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Dancing for Money (5)
오후 1시.
<슐츠 테크니컬 스타디움>.
메인 홀 객석에는 각국 정부군의 고위 관료들과 유명 PMC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오늘 슐츠의 비공개 발표회는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언제나 ‘혁신’을 강조하는 슐츠인 만큼, 이번에는 또 어떤 근사한 ‘혁명적 신제품’을 보여줄 것인지 하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발표 시간이 되자,
회장의 불이 모두 꺼졌다.
―틱.
잠시 후.
무대 조명이 밝혀졌다.
사람들은 환해진 공간을 주목했다.
무대 구석에는 어느 틈에 놓았는지도 모를 옷장 하나가 생뚱맞게 그곳에 자리해 있었다.
이어서, 한 남자가 무대 위에 나타났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금발 동양인 남자였다. 옷깃에 무선 마이크가 연결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오늘 시연회의 발표자인 듯했다.
프로젝터 스크린에 불빛이 들어왔다.
화면에는 ‘suit’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저는 지금 ‘슈트’를 입고 있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발에 딱 맞는 구두. 허리에 착 붙는 바지. 감각적인 셔츠와 재킷. 이런 게 바로 ‘슈트’죠.」
편안하면서도 똑 부러진 발성과 음색.
그야말로 단점 하나 없는 목소리였다. 청중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발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벌써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오늘 저희가 발표할 새로운 제품은…… 슈트입니다.」
「슐츠는 지금까지 수십 가지 이상의 배틀슈트를 출시했습니다. ‘아머 시리즈’를 필두로 한 슐츠의 전투강화복 라인업은 현존 최고의 제품들이죠.」
「그런데, 우리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팔고 있는 슈트는.」
「정말로 슈트가 맞는 걸까?」
거기서 짤막한 뜸을 주었다.
정적 틈에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슈트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핏’입니다.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이 맞춤 정장처럼, 착용자의 몸에 딱 맞아야지만 비로소 슈트라 부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때,
스크린 화면이 바뀌었다.
「경쟁사의 제품을 살펴보겠습니다.」
화면에 띄워진 것은 전신에 슈트를 착용한 어떤 군인의 이미지.
슈트의 크기가 워낙 거대하여, 군인의 몸집은 세 배 정도 불어난 것처럼 보였다.
「<스테이트 아머리>의 ‘고질라 스킨’입니다.」
「전투강화외골격, 그들은 ‘엑소슈트’라고 부르는 장비죠. 현 시장 베스트셀러 중 하나입니다.」
「기본 무게 339kg. 추가 배터리 장착 시 총합 무게는 380kg. 가로세로 길이 155cm/218cm.」
「척 보았을 때 어떤 느낌입니까?」
「너무 무겁고, 너무 뚱뚱합니다.」
「이런 건 슈트가 아니죠.」
화면이 조금 바뀌었다.
거대한 슈트를 착용한 군인 이미지 옆에, 조끼 하나를 걸친 사람의 일러스트가 띄워졌다.
「이번에 공개할 저희 신제품의 스펙입니다.」
「무게는 놀라운 3.5kg. 배터리 장착 필요 없음. 가로세로 길이 39cm/60cm.」
숫자만을 언급했을 뿐인데도,
장내가 마구 들썩이기 시작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이런 게 바로 ‘슈트’죠.」
남자는 무대 한쪽에 있던 옷장으로 다가갔다.
그가 옷장 문을 열고, 거기서 덮개가 씌워진 옷걸이를 꺼내자, 사람들의 환성이 터져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배틀슈트’입니다.」
그는 옷걸이에서 덮개를 치웠다.
옷걸이에 걸린 것은 흑진주처럼 연한 회색빛이 감도는, 검정색 조끼 형태의 재킷이었다.
「오늘 저희는 기존에 존재했던 배틀슈트의 정의와 기준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고자 합니다.」
「여행을 갈 때 옷가방에 꾸려 넣을 수 있는―」
「작고 가볍지만 가장 뛰어난 성능을 내는―」
「남녀노소 누구라도 손쉽게 착용 가능한―」
「이것이야말로 슈트의 미래, 미래의 슈트죠.」
「우리는 이 슈트를 이렇게 부르기로 했습니다.」
화면에는 얇고 큰 폰트로 쓰인,
‘NOVASUIT’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진짜 슈트이자 새로운 슈트.」
「‘노바슈트’입니다.」
남자가 말을 마친 그 순간.
객석으로부터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오케이. 아직까진 분위기 좋아.’
발표 중인 남자, 유진은 심호흡을 했다.
리허설도 없이 대본만 대충 외워 얼렁뚱땅 투입된 것치고는 상당히 선방 중이라고 보았다.
1차 프레젠테이션은 종료.
이제 남은 것은 기술 시연뿐.
「그럼, 지금부터 제가 직접 이 ‘노바슈트’를 착용해, 배틀슈트로서 ‘노바슈트’의 성능을, 실전을 위시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진이 그렇게 말한 직후.
지이잉―.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외벽이 내려가며, 무대 너머로 드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이곳은 택티컬 레벨 4 이상의 강화복과 외골격 테스트에 쓰이는 표준 훈련장입니다.」
「대인전술무기가 탑재된 슐츠의 2세대 전투형 안드로이드 ‘왓치맨’이 다섯 기 배치되어 있죠.」
「일반인인 제가 노바슈트를 착용함으로써 슈퍼솔저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남기고 유진은 슈트를 입었다.
슈트를 조끼처럼 셔츠 위에 걸치자, 잠시 후 중앙 부근의 문양에서 미약한 푸른 불빛이 번쩍이더니, 이내 옷감 틈새로부터 나노 가공 탄소 섬유가 계단처럼 쌓아지며 유진의 전신을 차곡차곡 감쌌다.
머리 부분의 강화복은 헬멧 형태로 보호됐는데, 카메라에 증강현실 기술이 적용되어 있었다.
[ system checking ]
[ userdata linkage on ]
[ battery fully charged ]
[ verification all complete ]
[ NOVASUIT is running · · · ]
메카물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서 볼 법한 시스템 메시지들이, 시야 가운데로 좌르륵 흘러나왔다.
‘오오.’
유진은 속으로 감탄사를 뱉었다.
꼭 아이언맨 슈트를 입은 기분이었다.
[ 로딩중 · · · ]
[ 로딩중 · · · · · · ]
[ 로딩중 · · · · · · · · · ]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 디스크 손상! ]
[ 치명적인 오류를 감지했습니다. ]
왠지 빨간색으로 되어 있는,
불길한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응?’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소프트웨어 가동 실패 ]
[ 무선 네트워크 연결: 정지 ]
[ 외부 충격 흡수 기능: 정지 ]
[ 사용자 근력 강화 기능: 정지 ]
연속으로 출력된 빨간 메시지들.
유진은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이거, 고장 난 건가?’
시연 제품은 어디까지나 일회용 프로토타입.
성능을 보여주는 용도에 치중하여 제작한 물건이기에,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디스크 손상이라면, 아까 가방 찢어져서 떨어뜨린 게 문제였나…….’
현재 착용한 슈트에는 알랭 그루너의 가방에 있던 소프트웨어 가동용 디스크를 꽂아 넣은 상태.
아무래도 그 디스크에 손상이 생겨, 슈트 기능에 통째로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유진이 슈트에 발생한 문제의 원인을 깨달았을 바로 그 무렵.
철커덕, 위이잉―.
어느새 무대는 이미 콘크리트 벽과 아스팔트 바닥이 늘어선 전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이내, 살상 모드의 전투형 안드로이드 다섯 대가 유진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흠.’
지금 입고 있는 슈트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맨몸으로 2세대 안드로이드 5기를 해치워야 하는 상황.
‘좀 위험한데.’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었지만,
유진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뭐, 안 들키면 되겠지?’
그는 슈트와 전신에 <강화>를 둘렀다.
보라색 마력이 겉으로 비치지 않을 정도의, 매우 약한 강화를.
‘대본에서는 여기서 5분 정도 싸우라 했던가.’
물론―
로봇 따위를 때려잡기에는 넘쳐흘렀다.
‘최대한 질질 끌어야겠네.’
***
그것은 단 1분짜리 영상이었다.
노바슈트를 입은 유진이 5대의 안드로이드를 상대로 테스트 전투를 벌이는 영상.
알랭 그루너는 그 영상을 보았다.
같은 자리에서,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
시연회 발표 직후.
그는 당시 노바슈트에 탑재됐던 디스크가 고장이 나 있었던 것을 현장 관계자로부터 확인했다.
‘슈트는 기능 정지 상태였어.’
영상 내내 유진이 착용한 노바슈트 가슴 부분의 문양에는 푸른색 불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이는 배터리가 없거나 아예 소프트웨어가 기동 자체에 실패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건…….’
슈트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을 터.
허나 유진은 맨몸으로 2세대 안드로이드 다섯 대를, 상처 하나 없이, 고작 1분 만에 박살 냈다.
그 탓에 노바슈트의 원래 성능보다도 훨씬 압도적인 모습을 바이어들에게 보여주고 말았다.
선주문은 예상보다 40% 이상이 들어왔지만, 알랭 그루너는 마냥 기뻐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래서야 과대광고를 해 버린 셈이니, 나중에 그만큼 클레임 건수도 늘어날 테지.’
발표회 때 생긴 트러블은 본인의 실책.
이를 상쇄할 만한 추가 실적이 필요했다.
‘후.’
그래.
다른 방법은 없었다.
「예, 윌슨앤코입니다.」
“슐츠텍의 알랭 그루너입니다.”
「앗, 그루너 씨. 다리는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업무에 지장 줄 정도는 아닙니다.”
「다행이네요. 헌데 무슨 일로 연락 주신 거죠?」
“전에 그쪽에서 말씀 주신 건, 다시 한번 만나서 천천히 시간 들여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만.”
무엇보다도 그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기에.
“지금 찾아뵐 수 있을까요, 유진 연 씨?”
***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었다.
<슐츠텍>과의 위탁 생산 계약 성사.
<윌슨앤코 인더스트리>와 기타 하청업체들의 장비 제조 공장 라인도 전량 확보 완료.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완벽한 성공. 퍼펙트게임이었다.
나는 목발을 짚은 그루너 씨를 택시로 배웅하고, 후련해진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뒤, 부릉―! 하는 소리와 함께 바이크 한 대가 달려오더니 내 앞에 멈춰 섰다.
“수고했어.”
나는 품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바이크를 타고 있는 자에게 건넸다. 이번 일의 수고비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
“토마였나? 너희 보스에게도 안부 전해줘.”
헬멧을 쓴 바이커가 엄지를 척 올렸다.
이내 바이크를 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엔진 소리의 잔향은 도플러 효과로 오랫동안 남았다.
“후우.”
그루너 씨에겐 참 미안한 일이 됐다.
원래는 가볍게 은혜만 입힐 셈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발표회 현장까지 망쳐 버리고 말았으니.
뭐, 그도 비즈니스맨이라면 이해해줄 것이다.
발목뼈 하나로 연 6,000만 달러짜리 실적이 생겼으니까.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할 일이지.
물론 나도 그의 희생에는 감사하고 있다.
중국인들 또한 그럴 것이다. 그들이 알랭 그루너 씨의 발목이 이번 일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게 된다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지도 모른다.
“자, 그럼.”
어쨌든 간에.
물건을 구했으니.
“영업 뛰러 가볼까.”
이제―
고객을 만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