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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43화 (43/201)

43화. Play The Game (3)

소년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렇지만 놀라기는 했을 것이다.

“지금, 소원을 이뤄주겠다고 하셨나요?”

“그래.”

사기꾼이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상대의 머릿속이 어지간히 꽃밭이 아닌 이상, 소원 들어준다는 얘기에 넘어갈 리는 없을 테니.

다만, 나는 지금부터 사기를 칠 생각이다.

상대가 알면서도 넘어가 줄, 궁극의 사기를.

“어때, 얘기 들어볼 생각 있나?”

나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소년은 잠시 말없이 있었다. 잠시 후, 녀석은 분수대 광장을 슥 돌아보았다.

“여긴 사람이 너무 많네요.”

“장소를 옮길까?”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나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러자,

사람들이 없어졌다.

“……?!”

말 그대로 일순이었다.

방금 전까지 주변을 가득 에워싸고 있었던 수많은 인파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지워졌다.

“뭐야……?”

광장은 한순간에 공허해졌다.

텅 빈 공간에서 들려오는 것이라곤 분수대의 물줄기가 서로 부딪혀 흩어지는 소리뿐이었다.

인기척이 없다. 아무것도 없다.

손을 뻗어도 만져지는 것은 공기뿐.

눈속임 따위가 아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사라졌다.

“자, 이제 얘기하셔도 돼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도무지 상황을 짐작기 어려웠다.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건, 녀석이 ‘뭔가를 했다’라는 것 정도.

“……너도 에스퍼였군.”

“이런, 놀라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여기 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제가 가르쳐드릴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요.”

호기심보다도 두려움이 앞섰다.

만약 녀석이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나 또한 핑거 스냅 한방에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는 걸까.

“얘기, 안 하실 건가요?”

솔직히 조금 떨린다. 나는 지금 타노스를 상대로 밑도 끝도 없이 야부리를 털어야 하는 입장이다.

주둥이로 우주를 구하는 건 무리겠지만,

내 몸 하나 구하는 정도는 할 수 있을 터.

“……일단, 먼저 말해 두지.”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서,

입을 열어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암귀가 아니야.”

소년은 반응이 없었다.

어찌 보면 그것 자체가 반응이었다.

“너희들이 추종하는 암귀, 10년 전 이 도시의 모든 마법사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는 희대의 살인마. 나처럼 자색 마력을 가진 흑마법사였다지?”

“…….”

“안된 얘기지만 나랑 암귀는 아무 관련도 없어. 내가 흑마법을 깨우친 건 이제 한 달밖에 안 됐고, 마력 색채가 같은 것도 그저 우연일 뿐이야.”

처음 암귀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어쩌면 내가, ‘유진 연’이 정말로 그 무시무시한 살인귀였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암귀는 8년 전 크리스마스에 돌연 모습을 감췄다고 한다. 그리고 ‘유진 연’이 감옥에 들어간 것도 딱 8년 전. 왠지 기이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허나, 실상은 그것이 단지 우연임을 말해줬다.

‘유진 연’이 징역살이를 하게 된 이유는 살인 때문이 아니었다. 살인은커녕 여기저기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힌 유상무상 잡범에 불과했다.

“너희들이 찾고 있는 작자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진 몰라도, 나는 아니란 얘기지.”

“의외로 정직하시네요.”

“사실 그렇지만도 않아. 내가 이걸 털어놓는 이유는 그냥 속일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거니까.”

내가 암귀인 척 열심히 연기를 해 봤자, 진짜와 가짜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는 없을 터.

게다가 놈들은 이미 내 인적 사항까지 알고 있으니, 연기란 게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블랙 대거즈의 목표는 마법사를 멸종시키는 것. 그 염원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모든 마법사들을 죽일 흑마법사― 암귀의 존재지.”

“…….”

“다시 말하겠지만, 나는 암귀가 아니야.”

놈들을 속이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속일 대상을 바꾼다.

“하지만 너희는 암귀를 원하지.”

놈들을 속이는 대신,

놈들 이외의 모두를 속인다.

“그러니까― 나를 암귀로 만들면 돼.”

소년은 반응이 있었다.

이번만큼은 확실하게 놀랐다.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야. 지금부터 내가 암귀인 척을 하는 거지. 너희 블랙 대거즈는 그걸 돕는 거고.”

“당신이 암귀 행세를 하고 다닐 동안, 우리더러 바람잡이 역할을 맡으란 건가요?”

“이해력 좋네.”

그동안 차근차근 밑밥은 깔아뒀다.

은은히 퍼진 소문을 통해, 이미 뒷골목에서 ‘카이트’란 이름은 자연스레 ‘암귀’와 연결되고 있다.

“나는 이제부터 ‘카이트’로서― ‘암귀’로서 활동한다. 암귀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진 루머에 그치고 있지만, 블랙 대거즈 정도 되는 거물급 단체가 암귀의 복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면…… 도시 전역에 어마무시한 충격을 선사하게 되겠지.”

“…….”

“내가, ‘유진 연’이 ‘카이트’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지금으로선 너희뿐이야. 우리가 협력해서 그 사실만 잘 숨긴다면 진실이 들통날 일은 없어.”

나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이내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당신을 돕는다는 건, 당신도 저희를 돕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뭐, 그렇지.”

“우리는 테러리스트예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될 겁니다. 비단 마법사만 죽이지도 않을 거예요. 필요하다면 누구든, 선량한 사람이라도 죽이겠죠. 저희를 돕는다는 건,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겁니다.”

“왜, 내가 못 할 것 같나?”

“정말로 할 수 있으신 건가요?”

녀석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도 알겠지만 암귀는 미치광이 살인귀였습니다. 나이, 종족, 직업, 그 무엇도 가리지 않고 사람이란 사람은 족족 죽여 대곤 했던 괴물이었죠.”

“그래서?”

“아까 전에 당신은 폭탄이 터지는 걸 막으려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시더군요.”

“…….”

“그건 괴물의 모습이 아닙니다. 미치광이 살인귀와도 거리가 멀죠. 당신은 인자한 바보에 가까워요. 그것도 자기가 바보인 줄도 모르는.”

나는 침묵했고, 소년은 계속 말했다.

“만약에 당신이 암귀임을 증명하기 위해, 아까 그 꼬마 같은 어린아이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나는 다시 침묵했다.

“아이를 죽이실 건가요?”

침묵이 길수록 신용도는 낮아진다.

복잡한 대답이어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게 허용된 대답은 오로지 긍정 혹은 부정뿐.

고민할 시간도 없이,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아니.”

허세로 둘러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원하는 대답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인지 그렇게 느꼈다.

소년은 말이 없었다.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녀석의 속내는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당신은 암귀를 만난 적이 있나요?”

“뭐?”

“왠지 그랬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만나 봤을 리 없잖아. 애초에 난 암귀란 게 뭔지 들어보지도 못했어. 최근에야 처음 알았다고.”

“저는 암귀를 만난 적이 있어요.”

나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년은 잔잔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예전 일이라 기억은 잘 안 나요. 그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덩치가 컸는지 작았는지,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은 하나도 없죠.”

“…….”

“단지, 그가 저를 죽이지 않고 살려줬다는 것.”

오로지 그것만을 기억하고 있다고―

녀석은 혼잣말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암귀를 보고 살인에 미친 악귀라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

“아무나 죽여 대는 것만으론 절대 암귀가 될 수 없어요. 그건 그냥 널리고 널린 연쇄살인범일 뿐이니까요. 찰나의 두려움이 아닌 절대적 공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선, 지성과 필연을 갖춰야만 하죠.”

소년은 나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라면, 문제없을 것 같네요.”

녀석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블랙 대거즈의 토마, 그리고 모든 단원들의 이름을 걸고, 당신을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어깨 옆을 스쳐 지나가며, 바람처럼 속삭였다.

“이제 당신이― 우리의 암귀입니다.”

이윽고 소년은 사라졌다. 온데간데없이.

그리고 순식간에 주변이 와글와글해졌다.

“……!”

없어졌던 사람들이 어느샌가 돌아와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즈음 근처 바닥에 작은 종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꽤나 걸리적거리는 크기였음에도, 지나다니는 사람 그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상자 속 내용물을 살폈다.

상장 안에는 무전기 같은 휴대전화와 발신기, 어떤 연락처가 적힌 명함이 한 장 들어 있었다.

휴대전화의 전원을 켜고, 명함에 적힌 연락처 번호로 조심스럽게 통화를 걸어보았다.

그러자, 딸칵―.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토마? 어떻게 됐어?」

여자의 목소리. 그녀가 블랙 대거즈 소속이라는 것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입을 열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보스는 암귀와 손을 잡기로 했다.”

「응?」

“방금 전에 나랑 얘기 다 끝냈거든.”

「아하, 그럼 당신이……?」

“그래. 앞으로 날 좀 도와줘야겠어.”

「오케이, 썰~ 분부대로 할게!」

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할 일이 좀 많아. 당장 시작할 것도 있고.”

「그래서? 뭐부터 하면 되는데?」

여자가 물었다.

“우선은.”

나는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금요일 밤의 술자리 약속을 잡듯이.

“데스트루퍼를 박살 낸다.”

***

타악―.

흑의 룩이 백의 폰을 잡아먹었다.

“반칙이야, 스칼렛.”

“뭐?”

“한 칸씩 움직여야지.”

“너 씨팔 체스 할 줄 모르지? 얘는 원래 앞뒤 좌우로 아무렇게나 갈 수 있어, 이 등신 같은 년아.”

어느 깜깜하고 좁은 방.

테이블 위를 가까스로 밝히는 촛불 하나에 의지하여, 두 소녀가 체스 게임을 두고 있었다.

“체크메이트.”

“뭐?”

“내가 이겼어, 스칼렛.”

“아니, 지랄 좀 하지 마. 이게 무슨 체크메이트냐. 내 킹은 아예 건드리지도 못하는구만.

“체크메이트라고 말하면 이기는 거랬어.”

“하……. 잘 들어. 체크메이트는 상대가 뭔 짓을 해도 네가 무조건 이길 때만 말할 수 있는 거야.”

“우으, 그런 복잡한 규칙인 줄은 몰랐는데.”

“제발 좀 똑바로 해라, 개빡치니까.”

새벽인지 저녁인지 모를 어스름한 시각.

암막 커튼으로 창문을 몽땅 가려 어두컴컴한 방안에 소녀들의 목소리만이 메아리로 울렸다.

“체크메이트.”

“뒤질래, 진짜? 나이트는 그렇게 못 움직인다고! 앞뒤 좌우로 한 칸, 대각선 방향으로 한 칸!”

“으, 잠깐만, 어, 계, 계산 좀 할게…….”

“아오, 이 븅신 빡대가리 새끼.”

민트색 머리의 키가 작은 소녀는 기물을 들고 이리저리 망설였다. 상어 같은 치아를 가진 키가 큰 소녀는 언짢은 듯 이빨 가는 소리를 냈다.

“하, 재미없다. 그만하자.”

“…….”

“듣고 있냐? 야?”

“우에엑.”

“아, 씹! 갑자기 토하고 지랄이야! 아오, 드러!”

민트 머리 소녀가 구토를 하자, 상어 이빨을 가진 소녀가 기겁하며 테이블에서 물러났다.

“마더! 아씨, 그만 쳐 자고 일어나 봐, 쫌!”

소녀는 침대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이불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있던 발가벗은 여인이 요염한 자태로 몸을 일으켰다.

“……아들 왔어……?”

“딸이거든? 봐봐, 시안 이 병신 같은 년이 또 토했어. 냄새 오지는데 이거 어쩔 거야?”

“……응, 이따 엄마가 치울게…….”

여인은 다시 몸을 눕히고는 잠에 빠졌다.

상어 이빨 소녀가 그르렁 소리를 내며 한껏 짜증을 부리고 있었을 즈음.

“암귀.”

문득, 자기가 뱉은 토사물에 얼굴을 박고 있던 민트 머리 소녀가 고개를 쳐들고는 말했다.

“암귀가 돌아왔대.”

“뭐?”

“블랙 대거즈한테 붙었나 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상어 이빨 소녀는 진지하게 되물었다.

“어디서 들린 거냐?”

“모르겠어. 살짝 멀어. 노스네스트 같은데. 무지 시끄러워. 목소리가 엄청 많아.”

“몇 명이나 죽었지?”

“으으으음…… 하아아안…… 200며엉……?”

“카핫! 꽤 많이도 쳐 뒤지셨는데? 설마 이번엔 진짠가? 어이, 마더! 들었어?”

상어 이빨 소녀는 살짝 신이 난 듯한 텐션으로 침대에 누운 여인에게 말을 던졌다.

“그놈이 돌아온 것 같아.”

여인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아들……?”

부스스한 앞머리 사이로―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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