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One Shot at Glory (1)
목요일 오후.
윌슨앤코 사무실.
‘휴우, 다 했다아―.’
컴퓨터 앞에 앉은 리타 스몰필드는 마지막 엔터를 입력한 뒤 후련한 맘으로 기지개를 켰다.
금주까지 처리해야 할 업무는 이걸로 모두 완료. 이번 주말도 집에서 느긋이 보낼 수 있게 됐다.
‘흐흥. 오늘도 칼퇴근. 흐흐흥.’
그녀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요즘은 어쩐지 회사 다닐 맛이 났다. 강제 야근도 주말 출근도 안 한 지 오래 됐다.
회사 다니는 게 즐겁다고 한다면 그건 역시 과장이겠지만, 적어도 전처럼 평일 아침마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참, 내일 연차 쓴다고 말씀드려야지.’
이제는 반차나 연차를 쓰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조퇴-휴가 신청을 할 때마다 유진은 간단한 사유만을 물을 뿐, 그 이상의 토 달기는 일체 없었다.
“내일이면, 금요일 연차란 말씀이신 거죠?”
“아, 네. 치과 예약 때문에요.”
“알겠습니다. 처리해 둘게요.”
“넵,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스몰필드 씨까지 없으면, 내일 하루는 사무실이 텅 비어 있겠네요.”
잠시 침묵.
리타 스몰필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실은 저도 내일 연차거든요.”
“……네, 네에?”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요즘 비교적 한가해졌다지만, 유진이 자의로 연차를 써서 회사를 쉰다고? 그것도 주말을 앞둔 금요일에?
“아니지, 참. 타이퍼가 있었지. 걔 혼자 주말 내내 여기 망부석처럼 있어야겠네요. 하하.”
“저어, 팀장님? 내일 무슨 일 있으세요……?”
리타 스몰필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친구들이랑 놀러 가기로 했어요.”
“앗, 정말요? 어디 가시는데요?”
유진은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가, 입을 열었다.
“호캉스요.”
***
금요일 오전.
시에라시티 외곽 아우터필드Outerfiled.
어스테이트의 도시들 사이를 오갈 수 있도록 이어주는 도로망 ‘AS 하이웨이’의 35번 국도.
바다가 내다보이는 절벽 옆에 무한히 펼쳐진 2차선 도로를 따라, 나는 바이크를 타고 쭉 달렸다.
시야에 보이는 거라곤 하늘과 허허벌판뿐.
100번 이하 국도들은 이전 세기부터 대대로 내려져 온 살인적인 톨게이트 요금과 부실한 도로 관리 상태 덕에, 시간당 차량 통행량이 0에 가까웠다.
도시를 벗어난 지 약 1시간 즈음.
비로소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톤토 파라다이스 호텔>
도로 옆에 곶처럼 삐죽 튀어나온 절벽.
그 위치에 세워진 높직한 콘크리트 탑.
이 짓다 만 고층 호텔 건물은 수십 년 전 도시근교개발사업의 실패가 남긴 대표적인 찌꺼기다.
당초 100층까지 계획되었던 층고는 공사 중단으로 인해 반절도 채 쌓아 올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황무지 가장자리에 우뚝 솟은 높이 200미터의 콘크리트는 충분히 거대한 쓰레기였다.
부릉―.
나는 건물 입구 앞에 바이크를 세웠다.
거기에는 이미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어머, 늘씬한 오빠가 왔네.”
가무잡잡한 피부에 눈처럼 밝은 백금색 머리.
자기 몸매를 드러내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듯 군데군데 노출이 훤한 (굳이 따지자면) 밀리터리룩.
여자는 흰색 2인승 스포츠 세단의 문가에 기대어 선 채 요염한 눈빛으로 나를 스윽 훑어보았다.
“반가워. 오빠는 기관 쪽 사람?”
“…….”
“과묵한 타입이구나? 좋네. 잠깐 놀 파트너로는 아주 딱이야. 후훗, 첫인상은 마음에 들었어.”
그녀는 여왕님처럼 웃었다.
나는 계속 침묵을 유지했다.
“바이크 멋진데.”
“…….”
“야마자키 시노비 1000CX지? 튜닝도 많이 안 한 걸 보니, 얌전히 쏘고 다니는 스타일인가 봐?”
바이크는 애런에게서 빌려 온 것이었다.
렌터카는 기록이 남게 되니 이런 일에 쓰기 좋지 않았다. 매번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역시 슬슬 내 차가 한두 대쯤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혹시 그 가면은 계속 쓰고 있을 거야?”
“…….”
“오빠 얼굴 한번 보고 싶은데. 왠지 미남일 것 같단 말이지.”
나는 돌아서서 가면을 고쳐 썼다. 오늘 그녀에게 내 얼굴을 보일 일은 결코 없을 터였다.
“한 명이 더 있다고 들었는데.”
꼬맹이 쥬가 만들어준 이 맞춤 가면에는 목소리 변조 기능이 탑재돼 있었다. 덕분에 내가 낸 목소리는 배트맨이 내는 것처럼 노이즈가 껴서 들렸다.
“그러게. 우리 마법사 친구가 아직 안 왔네.”
“다른 한 명은 그쪽 동료인가?”
“아니. 그냥 예전에 같이 한 번 일한 적이 있어서, 서로 얼굴만 튼 정도랄까. 별로 친하진 않아.”
여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먼 도로를 보았다.
그리고 마침 그때, 내가 온 방향의 도로에서 한 차량의 형체가 천천히 우리 시야에 들어왔다.
헌데,
어째 그 모양새가 제법 많이 빠졌다.
탈탈탈탈탈―.
경운기 같은 소리를 내며 힘겹게 우리 앞까지 굴러온 것은, 전에 나도 신세를 진 적 있는 차량.
2인승짜리 경차.
알로이 비트였다.
“아이쿠우, 늦어서 미안해요―.”
작달막한 차에서 내린 이는,
캐주얼한 옷차림의 엘프 여성.
놀랍게도,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yjy343 님?”
“유진 씨, 흑마법사였군요.”
“소중한 심장이 더러워지면 안 되잖아요.”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과거의 기억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초록머리의 엘프.
틀림없다.
내 심장을 노렸던 마법사. 비너스다.
“아유, 정말. 오는 길에 차가 어찌나 막히던지. 아주 그냥 1미터도 앞으로 갈 수가 없어서, 중간에 한 30분은 그냥 시동 끄고 있었다니까요? 아핫.”
그녀는 과장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타고 온 차의 상태를 봐서는 차라리 중간에 엔진이 고장 나 버렸다고 하는 편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듯했다.
“안녕, 비너스.”
“어? 어어, 오우, 오랜만이네요? 미스 바렛.”
“그러게. 진짜 오랜만이다. 근데 자기, 차 바꿨어? 로마냐는 얻다 두고 웬 똥차를 끌고 왔대?”
“아, 아하하, 세컨카예용…….”
비너스는 밀리터리룩 여자의 공세에 매우 쩔쩔맸다. 그녀는 얼른 화제를 바꾸고 싶은 듯 보였다.
때마침 적당한 위치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녀석은 양손의 검지로 슉 내 쪽을 가리켰다.
“앗, 그건 그렇고, 여기 이분은 누구신지?”
……나를 못 알아보는 건가?
하긴 얼굴을 죄 가리고 있으니, 머리카락 색깔과 체형 정도만을 보고서 나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건 눈썰미가 코난급인 초인들이나 가능한 일이겠지.
“몰라. 누군지는 나도 아직 못 들었어.”
“그러면 그, 우리 다 같이 자기소개 타임이라도 한번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비너스의 제안에 밀리터리룩 여자가 수긍했다.
“나는 제인. 다들 ‘미스 바렛’이라고 불러.”
“저는 비너스라고 해요. 일단은 마법사구요. 보시는 것처럼 엘프랍니다. 나이는 스물셋이에요.”
그녀들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향했다.
“당신 이름은요?”
비너스가 물었다.
나는 말하기 직전 약간의 뜸을 들였다.
“유클리드.”
가면에 의해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그것은 내가 <사이버판타지>를 플레이할 때 캐릭터 닉네임으로 애용하던 이름이었다.
“흠, 유클리드라……. 철학적인 이름이네요!”
“바보. 유클리드는 철학자가 아니고 수학자야.”
여기선 굳이 내가 ‘카이트’란 사실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그 이름은 지금 너무 유명해졌으니까.
비너스 역시 카이트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카이트가 자색 마법을 쓰는 흑마법사란 소문을 들었다면, 분명 예전에 자신이 노렸던 바로 그 심장의 주인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 또한 알아챘겠지.
“흠흠, 어쨌든 만나서 반가워요!”
“…….”
“뭐어, 보니까 쓸데없이 친한 척하는 걸 극도로 꺼리시는 것 같은데, 괜히 그러지 말자구요. 이렇게 현장에 같이 있는 동안은 그래도 동료잖아요?”
전혀 예기치 못한 재회였지만,
어찌 보면 잘된 일이기도 했다.
그래, 정말로 좋은 기회였다.
안일한 대처로 어쭙잖게 살려 보냈던 실수를 바로잡을, 위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
“오늘은 잘 부탁드릴게요, 유클리드 씨.”
나는 비너스의 거짓된 미소를 바라보며,
이번에야말로 마무리를 짓겠노라 결심했다.
“거기, 잡담은 그쯤하고 슬슬 움직이지?”
그때 밀리터리룩 여자, 미스 바렛이 말했다.
“꾸물대지 마. 어느 똥차 씨가 늦게 오는 바람에 벌써 예정 시간보다 10분 오버라고.”
비너스는 자기 차는 똥차가 아니라고 혼자 구시렁대면서도 미스 바렛의 말에 얌전히 따랐다.
우리는 각자 타고 온 차량에서 짐을 꺼냈다. 미스 바렛은 트렁크에서 큼지막한 더플백을, 비너스는 조수석에서 얄따란 완드를, 그리고 나는 바이크 헬멧 보관함에서 얼린 생수병과 초코바를 챙겼다.
오늘 우리의 임무는 VIP 경호.
구체적으로는 VIP를 암살하기 위해 이 건물에 찾아올 용병들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당신들도 알다시피, 6시간 후 반 패튼이 탑승한 의전차가 요 앞 35번 국도를 지나갈 예정이야.”
“과연, 이 호텔은 일자 도로를 통과하는 차량을 저격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있는 거네요?”
“그래. 놈들이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자리를 잡아서, 오는 놈들을 역으로 저격해 주는 거지.”
첩보에 의하면, 암살 의뢰를 받은 용병들이 이 건물에 들르는 것은 앞으로 한 시간 뒤.
저격수 두 명. 폭발물 전문가 한 명. 마법사 한 명. 근접 전투 요원 두 명. 총 여섯 명이다.
“미리 말해 두겠지만, 오늘 당신들이 나설 일은 아마 없을 거야. 왜냐하면 내가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미스 바렛은 싱긋 웃었다.
“저건 빈말이 아니에요.”
건조한 시멘트 공기로 가득한 계단을 꾸역꾸역 오르는 동안, 내 뒤에서 비너스가 한마디를 던졌다.
“유클리드 씨도 들어는 봤죠?”
“…….”
“미스 바렛이란 이름 말이에요.”
녀석은 나와 대화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목소리도 변조되니까. 괜한 말실수로 특정당하지 않게만 조심하자.
“아니.”
“에엥? 몰라요?”
“들어본 적 없어.”
“하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쪽은 이쪽에 발붙인 지 얼마 안 됐나 보네요.”
“저 여자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가?”
“그야, 뭐어, 솔직히 인정하긴 싫지만, 미스 바렛이라고 하면 명백한 업계 톱레벨 중 하나죠. 그녀보다 실력 좋은 저격수는 시에라시티에 없어요. 그렇다고 떠벌리고 다니던 애들은 죄다 그녀가 쏜 총알에 눈알이 뚫려 버렸거든요.”
비너스는 옛날이야기를 하듯이 말했다.
나는 그녀의 얘기를 흘려들었다. 그렇게나 뛰어난 스나이퍼Sniper라면 게임 속에서 한 번 언급이라도 됐을 텐데, 그럼 내가 모를 리가 없잖은가.
NPC 추가 모드를 꽤 설치하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미스 바렛’이란 캐릭터는 없었다.
어쩌면 뭔지 기억도 안 나는 다른 이상한 모드에 덤으로 같이 실려 있던 캐릭터일지도.
하여간 지금 신경 쓸 상대는 아니었다.
신경을 써야 하는 인물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비너스였다. 그녀는 확실하게 나의 적이었으니까.
“좋아. 이쯤이면 되겠어.”
앞장서 가던 미스 바렛이 40층에서 멈췄다.
그녀는 방 하나를 골라잡아 그곳에 자리했다. 이어서 꺼내 놓은 것은, 사람 대가리에 쓰기에는 과분해 보이는 아주 큼지막한 대물 저격총이었다.
“그럼, 일 좀 해볼까?”
철컥, 스윽, 철커덕―.
그녀는 창가에서 저격 준비를 마쳤다.
“우린 뭘 하면 되지?”
“잠깐 쉬고 있어. 둘이 뭐 짝짜꿍이라도 하고 있든가. 너무 시끄럽게만 하지 말고.”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비너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대며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서 나 또한 아무 데나 가서 딱딱한 벽에 기대어 앉았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 채로,
그저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 1시간 정도일까.
“온다.”
미스 바렛이 무어라 속삭였다.
누구더러 들으라 하는 말은 아니었다.
“놈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