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Bad Meets Evil (1)
화요일 오후 1시.
브로콜리트리 사무실.
“아이고, 우리 팀장님 또 오셨네.”
브로콜리 대표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유진을 맞이했다. 표정 역시 달갑지 않은 듯 보였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답니까? 설마 또 어음인지 뭔지 그것 때문에? 에이, 아니겠죠?”
“어음 때문에 온 것 맞습니다.”
“와, 진짜요? 대단하시다, 이쯤 되면 슬슬 존경스러워요. 정말 포기를 모르는 남자셔, 아주.”
“어음금 17만 달러. 꺼내 주시겠습니까?”
“근데, 기억력은 존경스럽지가 않으네. 미안한데 저기요, 제가 어제 다~ 말해 드렸죠? 그니까 그 돈은 지금 저희한테 없고, 서버에 있다고요. 예?”
“압니다.”
“뭐요?”
“그래서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타악―.
유진은 가지고 온 가방에서 서버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 어서 꺼내 주시죠. 17만 달러.”
“…….”
“뭐 하십니까, 대표님?”
브로콜리 대표는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한동안 입을 다문 채 탁자 위를 쳐다만 보고 있다가, 불현듯 헉 소리를 내며 입을 크게 벌렸다.
“이, 이거, 혹시……?”
“귀사가 보유한 현금 자산 총액 210만 달러를 크레딧 형태로 보관 중인 서버입니다.”
“에, 에이, 그게 여기 있을 리가…….”
“의심 가시면 직접 확인해 보시죠.”
대표는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며 서버를 살폈다. 유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모델 기종, 인식 번호, 전부 일치한다. 갱단 창고에 있어야 할 물건이, 어째서인지 여기에 있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가져왔냐는 질문인가요? 뭐, 대표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브로콜리 대표의 동공이 벌벌 떨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해 침착함을 되찾고,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이윽고 그는 씩 웃으며 음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 핫! 이거 이거, 우리 팀장님한테 한 방 먹었습니다요! 설마 서버를 통째로, 이야, 멋지시네!”
“가져오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물론 그러셨겠죠! 근데 이거 어쩌나? 사실은 말이죠……. 여기에 크레딧 같은 건 안 들어 있어요.”
“예?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요! 제 딴엔 돈 가지고 귀찮게 구시길래 그냥 해본 소리였죠. 근데 그걸 믿으실 줄이야! 여튼 기대하셨을 텐데. 안타깝게 됐습니다, 팀장님.”
크레딧은 암호화폐.
고유 키key로 복호화하지 않는 이상, 그저 아무 의미도 없는 코드 더미에 불과하다.
고로 서버에 든 데이터를 아무리 뒤져본다 한들, 그게 크레딧이라는 사실은 절대 알 수 없을 터!
“지랄하지 마십시오, 대표님.”
“…….”
“이미 현장에 있던 관리 단말기를 통해 코드 해독은 마쳤고, 이 서버에 약 2,000만 크레딧이 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다만 그냥 가져가 버리면 도난 코드가 찍혀 버리니까, 명의자인 대표님께서 정식으로 이체를 해주셨으면 해서요.”
유진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브로콜리 대표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 그런 짓 하면 저, 저 진짜 죽어요…….”
“어째서죠?”
“제 돈이 아니니까요…….”
“크레딧 보유자 명의는 대표님이던데요?”
“며, 명의만 그렇지, 제 거가 아니라 깡패 놈들 돈이에요. 데스트루퍼 말입니다! 이름은 들어보셨죠? 그, 그놈들이 절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요!”
“아,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대표님이 서버에서 돈을 꺼내 가도, 그걸 알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뭐라고요……?”
“창고에서 서버를 빼돌린 뒤에 똑같은 기종으로 바꿔치기를 해 뒀습니다. 지키고 있던 녀석들도 입막음을 시켜 놨기에, 크레딧이 담긴 서버를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그쪽에서는 아직 모릅니다.”
“그, 그럼 이 서버에 있는 돈은…….”
“맞아요. 여기 보관돼 있는 크레딧은, 한 푼도 남김없이 몽땅 다 대표님 돈입니다.”
“…….”
“정확히 하자면 회사 재산이지만, 어차피 상장도 하지 않은 1인 기업이고 하니 사실상 개인 재산으로 봐도 무방하겠죠. 법적으로도 그럴 겁니다.”
브로콜리 대표의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허나 지금까지의 떨림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의 떨림에는 감출 수 없는 고양감이 존재했다.
“여, 여기 든 게, 다 내 돈이라고요……?”
“어디, 백만장자가 되신 기념으로, 거스름돈 정도는 꺼내 주실 수 있지 않을는지요?”
아무렴. 210만 달러가 생겼는데 고작 17만 달러도 못 꺼내 줄까. 그것도 이 돈을 자기 앞에다 옛다 먹어라 하고 바쳐다 준 영광스러운 은인한테.
대표는 행복에 겨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무엇인가 좋지 못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는지, 도로 아까처럼 부정적인 떨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거, 거기 있는 서버, 가짜 서버라는 게 들켜 버리면 저기, 큰일 나지 않나요……?”
“뭐, 확실히 큰일은 나겠죠. 데스트루퍼는 배신자의 발바닥 가죽을 벗긴 다음 불판 위에서 탭댄스를 추게 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출 줄 아세요?”
“여, 역시 관둬야겠어요.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빨리 이걸 원래 자리에 돌려놔야…….”
“진정하세요. 별일 없을 겁니다.”
“별일이 없을 리가 없잖아요! 놈들이 단말기를 확인하거나 돈을 찾으러 오기라도 하면 그땐……!”
“그전에 일망타진을 한다면요?”
유진이 말했다.
“데스트루퍼란 갱단이 사라져 버린다면, 이 돈을 어떻게 쓰든 문제 될 게 없지 않겠습니까?”
대표의 말문이 막혔다.
이 인간이, 지금 뭐라고 떠들고 있는 거야?
“저는 가까운 시일 내로 놈들 조직을 완전히 와해시킬 생각입니다.”
“…….”
“그러기 위해서는 브로콜리트리 측의 사소한 협조가 필요합니다만.”
데스트루퍼를 와해시킨다고?
브로콜리트리의 협조가 필요하다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침없는 유진의 폭탄 발언들에 도통 머리가 따라가 주지를 않았다.
“어, 어떻게……?”
“어떻게 해낼 거냐는 질문인가요? 뭐, 대표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일개 회사의 팀장이 갱단을 무너뜨린다.
미친놈이나 뱉을 법한 헛소리였지만, 왜인지 눈앞에 있는 남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진짜 서버를 갖고 왔잖아. 갱단 안방서 210만 달러를 훔친 거라고. 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
‘평범한 회사원은 절대 아니야. 분명 데스트루퍼 못지않은 깡패 세력들을 빽으로 업고 있겠지.’
‘그러면, 이왕 좆된 거, 차라리 이쪽이랑 손을 잡는 게 나한텐 이득? 아니, 어쩌면 개이득……?’
헛소리인 건 차치하고서라도.
미친놈인 것만은 분명했기에.
“깊게 따지실 필요 없습니다. 대표님은 그저 여기 있는 돈을 맛나게 잡수시기만 하면 될 뿐이죠.”
“그, 저는…….”
“어쩌시겠습니까?”
브로콜리 대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움과 210만 달러. 둘을 저울질해 보았다.
“…….”
공포란 일 하지 않는 잔소리꾼.
1센트도 벌어다 주지 않는 법.
“협조…… 하겠습니다…….”
유진은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였다.
“윌슨앤코의 공식 파트너가 된 걸 축하드립니다.”
무기는 손에 넣었으니,
이제 방패를 구할 차례다.
가능하면―
존나게 튼튼한 방패를.
***
수요일.
윌슨앤코 사무실.
“스몰필드 씨, 잠시만요.”
점심시간을 앞둔 무렵, 밥 먹으러 다녀올 채비를 하고 있던 리타 스몰필드에게 유진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오후 미팅 때문에 지금부터 본사에 가봐야 하는데, 스몰필드 씨도 같이 가주셔야겠어요.”
“네? 제가요?”
“미팅에서 현행 업무 방식 개선에 대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꺼낼 셈이라서요. 기왕이면 현장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 네에…….”
으으음, 본사 미팅에 동반이라…….
솔직히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내킬 턱이 있나. 귀중한 점심시간을 일부 빼앗기게 생겼는데.
‘하아, 귀찮아 죽겠네.’
리타 스몰필드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이니까 해야 한다. 반항이 허락되지 않은 것은 그저 계약직의 숙명일지니.
“자세한 건 가는 길에 말씀드릴게요. 우선 밥부터 해결하죠. 뭐 드시고 싶은 것 있으세요?”
“아뇨, 아무거나 괜찮아요.”
어차피 점심은 파파야 국수로 때우려 했었으니 뭘 먹어도 상관없었다. 물론 기대는 들지 않았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택시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회사 앞 식당가를 통과. 먹자골목도 패스. 햄버거집 드라이브스루도 휙 지나쳤다.
그리고 한 시간 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
‘응……?’
이스트포레스트 1구역.
펄만 호텔 레스토랑 라운지.
‘으으으으응……?’
리타 스몰필드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초호화 5성 호텔의 최고급 런치 뷔페였다.
“저, 저기 티, 팀장님? 여, 여기……?”
“오늘 미팅 일정 잡히자마자 미리 예약해 놨어요. 한 번쯤 와 보고는 싶었는데, 혼자 오자니 타이밍도 안 맞고 좀 뭐해서요. 마침 잘 됐다 싶었죠.”
“비, 비싸지 않아요……?”
“인당 240달러인가 그랬을걸요. 팁이랑 서비스 차지는 별도고요.”
히익! 경악이 절로 나왔다.
240달러라니! 거의 3일 치 봉급이다! 둘이서 한 끼 먹기만 해도 월세를 홀라당 태우는 셈 아닌가!
“법카로 긁는 거니까 걱정 마세요.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가끔은 이런 사치도 부려야죠.”
“…….”
“당연하지만 사장님한텐 비밀입니다.”
리타 스몰필드는 뷔페 안을 둘러보았다.
랍스터, 킹크랩, 성게알, 각종 더럽게 비싼 해산물들이 대형마트 PB상품마냥 천지에 쌓여 있다.
주문하면 바로 앞에서 즉석으로 만들어 주는 스테이크, 파스타, 그리고 이름 모를 이국의 요리들.
디저트는 또 어떤가. 케이크든 쿠키든 하나하나가 명장 제과점 퀄리티다. 그뿐이랴, 매직 쿠커로 만든 뭉게구름 아이스크림에 엘프풍 산딸기 푸딩까지. 이 뷔페에서 찾을 수 없는 음식은 오늘 리타 스몰필드가 사 먹을 예정이었던 파파야 국수뿐이었다.
“헛.”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음식이 한가득 담긴 접시와 함께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살짝 들기도 했으나, 음식들 앞에서 그런 잡념은 봄눈 녹듯이 사라졌다.
꿀꺽―.
리타 스몰필드는 수저를 들었다.
“……!”
이것도. 저것도. 몽땅 다 맛있다!
맛으로 행복을 느낀 것이 얼마 만이던가. 평일 회사 점심시간에 이토록 순수한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어때요, 먹을 만해요?”
“……넹…….”
“천천히 드세요. 시간 많으니까.”
유진은 밥 먹는 강아지를 보는 듯 따뜻한 시선으로 리타 스몰필드를 보았다. 허나 그녀는 그런 시선을 눈치챌 기미도 없이 식사에 열중할 뿐이었다.
그렇게 세 번째 접시를 들고 테이블에 돌아왔을 즈음, 리타 스몰필드는 문득 유진을 슬쩍 쳐다봤다. 그는 초반에 육회와 생선 초밥 몇 점을 입에 넣었을 뿐, 이후엔 내내 커피만 리필해 마시고 있었다.
“저어, 팀장님?”
“예?”
“그으, 한참 전부터 아무것도 안 드시고 계신 것 같은데…… 혹시 입맛 없으세요?”
“아, 잠깐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생각에 빠져 있다는 것쯤은 보면 안다. 다만 그 생각이 워낙 길어 보여 어쩐지 노파심이 들었다.
동시에 자신이 마치 훈련받은 푸드 파이터처럼 게걸스럽게 음식을 처먹어 대고 있었음을 알아챘다.
“…….”
리타 스몰필드는 고기로 거탑을 쌓은 본인의 접시를 내려다보며 상당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녀는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다음번 접시에는 샐러드만을 담아 왔다. 야채와 과일로 국립공원을 조성하였으나, 누구도 그녀를 나무라진 못하리라.
“저기, 스몰필드 씨.”
한껏 소심해진 동작으로 풀떼기를 깨작깨작 씹고 있던 리타 스몰필드에게, 유진이 말을 걸었다.
“할 말이 있는데요.”
프러포즈라도 할 것처럼,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