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Bad Meets Evil (2)
“우선 사과부터 드릴게요.”
“네……?”
“본사 미팅 얘기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그런 일정은 없어요. 속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리타 스몰필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에, 그게 무슨, 네에……?”
“좀 더 빨리 말하려 했는데, 너무 잘 드시길래 말 꺼낼 타이밍을 못 잡았어요. 제 잘못입니다.”
“저기, 잠깐만, 잠깐만요. 뭐예요, 그럼? 본사 들를 일도 없으면서 저랑 여긴 왜 온 거예요?”
“그게, 스몰필드 씨랑 같이 밥 먹고 싶어서요.”
“뭐, 뭐뭐, 뭐라구요……?”
“죄송합니다. 방금 것도 거짓말이에요.”
“…….”
“그런 불순한 목적은 아니지만, 목적이 따로 있기는 합니다. 정직하게 털어놓자면, 이 뷔페는 스몰필드 씨에게 드리는 뇌물이라고 봐야겠네요.”
“뇌물……?”
“걱정은 좀 들었죠. 먹을 걸로 꼬시는 건 아무래도 너무 1차원적인 방식이 아닐까 했는데, 다행히 잘 통한 것 같아서…….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리타 스몰필드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지금 나한테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거야?
“아무튼, 오늘 제가 스몰필드 씨를 데리고 여기까지 온 건, 부탁을 드릴 게 있어서입니다.”
“……무슨 부탁이요?”
“스몰필드 씨, 회사 일 많이 힘드시죠?”
“……생뚱맞게 뭐예요?”
“평소에 조퇴도 자주 하시잖아요. 몸이 안 좋으면 쉬어야 하는데, 회사 여건 때문에 억지로 나오고 그러시죠. 저도 여동생이 있어서 그런가, 스몰필드 씨가 고생하는 모습이 참 안쓰럽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요?”
“이제 더는 그런 고생하지 않으셔도 돼요.”
“……네?”
“결심했습니다. 스몰필드 씨를 위해서.”
어라.
어째 분위기가 묘한데.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 그냥 장난으로 하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저는 진심입니다.”
리타 스몰필드는 어버버 입술을 떨었다.
눈빛의 박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건 설마 진짜로 그건가? 이렇게 느닷없이 막 들어온다고?
“스몰필드 씨, 우리.”
심장이 두근대는 순간.
유진이 그녀에게 말했다.
“본사 가서 깽판 치고 옵시다.”
….
….
정적.
침묵이 흘렀다.
“떠올려 보세요. 하루가 멀다 하고 계열사에서 떠넘겨 오는 잡일들을 처리하느라, 주말까지 반납해 가며 카페인에 쩔어 지냈던 나날들을―.”
“…….”
“지금껏 우리가 겪은 고초는 야근수당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이제는 놈들에게 배로 갚아줄 차례입니다. 자아, 갑시다, 스몰필드 씨!”
유진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리타 스몰필드는 또 자기 혼자 바보 같은 착각을 했다는 사실이 멋쩍기도 했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앗, 스몰필드 씨? 어디 가세요?”
다급해진 유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리타 스몰필드는 뒤도 안 돌아본 채 뾰로통한 목소리로 대답을 던졌다.
“한 접시 더 먹을 거예요.”
허나 짜증이 가시지를 않았는지―
끝내 뒤를 돌아보고는 목청껏 외쳤다.
“디저트는 따로예요!”
그녀는 이후 세 접시를 더 가져와 먹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가 당분간 체중계를 쳐다볼 일이 없을 것만은 분명했다.
***
이스트포레스트Eastforest.
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가 펼쳐진 낙원, 시에라시티의 맨해튼이라 불리는 정치-경제 중심구.
돈 많은 이들이 모여 사는 부촌답게 최고의 치안과 천혜의 생활환경을 자랑하는 동네. 이곳의 거리에는 그 어떤 종류의 쓰레기도 보이지 않는다.
도심 전체에 공기 청정 시스템이 가동 중이기에, 시에라시티에서 365일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기도 하다.
여기저기 가로수와 관목이 심어진 거리는 네온사인으로 점철된 형광색 경치가 아닌 현대적이고 정돈된 신도시의 색채를 띠고 있다.
“슬슬 시간이 됐군요.”
오후 2시 52분.
윌슨앤코 인터내셔널 사옥 1층 로비.
“그럼, 스몰필드 씨. 무운을 빌겠습니다.”
“……잘 안 될지도 몰라요.”
“아뇨. 반드시 될 겁니다. 절 믿으세요.”
나는 스몰필드 씨와 로비에서 헤어져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에겐 윌슨앤코 사원증이 있었으므로 방문증은 따로 발급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곳 빌딩 내부는 오가는 사람들로 말도 못 하게 북적였다. 윌슨앤코 인터내셔널은 직계 사원 수만 5,500명에 달하는 거대 종합상사. 지주회사인 것을 감안해도 실제 사원 수가 2명 내지 4명에 불과한 우리랑은 회사 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인파에 치이며 겨우 다다른 엘리베이터 구역.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은 22층. 헤드쿼터 사업부가 모여 있는 심장부 격의 오피스 플로어.
“지금이요? 예, 바로 C/O랑 묶어서 같이 보내 드리겠습니다. 물건 도착은 내일 인천항이요. 네.”
“아, 그렇지. 북부지부 쪽에 코볼트어 전공자가 있으니 그쪽에 부탁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글쎄요, 이만한 사안이면 저 혼자 결정 낼 게 아니라서요. 현장이랑 얘기를 좀 해봐야겠는데요.”
사무실의 공기는 노동의 열기로 가득했다.
나는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 안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때마침 내가 찾던 사람이 지금 막 거기서 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실례합니다.”
서류 뭉치를 들고 어디론가로 급히 향하던 흑인 남자의 앞을 내가 젠틀하게 막아섰다.
“어, 누구시죠?”
“본사에서 나왔습니다.”
본사란 말에 그가 갸우뚱했다가, 곧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앞뒤로 끄덕댔다.
“아아, 본사에서 오셨다고요.”
우리 사무실에서 ‘본사’라 하면 ‘윌슨앤코 인터내셔널’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사실은 지주회사인 우리 ‘윌슨앤코’ 쪽이 명목상으로는 본사가 맞다.
“운영팀장 유진 연입니다.”
“자원팀 치프 매니저 채드 토머스입니다.”
우리는 짧게 악수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본사서 이쪽엔 어쩐 일로 오신 거죠?”
남자는 귀찮다는 티를 내색하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서두르는 말투에서 그것이 조금 느껴졌다.
“감사監査입니다.”
“예?”
“수입금 관리, 아웃소싱 입찰 참가자에 대한 자격 검증 절차, 선급금내역 이중 기장, 업무 위임과 인수인계 방침 등, 문의가 제기된 37개 항목에 관한 특별내부감사를 실시하러 왔습니다.”
내 말에 남자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감사라뇨?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요?”
“이상한데요. 저희는 이미 2주 전부터 이쪽 연락 담당자에게 메일로 고지를 했는데요. 투자전략팀의 ‘폴 뷰캐넌’ 씨인데, 그분이 전달 안 해드렸나요?”
“아니, 그 사람은…….”
아무래도 그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내가 말한 사람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 윌슨앤코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 업무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가짜로 파견된, 가상의 존재라는 사실을.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 원활한 감사 진행을 위해 지금부터 모든 사무를 중지해 주시겠습니까?”
“잠깐, 뭐라고요?”
“시간은 좀 걸릴 겁니다. 저희 쪽은 고질적인 인력 부족 탓에, 이번 감사에 참여하게 된 인원이 저 혼자뿐이거든요. 해 떨어지기 전에 퇴근하고 싶으시면 가급적 협조해 주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이보십시오.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사무실을 통째로 올스탑 하라니. 세상에 그런 억지가 어디…….”
“제 말을 귓등성이로도 안 들으신 모양인데.”
콰앙―!
나는 옆에 있던 책상을 오른발로 힘껏 차 넘어뜨렸다. 참고로 <강화>를 살짝 곁들인 발차기라, 책상은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멀리 날아갔다.
“지금 저는 부탁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순식간에 플로어 전체가 얼어붙었다.
이젠 좀 말귀를 알아먹었으리라 믿었다.
“특별 내부감사를 실시하겠습니다. 책상 건드리지 마시고 전원 다 사무실에서 꺼지세요.”
그리하여 모든 업무는 중지.
사무실은 온통 내 차지가 되었다.
―좋았어. 아직까진 성공적.
이것이 하극상 계획의 첫 단계.
다짜고짜 쳐들어가서 깽판 놓기.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웬 깡패 새끼가 강제로 사무실을 점거해 영업 방해를 하고 듯한 광경이나, 실상은 매우 합법적인 형태의 내부감사였다.
적어도 여기서 감사 권한을 가진 나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감사를 빌미로 미쳐 날뛰는 날 말리려면,
회사의 아주 높으신 분이 등판해야 할 터.
그래서 미리 손을 써 뒀다.
스몰필드 씨에게 말했다. 내가 안에 들어간 뒤 한 시간이 지나면, 50층 임원 플로어로 가라고.
거기서 ‘J.R.버미어’라는 사람의 방을 찾아 들어가, 비서한테 이렇게 전달하라고.
‘윌슨앤코 팀장이 여길 찾아왔다.’
‘그는 지금 22층 자원팀 플로어에 있다.’
그러면 이제 슬슬 나타나시겠지.
회사의 아주 높으신 분께서 말이야.
“오셨군요.”
나는 책상 위에 다리를 꼬아 올린 채, 허리로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건방지게 입꼬리를 올렸다.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내가 씩 웃으며 올려다본 위치에는, 한 남자가 뒷짐을 지고서 유령처럼 서 있었다.
하얀 장발과 회색 피부. 그 사이에 유난히 눈에 띄는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중년의 다크엘프.
“반갑습니다. 존 렘브란트 버미어 씨.”
그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려다보는 게 익숙한 듯했다. 표정에는 웃음기가 약간 있었다.
“반갑네, 팀장.”
“잘 지내셨습니까? 요즘 연락이 뜸하시던데.”
“신경을 못 써 줘서 미안하군. 삶이 여간 바빠야 말이지. 자네도 그렇겠지만.”
“상사맨이 원체 다 바쁜 법이죠, 뭐.”
“언젠가는 자네와 만나서 얘기해야겠다 생각을 했었지. 나는 지금 시간이 괜찮은데, 자넨 어떤가?”
“아이고,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한창 감사 업무를 진행 중이라서요. 그러니 업무 관련된 얘기가 아니라면 나중에 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 감사는 언제쯤 끝날 예정인가?”
“앞으로 3시간 정도 더 걸릴 것 같은데요.”
“내 생각엔 3분이면 충분할 것 같네만.”
“그렇다면 이쪽도 최선을 다해 빠르게 끝내보도록 하겠습니다. 3초만 기다려 주시죠.”
나는 정확히 3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 좀 할까요, 우리?”
존 렘브란트 버미어의 키는 나보다 10센티 이상 컸기에, 여전히 우러러봐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여긴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군.”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거친 쇳물 같은 목소리로.
“따라오게. 내 방으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