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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57화 (57/201)

57화. Dirty Deeds Done Dirt Cheap (2)

나는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간에서 비켜섰다. 렘브란트는 미소를 유지한 채 방에 들어왔다.

그는 가만히 뒷짐을 지고서, 꽤나 느긋한 동세로 모텔 방안을 스윽 둘러보았다.

“제법 아늑한 곳이군 그래.”

“미안합니다. 귀하신 분을 누추한 방에 모셔서.”

“무슨 소린가. 난 이보다 세 배는 좁고 다섯 배는 더러운, 집이라 부를 수도 없는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어. 이런 평범한 방에 침대 하나 놓고 사는 것이 한때 내 오랜 꿈이었지.”

분명히 이 도시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 중 하나인 존 렘브란트 버미어는 잠시 과거의 향수에 빠진 듯했다. 어쩐지 질색보다는 그리움이 강해 보였다.

“여긴 왜 오신 겁니까?”

나는 곧장 질문을 던졌다.

렘브란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금 뜸을 들였다. 평일 아침 시간을 전쟁 준비하듯 바삐 보낼 필요가 전혀 없는, 높으신 분 특유의 여유였다.

“자네, 최근에 멋대로 큰 거래를 텄던데.”

“슐츠 건 말씀이십니까? 그거라면 사장님 결재도 받았고, 윌인터 쪽에서도 문제없다고 이미…….”

“아니. 그것 말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중국인들이랑 맺은 거래 말일세.”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수출용 화물을 암거래 용도로 빼돌리다니, 그런 건 용납이 안 되지. 하물며 한두 박스도 아니고 컨테이너 몇 개를 통째로?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생각하지 않나?”

“……당신이었군요. 놈들이 물건을 옮길 때 그걸 습격하도록 지시한 사람이.”

“흠, 지금 보니 자네 꽤 다친 것 같은데.”

“예에, 간밤에 물건 거래 쫑나서 개빡친 중국인들한테 쿵푸로 몰매를 맞았습니다요.”

“그것참 미안하게 됐군. 고의는 아니었네.”

뒤통수가 얼얼했다. 설마 홍룡파와의 거래를 방해한 자가 아군 쪽에 있었을 줄이야.

아니, 생각해 보면 이 남자를 아군이라 판단하고 있었던 것부터가 내 실수였을지 모른다.

“밀항 건도 봐줬고, 내 사람을 마음대로 부려 먹은 것 또한 봐줬지만, 이런 경우까지 내가 봐줄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아주 오만한 착각이야. 팀장.”

“그래서, 제게 경고하러 오신 겁니까?”

“물론 한 번쯤 따끔하게 얘기해주려 하긴 했지. 하지만 오늘 자넬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어.”

렘브란트는 한껏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다네.”

나는 또다시 움찔했다.

아까 전 새벽에 식당에서 블랙 대거즈의 보스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토마와 마찬가지로, 렘브란트 역시 품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나한테 보여주었다.

사진 속 인물은 40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인간 여성이었다.

“이 사람은……?”

“바바라 엘리엇. ABC의 시니어 에디터지.”

“ABC라면, 방송국 말인가요?”

“그래. 텔레비전 뉴스 기자일세.”

ABC는 <아세아 그룹> 산하의 TV 방송국.

5년 연속 어스테이트에서 가장 신뢰도 높은 언론 1위로 꼽힐 만큼 영향력이 강한 보도사다.

“엘리엇은 여기저기 막 들쑤시고 다니는 언론계의 트러블메이커로 유명한데, 최근 윌슨앤코 내부 사정에 유독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말이지.”

“…….”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우리 회사 문제를 우리 회사 안쪽에서 해결하고 싶거든. 밖에서 왈가왈부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 특히 텔레비전에서는.”

다음으로 그가 꺼낼 얘기는 뻔했다.

“그러니까, 자네가 좀 해결해 주게.”

“……이 여자를 죽여 달라는 건가요?”

“이런, 내가 언제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했나? 아니지. 좀 더 세련된 방법이 있지 않겠나. 물론 그 방법을 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자네이고.”

솔직히 말해 ‘알아서 하라’는 지시는 내 입장에서 그리 썩 달가운 조건이 아니었다.

“좋은 성과 기대하겠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렘브란트는 방에서 나갔다.

이제 그는 롤스로이스든 개인 헬기든 기사 딸린 탑승물에 타고서 이 남루한 웨스트록을 떠나 삐까뻔쩍한 이스트포레스트로 돌아갈 것이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의 붕대를 풀었다.

상처는 많이 나아져 있었다. 이 몸뚱아리의 유일한 장점은 회복력이 빠르다는 점이었다.

이제 출근할 시간이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서. 모텔에서 회사로. 오늘도 그렇게 살아간다.

80명을 죽이고 돌아온 아침.

곧 2명을 더 죽이게 될 듯하다.

***

점심시간 1시간 전. 윌슨앤코 사무실.

오전 업무를 일찍 마친 나는 인터넷을 통해 의뢰받은 대상들의 정보를 조금 찾아보았다.

우선― 스테파노 멜리에스.

83세. 인간 남자. 디바인 마스터. 샌제이비어 국립마법대학교 이사장 겸 교수. 국제신성마법학회 113대 학회장 직위를 11년간 유지 중.

18년 전 멜리에스가 발표한 논문 ‘신성 언어를 기초로 한 혼효 마법의 이산적 재해석’은 당시 학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이후에도 수 편의 충격적인 논문들을 추가로 발표했다.

그리하여 마법학교의 평범한 노교수에 불과했던 멜리에스는 단숨에 지위가 격상해, 곧 신성 마법의 대가― 디바인 마스터라 칭해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졸라 대단한 마법사란 얘기.

“이런 걸 어떻게 죽이냐…….”

한숨과 신음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마스터’란 별칭이 붙을 정도면 마법사로서의 강함이 최소 가이우스급은 된다는 것.

<사이버판타지>로 치자면 최소 레벨 60.

캐릭터를 빡세게 육성한다 쳤을 때, 플레이 타임 300시간은 되어야 겨우 찍을 수 있는 레벨이다.

이제야 중급 마법사 수준을 간신히 뛰어넘은 나 따위 애송이가 과연 상대할 수 있을까.

사실,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부름>을 쓴다면 사람 한 명을 죽이는 것쯤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죽여야 하는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거기에 문제라곤 전혀 없었다.

악마의 벌레들은 쪼렙 양아치든 보스급 거물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를 공평하게 먹어 치운다.

설령 상대가 가이우스급 마법사라고 해도, 접근할 수만 있다면 죽일 수 있다. 100% 무조건.

“문제는 어떻게 접근하냐인데…….”

멜리에스는 마법계의 유명 인사.

주변은 늘 사람들로 넘쳐난다. 공식 행사 자리에서는 경호원들도 한둘이 아닐 테지.

멜리에스를 죽이고 무사히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조용한 장소에서 은밀하게 일을 진행해야 한다.

허나 면식 하나 없는 내가 그와 일 대 일로 대면하는 상황은 만들어내기 어려울 터였다.

“음…….”

짱구를 암만 굴려 보아도,

마땅히 떠오르는 묘수가 없다.

뭐, 어쩔 수 없지.

일단 멜리에스 건은 보류.

나는 탐색 대상을 바꿨다.

이번에는 바바라 엘리엇. 인터넷에 나와 있는 그녀에 대한 정보는 아무래도 유명 셀럽인 멜리에스만큼이나 풍부하고 자세하지는 못했다.

대신 그동안 엘리엇이 밀착 취재해 단독 보도로 내보냈던 뉴스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정치인들의 비리 폭로.

―거대 기업의 횡포 고발.

―뒷세계 조직의 정보 공개.

그녀는 커리어 내내 줄곧 ‘정의’라는 위험천만한 다리를 제집 복도마냥 건너다니고 있었다.

모두의 알 권리를 위해 암흑 속에 직접 기어 들어가 라이트를 비추는, 보기 드문 참된 기자였다.

죽어서는 안 되는,

선량한 시민이었다.

“…….”

그때쯤.

온갖 생각으로 들끓고 있던 머릿속이 아드레날린 분비가 멈춘 듯 차갑게 식어 버렸다.

바바라 엘리엇은 윌슨앤코를 노리고 있다.

이 회사의 썩어빠진 정체가 탄로 나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회사와 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엘리엇을 죽일 이유는 충분하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망설여진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어젯밤 80명을 죽일 때도, 죽이고 난 후에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성도 합리도 뭣도 없는 모순적인 판단.

머리를 싸매면 싸맬수록 현실감이 동동 떠올라 남의 것처럼 되어 버려, 결국 담배를 물었다.

두 달만의 연초였다.

“스읍.”

13층 복도. 창밖을 바라보며 연기를 마셨다.

잿불은 빨간 히아신스처럼 피어올랐다가, 이내 낙엽처럼 회색으로 바스러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후우.”

뱉은 연기는 하늘로 흩어졌다.

머릿속은 아주 조금 맑아졌다.

해야 할 일에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찝찝함 따위는 잠깐 모른 척하면 될 뿐이니.

나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려던 즈음, 현관 옆 회사 우편함에 들어가 있는 컬러 잡지책이 눈에 밟혔다.

뭔가 하고 꺼내서 봤더니,

<슐츠텍>의 카탈로그였다.

“흐음.”

어쩐지 약간 흥미가 생겼다. 점심 전에 머리도 식힐 겸 자리로 갖고 와 살짝 훑어보았다.

“뭐 읽으세요, 팀장님?”

그즈음 화장실을 다녀온 스몰필드 씨가 내 쪽으로 다가와 머리를 기웃대면서 물었다.

“아, 슐츠에서 보낸 카탈로그예요.”

나는 스몰필드 씨가 볼 수 있도록 잡지의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엔 새로 출시한 최신 사양의 안드로이드 제품들을 소개하는 내용이 있었다.

“안드로이드, 새 걸로 들여놓으시려구요?”

“설마요. 예전 같으면 고민 좀 했겠는데, 요즘은 그렇게까지 일손이 부족하지도 않고, 게다가 저희 사무실에는 이미 저 녀석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나는 바로 옆자리에 멍청히 앉아 있는 고물 안드로이드, 타이퍼를 가리켰다.

「나니니시마스까?」

스몰필드 씨는 약간 안도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안드로이드 마니아인 그녀는 초창기 안드로이드인 타이퍼에게 특히나 애정을 품고 있었다.

“뭣보다 무턱대고 새 걸 들여놓기엔 최신 제품이 너무할 정도로 비싸가지고, 감당이 안 돼요.”

“아, 그쵸. 요즘 파는 안드로이드 가격은 차값을 넘어 거의 집값 수준이니까요.”

“그래도 슬슬 파츠 업그레이드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 나온 김에 지금 슐츠 쪽에 한번 문의해볼까요. 어디, 전화번호가…….”

그때 스몰필드 씨가 말했다.

“공식 서비스센터에서는 안 받아줄걸요?”

“예?”

“타이퍼는 단종 된 지 한참 됐으니까요. 구세대 모델까지 취급하는 사설업체에 맡겨야 될 거예요.”

“아하, 그렇군요…….”

“팀장님 바쁘시면 제가 대신 알아볼까요?”

“음, 저보다는 스몰필드 씨가 훨씬 잘 아시니까 그러는 편이 낫겠네요. 부탁 좀 드릴게요.”

그녀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잡지책을 덮었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었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저번에 봤던 그 가게가 괜찮던데.

스몰필드 씨도 같은 의견이었지, 아마.

사장님은 언제쯤 출근하시려나. 그러고 보니 사장실에 물 줘야 하는 화분이 어느 거였더라.

영양가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허나 그런 하찮은 방향으로 정신력을 소모하는 것이 오히려 내 기분을 나아지게 했다.

나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일상을 부숴야만 한다.

나는 준비가 되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

오후 8시.

노스네스트 3구역 펍 미드나이트.

“왔구만, 카이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른 시간치고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주인장이 나를 반겼다.

“졸려 보이네, 주인장.”

“으으음, 폭주족 땜에 잠을 설쳐서.”

“그나저나 웬일로 여기 손님이 없대?”

가게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며칠 전 그 많았던 손님들이 다 어디로 간 건지, 주인장 혼자 외롭게 바를 지키고 있었다.

“거야, 오늘은 원래 쉬는 날이니까.”

“쉬는 날인데 가게를 왜 열었어?”

“자네가 온다고 하길래 열었지.”

뭔가 기묘한 대답이다.

“내가 온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데?”

“옆 동네서 아는 놈들이랑 마시고 있는데, 어떤 하이바 쓴 양반이 와서 쪽지로 알려줬어.”

“…….”

블랙 대거즈의 헬멧 쓴 녀석. 따봉맨이다.

그놈들 진짜로 날 스토킹하고 있나 보구만.

“그래서 술 먹다 말고 급하게 온 거지.”

“금쪽같은 휴일을 버리게 해서 미안하군.”

“뭐어, 어차피 여자 없는 자리라서 재미도 없었고. 자네한테 전할 말도 있었으니까.”

“전할 말이라니?”

“자네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3등급짜리 의뢰가 드디어 이쪽에 하나 들어왔걸랑.”

“그래? 어떤 건데?”

주인장은 씩 웃으며 말했다.

“암살 의뢰야.”

제기랄.

또 암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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