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Play The Game (1)
이스트포레스트 12구역.
대형 복합 쇼핑몰 <웨스트필드 가든 플라자>.
평일 오후의 쇼핑몰은 딱 좋은 수준으로 붐볐다.
사람이 너무 들어차 복작복작하지도 않았고, 반대로 텅텅 비어 있어 좀비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모습도 아니었다.
나는 쇼핑몰 3층의 베이커리 카페에 있었다.
이곳 중앙 부근의 천장은 원형의 통유리로 되어 있어 이스트포레스트의 맑은 하늘이 산뜻하게 펼쳐졌다. 1층에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분수대와, 그 주변을 행복하게 거니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놀러 나온 가족. 데이트하는 연인. 모자를 쓴 솜사탕 장수. 고양이 인형을 품고 앉아 있는 소년.
평화롭다. 따뜻한 세계 같다. ‘여유’란 단어를 풍경화로 표현하면 이런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카페 입구 쪽의 유리로 된 창턱 앞에 서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무렵.
누군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뒤를 돌아보자, 나직한 위치에 뭔가 있었다.
―소녀였다.
빨간 머리에 리본 달린 미니햇을 쓰고, 나풀거리는 새하얀 로리타 드레스를 입은 인형 같은 소녀.
나이는 중학생쯤으로 보였는데, 키가 워낙 작아서인지 그보다 훨씬 어린 나이 같기도 했다.
소녀는 조막만 한 손으로 내 셔츠 아랫부분을 꾹 쥐어 당기고 있었다.
“이거 사 줘.”
그 애가 가리킨 것은 베이커리 카페 입구의 진열장 안, 체리 설탕절임이 얹어진 생크림 케이크.
“응? 이거 사 줘.”
“…….”
“조각으로 된 거 말고, 동그란 걸로.”
소녀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나를 보며 애처로이 끔뻑거렸다. 짧은 정적 후에, 나는 입을 열었다.
“혼자 다 먹을 수 있어?”
“먹을 수 있어.”
“마실 거는?”
“오렌지 주스 마실래.”
“케이크랑 먹을 거면 우유 같은 게 낫지 않나?”
“으으응, 주스가 좋아.”
“알았어, 그럼. 자리에 가서 앉아 있어.”
“응!”
소녀는 신이 난 듯 달려가 가게 바깥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카운터에 가서 케이크와 주스를 주문하고, 그것들을 쟁반에 담아 테이블로 가져왔다.
“고마워, 오빠.”
그 애는 해맑게 웃으며 케이크를 먹었다. 자르지도 않은 큼지막한 케이크를 포크로 힘겹게 잘라내, 앙증맞은 입으로 가져다 넣어 오물오물 씹었다.
“너, 이름이 뭐야?”
“아리엘. 인어공주랑 이름 똑같아.”
나는 소녀를 노려보았다.
“네가 보낸 거지? 어젯밤에 그 인형들.”
그러자 녀석은 생크림이 묻은 입가에 넌지시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띠었다.
“어땠어? 인형이랑 노는 거, 재밌었어?”
“아니. 하나도 재미없었어.”
“응, 그런 것 같더라. 오빠가 내 인형들 다 부숴 버렸잖아. 그거 만드느라 어엄―청 힘들었는데.”
“오늘도 같이 인형 놀이 하자고 부른 거니?”
“으응, 나는 그러고 싶은데…… 보스가 하지 말랬으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그런 거 못 해.”
소녀는 아쉬워하며 주스를 마셨다. 지금 말한 ‘보스’는 블랙 대거즈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거겠지.
“혹시 너희 보스, 대가리에 이따만한 파이프가 꽂혀 있는 딥따 못생긴 외눈박이 트롤이냐?”
“……? 아냐. 보스는 머리에 뭐가 박혀 있지도 않고, 못생기지도 않았고, 외눈박이 트롤도 아니야.”
게임에서 블랙 대거즈의 리더는 ‘노팅힐의 프랑켄슈타인’이라 불리는 트롤, 자그말렉 피터스.
하지만 방금 전에 이 애가 보인 솔직담백한 반응은 내가 완전히 헛짚었음을 알려줬다.
지금은 <사이버판타지> 본편 메인 스토리 시작 시점으로부터 약 2개월 전의 과거.
약간의 시간차 탓인지 내가 알고 있는 게임 속 정보가 항상 100% 들어맞지는 않는다.
도대체 어떤 놈일까.
지금 블랙 대거즈의 우두머리는.
“그 보스란 녀석, 지금 어디에 있지?”
“왜?”
“만나서 얘기 좀 하게.”
그때 소녀가 푸훗 하고 웃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구?”
“복잡한 얘기.”
“나랑 하면 되잖아.”
“너한텐 좀 어려울 거야.”
“어른들은 늘 그렇게 말하더라. 자기들도 어려우면서 아닌 척 잘난 척만 해.”
“케이크랑 주스 맛있게 먹었으면, 너네 보스가 있는 곳 좀 알려 주지 않으련?”
“싫어. 케이크 아직 다 먹지도 못했는걸.”
“그럼 이유라도 말해. 왜 날 여기에 부른 건지.”
나는 심문하듯이 말했다.
소녀는 케이크를 한입 먹고서, 창턱 아래로 내다보이는 건물 1층 분수대 쪽을 바라보았다.
“나 있지, 여기 좋아해.”
목소리와 말투는 줄곧 발랄했지만,
그때의 눈빛은 왠지 조금 슬퍼 보였다.
“옛날에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엄마가 자주 데려와 줬거든. 여기 오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다 행복해 보여서, 그래서 나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게 너무 좋았어.”
“…….”
“저쪽 오락실에 인형 뽑기 있는 거 알아? 내가 거기서 인형 갖고 싶다고 엉엉 우니까, 엄마가 한 시간 동안 매달려서 결국 인형을 뽑아 줬었어. 헤헤. 아마 그때 엄마, 못해도 100달러는 썼을 거야.”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소녀.
나는 가만히 그 애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는 주말에도 일하느라 맨날 엄마랑 나 둘이서만 왔어. 그러다 드디어 아빠가 쉬는 날이 생겨서, 그때 셋이서 다 같이 여기 놀러 오기로 했어.”
“그런데 그 전날 밤에, 엄마가 아빠 회사에 차로 데리러 갔는데…… 둘 다 돌아오질 않았어.”
“나중에 경찰 아저씨가 와서 알려줬는데, 엄마아빠가 교통사고 나서 죽었다는 거 있지.”
“사고를 낸 건 마법사들이었어. 용병끼리의 싸움에 엄마아빠가 탄 차가 휘말려 버렸던 거야.”
“근데 사고를 낸 범인들이 너무 강해서, 경찰도 어떻게 하질 못했나 봐. 결국 잡히지도 않았대.”
“그 나쁜 마법사들을 혼내준 건 경찰이 아니었어. ……‘암귀’라 하는 어떤 흑마법사였지.”
순진무구했던 소녀의 음색이 돌연 섬뜩한 핏빛을 머금었다. 소녀, 아리엘은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보스는 오빠가 암귀라고 믿고 있어.”
“…….”
“그래서 오빠한테 우리, 블랙 대거즈의 일원이 되지 않겠냐고 물어보려는 것 같아.”
레오노프 때와 마찬가지군.
그때 놈도 나를 더러 ‘암귀’라 칭하며, 나에게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자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넌 어제 날 죽이려 하지 않았나?”
“응. 오빠는 레오의 원수니까.”
“지금도 날 죽이고 싶은 거 아니야?”
“맞아. 난 오빠를 죽이고 싶어.”
소녀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마트료시카란 거 알아? 인형 속에 조그만 인형이 들어 있고, 또 그 조그만 인형 속에 더 조그만 인형이 들어 있고, 그게 계속 반복되는 거래.”
“…….”
“오빠 시체도 그렇게 만들고 싶어. 우선 몸통을 써서 제일 큰 오빠를 만들고, 다리로는 조금 작은 오빠를 만들고, 그런 식으로 팔, 머리, 손, 크기별로 하나씩 하나씩…… 한 명이었던 오빠가, 죽어서는 여러 명이 되는 거야. 엄청 멋지겠지?”
소녀는 마치 여름방학 숙제로 만들 공예 과제에 대해 부모에게 이야기하듯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참을 거야. 오빠를 죽이면 보스한테 혼날 테니까. 보스한테 혼나기는 싫어. 나랑 같이 놀아 주는 사람은 이제 보스밖에 없으니까.”
“그러면, 지금 네가 원하는 건 뭔데?”
내가 묻자,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나랑 놀아 주라!”
….
….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응? 놀아 줄 거지?”
“……날 여기 부른 게 그것 때문이냐? 심심해 죽겠으니까 좀 놀아 달라고?”
“원래는 레오가 놀아 주기 담당이었는데, 오빠가 레오를 죽여 버렸잖아? 그러니까 책임지라구.”
“……저기, 내가 지금 많이 피곤해서 그런데. 일단 너희 보스랑 이야기 먼저 좀 해도 될까?”
“안 돼. 나랑 안 놀아 주면 보스랑 못 만나.”
소녀는 흥 소리를 내며 홱 고개를 돌렸다.
어떠한 설득도 지금은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어린애들이 세운 마음의 철벽이란 그리 쉽게 뚫리는 것이 아님을 우리 어른들은 이미 알고 있다.
“…….”
이거야 원.
하는 수 없군.
“……후우, 그래. 알았다. 뭐 하고 놀까?”
나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면서 말했다.
설마 또 어제 했던 그 빌어먹을 인형 놀이를 하자는 건 제발 아니길 바라며.
“히힛, 그전에 신기한 거 보여줄게.”
소녀는 빙긋 웃더니, 잔뜩 들뜬 동작으로 자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인형이었다. 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조그마한 봉제 인형. 깜찍하기 그지없는 돼지 삼 형제였다.
“잘 봐?”
소녀가 허공에 대고 양손을 펼치더니 손가락으로 공기를 툭툭 눌렀다. 피아노를 치듯이.
그러자― 인형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녀의 장난 같은 손짓에 맞추어 아기돼지 삼 형제는 자기들끼리 덩실거리며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추었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어때? 대단하지?”
“…….”
“<인형 같은 걸 조종하는 능력>이야. 팔다리가 달렸거나, 사람이랑 비슷하게 생긴 건 다 조종할 수 있어. 내가 보이는 위치에 있기만 하면.”
과연, 이게 에스퍼의 ‘초상 능력’인가.
실제로 보니 마법과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이건 뭐랄까, 현실성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이론도 원리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야릇한 힘이다.
“인형이 보이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응.”
“그럼 너, 어젯밤에는 어디 있었던 거야?”
“건물 옥상에 있었어. 숨긴 인형들도 나한테 살짝씩은 보일 수 있게 미리 다 준비해 놨구.”
상당히 본격적인 매복이었군.
내가 그 시간에 그 길목을 지나갈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블랙 대거즈는 이미 내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꿰고 있다 봐야 한다.
“혹시, 오늘도 인형 놀이 할 생각이니?”
적어도 다른 묘안이 떠오르기 전까진, 지금 이 녀석한테 성심껏 맞춰 줄 수밖엔 없다는 거다.
“응!”
“어제처럼 위험한 게 아니면 좋겠는데.”
“오늘 할 놀이는 하나도 안 위험해. 어젠 술래잡기였었지? 오늘은 숨은그림찾기 할 거야.”
“……숨은그림찾기?”
소녀는 시선을 창턱 아래로 돌렸다.
나 또한 그쪽을 보았다. 1층 분수대 광장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오후의 평화 속을 거닐고 있었다.
“저기에 내가 숨겨 놓은 인형이 있어.”
“……뭐?”
“그리고 그 인형 안에는 순식간에 퍼퍼펑! 하고 터지는 어엄―청 강력한 폭탄이 들어 있지.”
소녀는 1층의 풍경을 바라보며, 방금 전에 돼지 삼 형제 인형을 움직였을 때처럼 오른손으로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듯이 손가락을 휘휘 튕겼다.
“인형이 어느 건지 맞히면 오빠의 승리. 오빠가 이기면 보스를 만나게 해 줄게. 대신 못 맞히면 벌칙이니까, 진지하게 해야 돼?”
“…….”
“제한 시간은 저쪽에 보이는 시계가 3시를 가리킬 때까지. 시간 초과해도 지는 거다? 알겠지?”
투둑―. 식은땀이 떨어졌다.
소녀는 웃었다. 작은 악마처럼.
“그럼, 놀이를 시작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