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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36화 (36/201)

36화. Bad Meets Evil (3)

윌슨앤코 인터내셔널 사옥 50층.

임원실은 마치 호텔 라운지처럼 아늑했다. 통유리창 바깥으로 보이는 도시의 전경. 룸 스프레이의 은은한 향기. 서재와 마호가니 책상. 일을 하는 것보다는 술잔을 기울이는 쪽이 더 어울릴 공간이었다.

“한잔하겠나?”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즈음, 내 마음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존 렘브란트 버미어가 말했다. 그의 손에는 브랜디로 보이는 고급진 술병이 들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근무 시간이라서요.”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알고 있나? 퇴근 직전에 마시는 술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다는 사실.”

“안타깝게도 저는 퇴근 시간까지 아직 한참 남았거든요. 곧 회사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허면 어쩔 수 없겠군그래.”

렘브란트는 잔 하나에 술을 따르고 빙글빙글 돌렸다. 그 행동은 술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그런 이유가 아닌, 그저 재미 삼아 그러는 것처럼 보였다.

“자네, 밑에서 꽤 재미난 짓을 벌였더군.”

그는 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멀찍한 데 서서 잠깐 지켜봤다네. 내 부하들을 괴롭히는 모습이 참 즐거워 보이던데.”

“별로 즐기려고 벌인 짓거리는 아니었지만, 네. 솔직히 즐겁기는 했습니다.”

“왜 그런 거지? 날 만나는 게 목적이었다면, 굳이 눈에 띄는 방식을 쓸 필요는 없었지 않나?”

“아뇨. 반대입니다. 눈에 띄는 게 목적이었기에, 굳이 그런 방식을 택했던 거죠.”

“흠?”

“그리고 이번 사건을 통해 결과적으로 곤란해지는 쪽은, 바로 당신일 겁니다.”

내 말에 그의 눈썹이 미약하게 떨렸다.

“……무슨 뜻이지?”

“당신의 목적을 알고 있습니다.”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렘브란트 씨, 당신은 이 회사― 윌슨앤코 그룹을 깨끗한 회사로 만드는 게 목적이죠. 그렇죠?”

처음엔 그가 엄청난 악당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잖나. 자본주의 세계를 장악한 악덕 대기업의 실세라니, 누가 봐도 빌런 캐릭터 설정 아닌가.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엄밀히 따지면 렘브란트는 선역 캐릭터였다. 히어로까지는 아니라도, 악역만은 절대로 아니었다.

“윌슨앤코 인터내셔널에 입사 후 36년. 일만 보고 달려온 워커홀릭 외곬 인생. 비로소 물류사무책임자 겸 부사장 자리까지 올라서며, 회사의 실질적 1인자로 등극한 당신이 접하게 된 충격적인 진실은, 알고 보니 이 회사가 암흑가의 폭력배들이 건국한 불법의 왕국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

“밀수, 탈세, 비리, 횡령, 배임, 각종 백색 범죄가 여기저기서 난무하고 있었고, 그 모든 배후엔 뒷세계의 조직들이 얽혀 있었습니다. 책임자로서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겠죠. 당신은 어떻게든 이 더러운 회사를 정화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계속하게.”

“당신은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하게 작업을 진행했어요. 대부분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범죄와 연루된 조직에서 증거를 빼내기 위해 용병을 고용한다거나 하는 식이었죠. 그리고 또, 우드게이트 웨어하우스에서 보관 중이었던 불법 밀수품인 ‘카인의 단도’를 빼내기 위해 지주회사의 팀장이었던 저를 이용하기도 했고요.”

‘카인의 단도’는 개인의 소유가 금지된 성물.

이를 보유한 조직은 물건을 보관할 든든한 금고로 윌슨앤코 물류창고를 택했다.

아마도 렘브란트는 ‘카인의 단도’를 ‘유실물’로 만듦으로써, 관련자들이 범죄 조직으로부터 숙청당하는 것을 유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회사 내 불순분자들을 정리하려 했던 거겠지.

“제가 ‘카인의 단도’를 사용해 흑마법사로 각성해 버렸던 건 계산 외였겠죠. 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습니다. 창고에서 물건을 빼낸 것만으로 당초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날 이후에 굳이 그걸 회수하러 오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죠.”

“이미 악마와의 계약을 마친 흑마법 아티팩트는, 더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니까.”

렘브란트는 술을 한 모금 홀짝였다.

나는 헛기침을 한 뒤에 말을 이었다.

“아무튼, 당신은 그렇게 뒤에서 차근차근 퍼즐을 맞춰 가며 회사를 정상화시키려 하고 있지만, 단언컨대 그래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겁니다.”

“어째서지?”

“제가 있으니까요.”

렘브란트와 나는 대칭 관계이자 대립 관계.

“저는 윌슨앤코를 앞에서 대놓고 엎어 버릴 생각입니다.”

서로의 목적은 같으나,

각자의 방식은 반대다.

“당신은 눈에 띄지 않으려 했겠지만, 벌써 뒷골목 갱단의 말단 양아치조차도 당신 이름을 알고 있더군요. 당신이 고용했던 용병들 중에 말 많고 실력 없는 놈이 몇 명 있었던 모양이죠.”

“…….”

“게다가 오늘 제가 22층에서 쐐기를 박았잖습니까. 회사 사람들 중에 당신이 지주회사를 주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지주회사에서 감사 폭탄이 날아왔다? 타이밍도 그렇고 참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죠. 분명 다들 당신의 ‘쇼’라고 생각할 거예요. 회사를 본격적으로 뒤집어엎어 버리기 앞서, 사내 범죄 가담자들을 향해 경고를 날리는 거라고.”

“자네가 나한테 제대로 한 방 먹인 셈이군.”

“암요. 속이 쓰리시겠죠. 낮술 몇 잔 정도는 더 드셔도 될 거예요.”

렘브란트는 조용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자네가 원하는 건 뭐지? 돈인가? 아니면 내가 가진 권력?”

“둘 다입니다.”

“흠?”

“앞으로 제 빽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개인 혹은 회사 일과 관련되어 당신 도움이 필요한 때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원해 주시길 원해요. 대신에 저는 회사 정화 작업을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나는 방식을 가리지 않는다.

앞에서든 뒤에서든. 합법이든 불법이든.

“이제부터는 제가 당신이 해야 할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진 연’은 양지에서, ‘카이트’는 음지에서.

해가 뜬 뒤에도, 해가 진 뒤에도, 쉴 틈 없이 일할 것이다. 어느 한쪽이 끝장나기 전까지는.

이 지옥 같은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나는 죽기 직전까지, 발버둥을 쳐보려 한다.

“……그것뿐인가?”

“아뇨, 하나만 더요. 제발 윌인터에서 이쪽으로 보내는 잡일들 좀 적당히 컷해 주십시오. 진짜 농담이 아니라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 한 달 넘게 직원 2명이서 무쌍 찍고 있다고요. 예?”

렘브란트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술잔을 집어 들었다.

“쓸데없는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나?”

“뭔가요?”

“자네는 악마에게 심장을 바쳐 가면서까지 흑마법사가 되는 것을 선택했지. 이유가 뭔가?”

“아아, 그거는, 별로 대단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저 자신이 존나게 약하다는 사실에 열불이 터졌었거든요. 욱해서 그런 거죠, 뭐.”

“하핫. 그렇구만. ‘욱해서 그랬다’라…….”

“시원찮은 대답이라 좀 죄송하네요.”

“신기한 친구라고 생각은 했어. 배짱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그는 술잔을 가볍게 비웠다.

그러고 나서 나를 보며 말했다.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게.”

그것은 평범한 안부 인사였지만,

내 제안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얘기 즐거웠네. 다음번에 찾아올 땐 부디 늙은이 술친구 노릇 좀 해주게나.”

나는 묵례를 하고서 임원실을 떠났다.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로비에 도착, 곧 빌딩에서 나왔다. 새파란 하늘이 한눈에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하늘의 푸르름을 감상하던 중에, 뭔가 잊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찰나.

“아.”

빌딩 앞 횡단보도 근처 보도블록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스몰필드 씨와 눈이 마주쳤다.

“스, 스몰필드 씨?”

“…….”

“여기서 뭐 하시는…… 아이고, 먼저 회사로 들어가 계시란 말을 깜빡했구나, 내가…….”

나는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스몰필드 씨가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어요.”

“아녜요. 혹시 몰라서 기다렸을 뿐인데요, 뭐.”

“…….”

“볼일은 다 끝내신 거죠? 그럼 이제 회사 가면 되겠네요. 택시 잡을게요.”

그녀는 체념한 듯이 도로 쪽을 살폈다.

나는 무어라 말해야 그녀가 기운을 차릴까 고민하다가, 그냥 내 진심을 전하기로 했다.

“스몰필드 씨.”

“왜요?”

“고마워요. 기다려 줘서.”

그 순간.

택시를 잡으려던 그녀의 손길이 멈칫했다.

“오늘은 정말 수고 많았어요. 회사는 저 혼자 돌아갈 테니까, 스몰필드 씨는 이만 퇴근하시고 집에 가서 푹 쉬세요. 택시비 따로 드릴게요.”

잠시 우리 사이에 오가는 말이 멈췄다.

그녀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금요일까지 끝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어떻게 집에 가요. 하던 일은 마치고 가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심은 아닌 것 같았다.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하죠.”

아는 척보다는 나을 듯해서,

그냥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아씨, 택시는 또 왜 이리 안 잡혀…….”

“음, 날씨도 좋은데 잠깐 걸을까요? 아까 오면서 보니까 이 근처에는 예쁜 카페도 많던데.”

“죄송한데 저 오늘은 야근하기 싫거든요.”

“배는 안 고파요? 밥 먹고 갈래요?”

“사람 놀려요, 지금?”

***

월요일 밤.

노스네스트 3구역 <펍 미드나이트>.

“오우, 오랜만이구만, 카이트!”

낡은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콧수염쟁이 주인장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봐, 주인장 아재. 내가 아무 데서나 이름 막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뭐 어떤가. 지금 아무도 없는데.”

나는 바 구석에 앉은 뒤 후드를 벗었다. 보는 눈이 없는 틈에 답답한 마스크도 풀어 젖혔다.

“커피? 아니면 위스키?”

“그냥 물이나 한 잔 줘.”

“진짜로? 미네랄워터라서 좀 비싼데.”

주인장이 유리컵에 따라준 미네랄워터는 어째 수돗물보다도 맹맹하고 이상한 향이 났다. 그래도 물맛은 그게 그거란 생각으로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참, 지난번에 달성한 의뢰 보수 입금됐어. 반으로 나눈 다음 수수료 제하고 15만 크레딧. 여기, 칩카드 받아.”

주인장은 내게 카드를 건넸고, 나는 그걸 받아서 챙겼다. 고생한 것에 비하면 쩨쩨한 대가였다.

“저저번 주말이었지? 자네랑 같이 간 놈한테서 대충 얘기는 다 들었어. 자네 혼자 빗발치는 총알 세례를 뚫고 고립된 밀항자를 구출해냈다며?”

“이미 걸레짝이 돼서 뒈져 있었지만 말이야.”

“크하핫! 그래도 상관은 없지. 애초에 이번에 받은 돈은 성공 보수가 아니었으니까.”

“착수금이 40만에 성공하면 두 배였었지. 작업 난도가 높은 건 알겠지만, 겨우 사람 하나 배 태워 보내는 일에 돈을 그리 받는 게 맞는 건가?”

“의뢰 비용이 비싼 것도 당연하지. 밀항은 수요자가 항상 넘쳐흐를 정도로 많으니까.”

“그런가.”

주인장과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와중.

벌컥―. 손님 한 명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선 이는 턱 전체에 수염 자국이 돋아나 있는 중년의 백인 사내였다.

“어서 오쇼.”

가게에 들어온 그는 어디선가 새어 들어온 바람을 느꼈는지, 문득 벽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에는 나무판자 몇 개가 뚫린 구멍을 막아 놓고 있었다.

“여긴 인테리어가 참 독특하군.”

“고친 지 얼마 안 됐다우.”

남자는 내게서 좀 떨어진 곳에 앉았다.

“주문은?”

“버번……. 아니지, 안 되지. 내가 지금 근무 중이라 술은 안 되고, 혹시 커피 같은 것도 있나?”

“있기는 하다만.”

“그거라도 줘 보시오.”

주인장은 덤덤하게 커피를 내주었고, 남자는 그걸 마셨다. 그러자 곧바로 튀어나온 반응.

“우웩! 퉷! 이것 참 드럽게 맛없구만.”

“미안하네. 여긴 커피집이 아니라 술집이라서.”

“무슨 커피에서 플라스틱 냄새가 나는지, 카악! 흙탕물 끓인 게 이것보단 낫겠어.”

나는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다만 그가 모르고 있는 건, 지금의 커피 맛이 몇 주 전 것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발전한 맛이라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손님, 이 밤중에 근무 중이시라고?”

“밤에도 낮처럼 일해야 먹고 사는 직업이라서.”

“옆집 골목 빡촌 포주라도 되시나?”

“비슷했군. 형사야. 평소에 창놈 창녀들이랑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점에선 포주랑 다를 게 없지.”

“오호, 이 동네까지 순찰을 다니는 짭새가 다 있었네. 당신 보기 드문 민중의 지팡이시구만.”

“말 나온 김에 뭐 하나만 좀 묻지.”

남자가 말했다.

“카이트란 이름, 혹시 들어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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