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Master of Puppets (1)
분명 집주인 할머니 손녀라고 했던가.
프런트에서 몇 번 마주친 기억이 있고, 언젠가 아침에 숙박비를 걷으러 방에 찾아온 적도 있다.
“이보세요, 아줌마. 증거도 없으면서 사람을 왜 자꾸 도둑으로 몰아요? 내가 안 훔쳤다니까요!”
“뭐어라고? 잘못을 빌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너 계속 그러면 경찰 부른다!”
“아, 씨발! 부르든가!”
“엄멈머! 이 지지배 욕하는 것 좀 봐!”
두 사람의 언쟁은 쉬이 그칠 기미가 없었다. 점원도 나를 본체만체하는 것이, 지금 상황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캔 커피를 살 수 없을 듯했다.
하여튼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참견할 건덕지는 충분해 보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나는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고 있는 두 여성 사이에 살포시 다가가 물었다.
그때 관리인 아가씨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아.” 하고 반응했다. 그녀도 날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아유, 손님. 마침 잘 오셨다. 미안한데 저기 있는 전화기로 경찰 좀 불러 줄래요? 여기 지금 발랑 까진 도둑년이 있다고, 빨리 좀 오라 그래요.”
“누가 도둑년이야, 이씨!”
“정확히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자세하게 설명을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글쎄, 얘가 지금 우리 가게 물건을 훔쳐 놓고, 지가 안 그랬다고 막 시치미를 떼잖아요.”
“가게 물건을 훔쳤다고요?”
“네네, 이거예요, 이거.”
점원이 꺼내 보인 것은 초코바 한 개였다. 그녀는 마치 경마장 도박꾼이 마권을 흔드는 것처럼 손에 쥔 초코바를 부산스럽게 휘저어 댔다.
“요 기집애, 문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어슬렁어슬렁, 수상쩍게 돌아댕기길래 혹시나 싶어서 주시를 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계산도 안 한 요게 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걸 제가 딱 발견했죠.”
“아니, 그러니까 몇 번을 말하냐고요! 그건 여기 오기 전에 딴 편의점에서 산 거라니까!”
“나더러 그 말을 믿으란 거야? 그래서 영수증 있어? 영수증 있냐고?”
“저기요, 세상에 초코바 하나 사면서 영수증을 챙기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래, 영수증이 있을 리가 없지. 훔쳐 놓고 걸리니까 말 지어내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하, 진짜 돌겠네……. 아줌마. 내가 무슨 그지 새끼도 아니고, 60센트도 안 하는 초코바를 대체 뭐 하러 훔치냐고요. 예? 그지 새끼냐고, 내가!”
“버릇이지, 버릇이야. 너 같은 애들은 도벽이 있어서 그 손버릇 영영 못 고치는 게지. 쯧쯔.”
점원의 멸시에 관리인 아가씨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무마하고자 애썼다.
“이 애가 훔치는 장면을 직접 보셨습니까?”
“직접 보진 못했고, 감시는 계속하고 있었죠.”
“매장 안에 CCTV는요?”
“그러잖아도 방금 확인해 봤는데, 그게 또 절묘하게 카메라에 안 찍히는 사각지대에서 일을 벌였지 뭐예요. 하여튼 선수라니까요, 이 지지배.”
“그럼 일단 확실한 증거는 없는 거군요.”
“아니, 무슨 말이에요, 그게? 주머니에서 이게 나왔잖아요. 이게 증거가 아니면 뭔데요?”
점원은 다시금 초코바를 흔들어 댔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초코바를 가리켰다.
“그거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점원은 잠시 갸웃했다가, 곧 내게 초코바를 건넸다. 나는 매대에 진열된 초코바를 하나 꺼내 두 개를 서로 비교해 보았다. 차이점은 금방 보였다.
“유통기한이 다르네요.”
“예?”
“매장에 있는 초코바는 유통기한이 올해 12월까지인데, 이 초코바는 내년 3월까지입니다. 같은 상자에 들어 있던 제품이 아니에요.”
내 말에 점원과 관리인 아가씨가 동시에 벙쪘다.
“그리고 손님분은 아까 전에 이걸 ‘60센트도 안 하는 초코바’라고 말했죠?”
“네? 아, 네.”
“근데 보니까 여기 매장 제품 가격은 딱 60센트네요. 혹시 이건 얼마 주고 산 초코바인가요?”
“그게, 57센트요.”
“거스름돈 가지고 있습니까?”
“어, 주머니에 있을 텐데…….”
짤랑―. 관리인 아가씨는 주머니를 뒤져 1센트 동전 세 개를 꺼냈다.
“영수증은 없지만, 잔돈은 있고, 지금까지 진술한 부분과도 앞뒤 맥락이 다 일치하네요.”
나는 초코바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며 웃었다.
“아마도, 약간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
“경찰은 안 불러도 될 것 같군요.”
상황은 거기서 깔끔하게 종료됐다.
이후 점원은 관리인 아가씨에게 연신 미안하다 사과를 했고, 관리인 아가씨는 입이 삐죽 나온 채로 툴툴대긴 했지만 크게 성질을 내지는 않았다. 나는 계획대로 캔 커피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편의점 밖으로 나오자, 입구 맡에서 관리인 아가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고마워요.”
그녀는 아무래도 멋쩍은 듯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커피 캔을 땄다.
“뭘요.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게, 편의점 들어가기 전에 주머니에 있는 건 미리 다 먹어 둬요.”
“208호 아저씨 맞죠? 지금 퇴근하는 거예요?”
“맞아요. 관리인 아가씨는 왜 이런 늦은 시간에 역 앞 편의점까지 나와 있었어요?”
“페니예요. 저녁에 친구 만나서 놀다가 좀 늦었네요. 참고로 저는 지금부터 출근.”
“그렇군요.”
“아저씨 이름은요?”
“유진입니다.”
우리는 통성명을 주고받고서 자연스럽게 밤길을 같이 걸었다.
“아으, 12시까진 가야 됐는데. 쓸데없이 시간 날려갖고. 할머니한테 뭐라고 둘러대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편의점에서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려서 잡혀 있었다고.”
“역 앞에 있었던 시점에서 이미 꿀밤 확정이에요. 집에서 저녁밥 먹고 온다고 뻥쳤거든요. 근데 이 시간까지 싸돌아다닌 거 들키면 바로 죽는 거죠. ……에휴. 할머닌 제가 아직도 어린앤 줄 알아요. 성인 된 지가 언젠데.”
“손녀 걱정하는 맘에 그러시는 거죠, 뭐.”
“게다가 진짜 악덕 고용주가 따로 없다니까요. 시급이 2달러가 뭐예요, 2달러가. 10시간 일해도 우리 모텔 하루 숙박비도 못 내는 게 말이나 돼요? 확 그냥 노동청에다 신고 넣어 버릴까 보다.”
“가족 간 고용 관계에는 최저임금 지급 의무가 면제되기 때문에 신고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저기, 웃자고 한 소리에 진지하게 덤비지 말아 줄래요?”
오늘의 퇴근길은 제법 흥겨웠다. 혼자 쓸쓸히 걷는 대신 둘이서 떠들며 한산한 거리를 거닐고 있자니 가볍게 밤 산책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아저씬 몇 살이에요?”
“올해로 딱 서른입니다.”
“우와, 나보다 열 살이나 많구나. 진짜로 아저씨였네…….”
“몇 살로 보였는데요?”
“저랑 그렇게 차이 안 날 줄 알았어요. 지금은 수염이 없어서 그런가, 꽤 젊어 보이거든요.”
“원래는 늙어 보였나요?”
“그쵸, 아무래도. 솔직히 아저씨 예전 인상은 좀 뭐랄까, 음, 히키코모리 같은 느낌……?”
“아아, 제가 얼마 전까지 폐인처럼 지내기는 했죠. 개인적으로 좀 힘든 일이 있었던지라.”
“이제라도 정신 차렸으니 다행이죠, 뭐.”
관리인 아가씨, 페니는 싱긋 웃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미소였다. 만약 나에게 여동생이 있었더라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남들 눈에는 저희가 남매로 보이려나요.”
문득 들려온 말에 깜짝 놀랐다.
이 아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걸까.
“봐요, 머리 색깔도 비슷하잖아요, 우리.”
“…….”
“아저씨? 듣고 있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려 했다. 무슨 반응을 보이든 그냥 농담처럼 웃어넘기고, 다시 시시콜콜한 화제로 대화를 이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저씨?”
우뚝―.
나는 발걸음을 멈춰 섰다. 옆에서 같이 걷고 있던 소녀 역시 영문도 모르고 나를 따라 멈췄다.
“뭐예요,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아주 멀리서부터, 시야에 어렴풋이 그것이 들어온 순간부터, 등줄기에 돋아난 소름은 도통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옅은 가로등 불빛만이 전부인 음산한 거리.
차 한 대 지나지 않는 좁은 도로 곁의 보도 한복판에, 놈은 정지 표지판이라도 되는 마냥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우두커니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놈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저기, 아저씨. 저 사람……?”
2미터가 훌쩍 넘는 거구.
가죽으로 된 검정색 코트.
창백한 낯빛의 스킨헤드.
“……위험한 사람처럼 보이는데요……?”
2주 전, 내가 죽인 남자.
블랙 대거즈의 레오노프다.
“페니. 뒤로 돌아서 왔던 길로 계속 뛰어. 멈추지 말고. 일단 사람이 많은 곳까지 가.”
“……네?”
“빨리!”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페니는 깜짝 놀라서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15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놈이, 레오노프가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죽었을 텐데, 어떻게 살아있지?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테러리스트와 맞닥뜨린 밤. <부름>을 통해 깨우친 악마의 힘으로, 나는 놈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문자 그대로 흔적도 없이.
틀림없이, 레오노프는 죽었다.
그렇다면 눈앞의 저건 무엇인가.
유령? 환각? 쌍둥이? 도플갱어?
그저 비슷하게 차려입은 다른 사람?
“…….”
확실한 것은 딱 하나였다.
아군만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
“어이.”
불러 보아도 대답은 없었다.
다가가기엔 께름칙했다. 그렇다고 물러나는 것도 바람직하진 않았다. 나는 대치 상황을 유지했다.
그대로 10여 초쯤 흘렀을까.
거구의 스킨헤드가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
―온다.
놈은 달음박질로 달려들었다.
한쪽 손에는 나를 잘게 쪼개기 위한 마체테가 있었다. 나는 받아칠 각오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왼팔에 고출력의 <강화>를 작용.
내려쳐 들어오는 칼날에 용감히 맞섰다.
―카앙!
피부가 떨렸다. 팔 근육이 저릿했다.
다행히 관절째로 썰려 나가진 않았다. 스킨헤드의 마체테는 셔츠 소매를 찢는 정도에 그쳤다.
“……?”
뭔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가볍다.
처음 놈과 싸웠을 때는 정말 괴물이랑 뜨는 기분이었는데, 지금 일격은 갸우뚱할 정도로 약했다.
묘하다고 생각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놈의 공격에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감정도, 숨결도, 심장의 고동도, 인기척조차도 없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올려 놈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틀림없이 레오노프가 맞았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이미 죽어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 살아있는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다.
“이건…….”
레오노프의 망령 따위가 아니었다.
단지 놈을 닮았을 뿐인, 만들어진 꼭두각시.
“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