 깔려 있었다.
여기선 일을 저지를 생각을 하면 안 되겠군.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교수의 뒤를 쫓아 안으로 들어섰다.
마호가니 책상과 페르시안 카페트, 고급스러운 밤색 책장 등, 앤티크 스타일의 인테리어로 꾸며진 교수실은 대저택의 서재 같은 분위기를 띠었다.
“멋진 방이네요.”
“다른 것보다도 이 방은 위치가 참 좋지. 신관 주변은 교내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거든. 가끔씩 어디서 길고양이가 울어 대는 것만 빼면 말이야.”
그는 너털스럽게 웃었다.
“자네가 궁금하다는 게 무어라 했지?”
“신성 언어를 기반에 둔 혼효 마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교수님.”
시간 낭비를 꺼리는 강의 스타일에 걸맞게, 이번에도 멜리에스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보자, 내 강의를 들었다면, 신성 마법의 기초적 원리에 대해서는 거의 깨우치고 있을 테지?”
“아는 척 정도는 조금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담 한번 대답해 보게나. 신성 마법과 다른 마법의 가장 큰 차이는 뭐라고 보는가?”
“술식의 작동에 있어, 마력뿐 아니라 술사가 지닌 ‘신앙심’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겠죠.”
“정답일세. 신성 마법에는 다른 계통의 마법에는 없는 힘…… ‘신앙력’이 주된 요소로 작용하지.”
신성 마법, 즉― 디바인.
신성 언어로 쓰인 술식을 사용한 모든 마법을 뜻하며, 마법의 역사에 있어 비전 마법과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아주 유서 깊은 계통이다.
“‘신앙력’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신앙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힘’이야. 야훼, 부처, 알라, 어떤 신을 받들든 상관없지. 여러 명의 신을 믿는 힌두교 같은 것도 문제없어. 중요한 것은 신을 경배하는 마음. 그 마음이 얼마나 신실한지에 달려 있다네.”
“…….”
“신성 마법의 법력을 결정 짓는 것은 술식의 정교함이나 술사의 마력 출력량보다도 바로 이 ‘신앙력’의 세기에 크게 의존하지. 때문에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아무리 출중하다고 해도, 신을 믿지 못한다면 신성 마법을 조금도 제대로 다루지 못해.”
그때쯤.
멜리에스의 어조가 변했다.
“허나, 혼효 마법의 경우엔 얘기가 달라지지.”
마치 과거에서 미래로 온 사람처럼,
그의 눈은 한껏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술식을 합친다는 것은 과일들을 샐러드 그릇에 조리 있게 담아내는 것보다, 한꺼번에 믹서기에 넣고 돌려 뒤섞어 버리는 것에 가깝다네. 이는 술식 작동 원리에 극적인 변형을 불러일으키지. 술식에서 신앙력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부분을,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메꿀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렇다면, 신앙심이 충분하지 않아도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건가요?”
“지금까지의 신성 마법은 술사의 부족한 신앙력을 어떻게든 쥐어짜는 방향으로 술식이 만들어져 있었지. 하지만 혼효 마법을 이용한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 비전 마법과 마찬가지로, 신성 마법으로도 극도의 효율을 추구할 수 있는 거라네.”
멜리에스의 표정이 들떴다. 마치 자기 혼자 비눗방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어린아이처럼.
“신성 언어를 기초로 한 혼효 마법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얘길세.”
그 무렵 왠지, 감동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여든을 넘긴 노인일지라도, 꿈을 꾸는 눈빛은 별처럼 밝게 빛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서론이 길었군. 그래서, 질문이 뭐였지?”
뭐, 본격적인 대담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나는 없는 지식을 꾸역꾸역 끌어모아 교수에게 질문들을 날렸다. 멜리에스는 지치지도 않는지 매 질문마다 장문의 답변들을 돌려보냈다. 수도 없이 질문을 해도 처음 질문을 했을 때와 같은 태도, 같은 텐션이었다. 하여간 미친 체력의 노교수였다.
오후 7시.
어느덧 해가 저물어갈 즈음.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죄송합니다, 교수님. 제가 붙잡고 있던 바람에 저녁 식사도 제때 못 하시고…….”
“괜찮네. 어차피 끼니 제대로 안 챙긴 지 오래됐어. 논문 쓰고 연구하느라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잔 게, 거의 한 20년은 된 것 같군.”
“그러면, 이제 연구실에 가시는 건가요?”
“여기서는 못 하는 실험이 많으니까. 그런데 연구실이 따로 있는 건 어떻게 알았나, 자네?”
“마커스 선배한테 들었습니다.”
“누구?”
“마커스 선배요. 교수님 연구실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있는 선배인데, 어, 혹시 짜르셨나요?”
“모르겠군. 그런 녀석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 어떻게 일일이 기억을 하겠나. 능력도 없고 끈기도 없는 팔푼이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멜리에스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에 반해, 자네는 내가 최근에 본 학생들 중에 단연 가장 영리하고 인상 깊은 학생이야.”
“하하, 과찬이십니다.”
“빈말이 아닐세. 자네의 그 학구열, 요즘 같은 때에 그런 열정을 지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 하물며 다른 것도 아닌 신성 마법에 말이야.”
교수는 내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 자네가 관심이 있다면…… 내 밑에 연구생으로 들어오지 않겠나?”
왔다.
오고야 말았다.
“제가, 교수님 연구생으로요……?”
“그래.”
“저는 그게, 정식 학생도 아닌데요……?”
“걱정할 것 없네. 자네 같은 유능한 인재라면 청강생이 아니라 범죄자라 해도 데려갈 테니까.”
“…….”
“어떤가, 유클리드 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지금 상황은 딱 이거였다.
‘너, 내 대학원생이 돼라!’
일반 학생이라면 기겁하며 마다해야 할 권유.
하지만 오히려 나는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
내 임무는 스테파노 멜리에스를 죽이는 것.
연구생이 되어 잠입할 수 있다면 멜리에스를 은밀하게 암살할 기회를 얻을 확률이 올라간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교수님.”
“잘 생각했네. 후회하지 않을 걸세.”
멜리에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자네, 오늘 밤에 시간 있나?”
“지금부터 새벽까지라도 문제없습니다.”
“잘됐군.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연구실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