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Bad Meets Evil (4)
형사의 질문에 주인장이 갸우뚱했다.
“카이트?”
“그래. 듣자 하니 이 주변에서 요새 이름 좀 날리고 있는 놈이라 하던데.”
나는 숨을 죽인 채로 조용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주인장은 고개를 끄떡거리며 말했다.
“들어는 봤지. 맥스페인 투기장에서 하룻밤 동안에 10연승을 했다는 그 친구 아닌가?”
“내가 찾는 놈이 맞는 것 같군. 혹시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인지 알고 있나?”
“몰라. 것보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왜지?”
“어디서 들은 건데, 놈은 가면을 쓰고 다닌다 하더라고. 그래서 얼굴이 어찌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더군. 하여튼 직접 본 녀석 얘기론 그래.”
주인장의 대처는 상당히 훌륭했다.
어쭙잖게 모른 척하는 대신, 어느 정도 자신이 아는 정보를 풀고, 동시에 가짜 정보를 흘림으로써 상대를 자연스럽게 교란시킨다. 과연 뒷세계의 주민다운 센스 플레이.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형사 양반, 내가 참견할 바는 아니지만, 탐문 수사 중이시라면 이런 손님도 없는 구석탱이 술집보다 더 나은 장소가 있지 않으려나?”
“애석하게도 이미 가볼 만한 곳은 다 가봐서 말이지. 뭣보다 이 동네서 나 같은 짜바리랑 말동무해 주는 친절한 시민은 드물거든.”
“나야 뭐 손님 가려 받지 않으니까.”
“카이트에 관해 더 아는 건 없나? 놈이 블랙 대거즈 간부 한 명을 조져 버렸다는 소문도 있던데.”
“아, 그 얘기. 나도 알지. 레오노프인가 하는 거물을 발랐다면서? 근데 그거 진짜인감?”
“일단, 난 안 믿어. 그렇잖나? 이 도시에서 가장 위험한 테러리스트하고 술 먹다 시비가 붙어서 싸웠다니, 누가 그런 뻥카 같은 얘길 믿겠어.”
형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여기 들어올 때부터 생각한 건데……. 인테리어가 참 독특해, 정말.”
그는 몸을 뒤로 젖히더니 고개를 슥 돌려 가게 벽면 쪽을 향했다. 거기에는 판자로 막아 놓은 구멍― 이전에 내가 벌였던 싸움의 흔적이 있었다.
“저 구멍은 언제부터 저랬던 건가?”
“……좀 됐지.”
“의자 몇 개가 새 거더군. 천장 대들보도 최근에 새로 갈았고. 저쪽 바닥에 묻은 얼룩은 피 맞지?”
“…….”
“며칠 전에 누가 여기서 대판 싸웠나 본데.”
형사는 확신에 들어찬 어조로 말했다.
관찰력도 관찰력이지만, 역시 정말로 무시무시한 건 ‘형사의 감’이라는 것일까.
“어떤가, 바텐더?”
주인장은 성급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괜찮은 판단으로 보였다. 섣부르게 변명을 하려 했다간 변명을 하려 했다는 자체만으로 형사의 감을 자극할지도 몰랐다.
“허허, 설마, 여기서 그 테러리스트랑 카이트란 놈이 한바탕했던 거 아니냐고 묻는 거요?”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냥 내 기분 탓이려나?”
“거 상상력이 너무 뛰어난 것 아니오, 형사 양반? 만약 정말로 그랬으면 내가 밖에다 현수막이라도 걸어 놨겠지! 우리 가게가 소문의 그 가게라고, 아주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을 거라니까?”
“그래?”
“그래!”
이후로는 한동안 침묵만이 오갔다.
다행인 것은 주인장의 낌새에 어색함은 있어도 수상함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흐음.”
형사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이대로 주인장을 더 캐 봤자 얻을 게 없음을 짐작한 듯 보였다.
사실 내 입장에서 썩 좋은 전개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거기, 금발 친구.”
덕분에,
타겟이 나로 바뀌었으니까.
“어이, 귀 먹었나? 이봐!”
“……예? 저요?”
“지금 여기 나랑 댁 말고 다른 손님 있나?”
위험한데. 하필이면 후드랑 마스크를 내리고 있을 때 나타난 바람에, 얼굴을 가리지 못했어.
이제 와서 가리려 드는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으니, 결국 얼굴을 깐 채로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날 찾고 있는 형사를 상대로 말이다.
“……무슨 일이시죠?”
“옆에 있었으니 얘기 다 들었겠지. 나는 형사고, 카이트란 놈을 찾고 있는데, 뭐 아는 거 있나?”
“……으음,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침착하자. 전에도 한 번 겪었던 상황이잖나.
해야 할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시민을 연기할 것.
“자네, 이 동네 사나?”
“앗, 아뇨. 사는 곳은 웨스트록입니다.”
“흐음, 직장이 노스네스트인가?”
“아닙니다. 회사도 웨스트록에 있습니다.”
“그럼 왜 여기까지 와서 진 토닉을 마시고 있는 거야? 자네 집 근처에는 술집이 없어?”
“아, 그게, 이쪽에서 아는 동생을 만나기로 해서요. 퇴근하길 기다리는 중이에요. 그리고 이건 진 토닉이 아니라 미네랄워터입니다.”
“잠깐만, 미네랄워터라고?”
“예.”
“그거 내 커피랑 바꾸지 않겠나?”
“사양하겠습니다.”
일단 질문들에 척척 대답은 마쳤다. 어쩐지 양쪽 모두에게 의미 없는 질문뿐이었지만 말이다.
“자네 이름은?”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마치 내게 논박이라도 지르듯이, 기어이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저는…….”
어쩌지? 본명을 말할까?
아니면 가명으로 적당히 둘러댈까?
고민한 시간은 1초도 주어지지 않았다.
“유진입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본명을 말했다.
이쪽이 맞는 선택이었다. 지금 이 자가 찾고 있는 건 ‘유진 연’이 아니라 ‘카이트’. 본명이 까발려져서 당장 내가 곤란에 빠질 일은 없으며, 신분증을 요구할 경우에도 쉽게 대응할 수 있다. 성을 말하지 않은 것은 물론 최소한의 방어책이다.
참고로 그때 주인장은 양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벼 파며 소리 내어 하품을 하고 있었다. 내 이름을 듣지 않으려는 계책인가. 나는 또 한 번 속으로 감탄했다.
“한국인인가?”
“맞습니다.”
“예전에 같은 팀 후배 중에 한국인 지지배가 한 명 있었지. 지금은 다른 부서로 옮겼지만.”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언제 그 친구가 나한테 결혼할 거면 한국 사람이랑 하고 싶다 했던 것 같은데……. 자네 나이가 몇 살이지? 지금 미혼인가?”
“올해 서른이고, 결혼은 아직 안 했습니다.”
“사실 자네 얼굴이 딱 그 친구 취향이거든. 그 뭣이냐, 10대들이 꺅꺅대는 보이 그룹 기생오라비 같은 스타일을 좋아해서……. 아, 이건 칭찬일세.”
부질없는 대화가 꽤 길게 이어졌다.
어느 새부턴가 형사는 이 가게에 대한 의심의 싹을 완전히 거둔 것 같았다. 물론 나에게는 처음부터 의심하는 기색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아무튼 뭐, 얘기 즐거웠네.”
“저도 즐거웠습니다, 형사님.”
“그래. 미네랄워터 맛있게 먹고, 될 수 있으면 저녁 약속은 아래쪽 동네에서 잡도록 하게. 요즘 치안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여긴 노스네스트니까. 그리고 바텐더, 쓰레기 같은 커피 잘 마셨소.”
“살펴 가시게나, 형사 양반.”
형사는 마른기침을 하며 술집을 나갔다.
가게 안은 이내 고요해졌다. 주인장은 비로소 긴장이 풀린 듯 큼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어휴, 갑자기 짭새가 뜰 줄이야.”
“그러게.”
“자네 벌써 유명인이 된 것 같은데.”
주인장의 말대로다.
아무래도 ‘카이트’는 이미 경찰 쪽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자리매김을 한 모양이었다.
“아까 말한 이름은 본명인가?”
“그래.”
“뭐, 지금은 어쩔 수 없었지. 가짜 이름을 댔다가 신원 조회라도 했으면 바로 들통났을 테니……. 역시, 위조 신분을 하나 파 보는 건 어때? 그러면 훨씬 안전해지지 않을까?”
“아니. 공개적으로 신분을 드러내야 하는 활동은 애초에 할 생각 없어. 게다가 난 A급 전과자라 조회하면 금방 들킬 거고.”
“최소한 얼굴이 팔리는 건 막아야 할 것 아닌가. 보건용 마스크랑 후드만 갖곤 어림도 없을걸.”
“그건 맞는 말이군.”
“그래서 말인데,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건 어떤가? 내가 잘 아는 맞춤가면 제작자가 있어. 솜씨가 기가 막힌 장인인데, 원한다면 소개시켜 줄게.”
<펍 미드나이트>의 주인장은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꽤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아까 전에 형사 앞에서 보여줬던 몇 차례의 센스 플레이도 그렇고, 눈치가 상당히 좋은 인간이다.
“글쎄, 고려는 해보지.”
“그리고, 전에 자네가 얘기했던 친구들이 어제 찾아왔었어. 데스트루퍼 애들 말이야.”
“몇 명이서 왔지?”
“다섯.”
“좋아. 현재까진 스카우트 성공률 100%군.”
“자네가 시킨 대로 일단 그치들 연락처는 받아 놨는데……. 이제 어쩔 셈인가?”
“어쩌긴. 전쟁을 하려면 병력부터 늘려야지.”
내 말에 주인장은 혀를 내둘렀다.
“자네, 정말로 데스트루퍼를 부술 생각이군.”
나는 가만히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조직원 규모는 약 1,000명. 그중 100명 정도만 이쪽에 끌어들이면 갱단 내부에 핵심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어.”
“구체적인 계획은?”
“파산을 시킬 거야. 데스트루퍼는 자본의 대부분을 고유 크레딧으로 보관하고 있지. 고유 크레딧은 디코딩에 필요한 패스워드 키를 폐기하는 순간 열지 못하는 보물 상자가 돼 버려.”
놈들의 크레딧이 모두 공통된 패스워드 키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브로콜리트리를 통해 알아냈다.
크레딧 서버를 보관 중인 장소가 어디어디인지도 모두 알고 있으니, 이제 관리 단말에 접근할 내부 첩자들만 준비된다면 일사천리로 끝날 일이다.
“이번에 내 의뢰 완료해서 받은 보수, 어제 온 녀석들한테 갖다줘.”
나는 아까 전에 주인장에게 받았던 15만 크레딧짜리 칩카드를 다시 돌려주면서 말했다.
“어이쿠, 통 한번 딥따 크신데.”
“계약금 같은 거라고 전해.”
“암, 돈이야말로 인류사 최고의 협상 수단이지. 근데 계속 이런 식으로 퍼주다간 자네 주머니가 남아돌질 않을 것 같은데, 괜찮을랑가 몰라?”
“뭐, 당분간 열심히 일해서 벌어야지.”
아쉽게도 이날은 딱히 들어온 의뢰가 없었다.
나는 향후 계획에 관해 주인장과 짧은 밀담을 더 주고받았고, 11시가 되기 전에 가게를 나왔다.
오후 11시 38분.
웨스트록 7구역. 비콘스트리트역.
역사 안 물품 보관함에 넣어 뒀던 셔츠와 넥타이를 꺼내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있던 맨투맨과 후드 재킷은 쇼핑백에 담았다.
한밤중의 웨스트록에서는 정장 차림으로 다니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했다. 늦게 퇴근하는 회사원은 밤거리에서 그리 수상쩍은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시간이 시간인지라 거리는 많이 한산했다. 이 시간에는 버스가 없고, 외진 지역이라 택시도 잘 다니지 않아, 집까지는 걸어가야만 했다.
야근과 잔업으로 피로에 찌든 몸을 이끌고 30분 이상 걷는 것은 상당한 중노동이었기에, 카페인 섭취가 절실했다. 그래서 도중에 편의점에 들렀다.
텅 빈 주차장을 지나 편의점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간 순간,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 내가 안 훔쳤다고요!”
“거짓말하지 마, 네가 훔쳤잖아!”
귀를 찌르는 앙칼진 여자애의 목소리.
이어서 들려온 것은 중년 여성의 고함.
매대 앞에서 점원과 손님 간에 실랑이가 벌어진 듯했다. 분위기는 꽤 험악해 보였다.
“음?”
그런데 가만 보니,
여자애 쪽은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금발 생머리에 야구모자.
검은 민소매 티에 헐렁하게 입은 빨간 야상.
찢어진 청바지에 유난히도 새하얀 스니커즈.
……모텔 관리인 아가씨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