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You Never Give Me Your Money (3)
“뭣이? 지금 저 인간이 뭐라고 한 거지? 톰 재커리는 자기 귀를 의심했어. 허나 사실은 변치 않았지. 감독은 분명히, 그에게 번트를 대라고 말했어.”
“감독의 판단은 썩 나쁘지 않았을지도 몰라. 다음 타순인 1번 타자는 오늘 안타가 없기는 해도 어쨌든 상위 타선이니까. 늙다리 대타한테 맡기는 것보다야 훨씬 확률 높아 보이는 선택지잖나.”
“하지만 톰 재커리의 생각은 달랐지. 지금 자기 컨디션은 인생 최고의 절호조인데, 고작 희생 번트 따위를 대자고 허무하게 낭비할 순 없었어. 하물며 커리어 마지막 타석이 될지도 모르는 타석에!”
“그러나 감독의 말을 무시하고 스윙을 했다가, 혹시라도 아웃을 당한다면? 병살을 친다면? 그대로 팀에서 쫓겨나도 이상할 게 없겠지.”
“톰 재커리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어.”
“감독이 시킨 대로 번트를 댈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믿고 스윙을 할 것인가?”
“어떤가, 유진 군.”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라고 물으며, 하인즈 사장은 옅게 웃음 지은 눈으로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한 손으로 턱을 쥔 채 생각에 잠겼다.
“저라면…….”
자신이 생각하기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번트 시도를 두 번 해서, 두 번 다 파울로 투 스트라이크를 만들고, 그렇게 스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스윙을 해서 홈런을 칠 겁니다.”
사장실 안은 잠시 고요해졌다.
하인즈 사장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있다가, 조금 긴 침묵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 이 얘기 전에 어디서 들었나?”
“예? 아뇨, 지금 여기서 처음 들었는데요.”
“흐으음, 그으래? 그렇다면 무어, 자네도 톰 재커리와 같은 반열에 오른 인재라 할 수 있겠군.”
그는 뭔가 맘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의 맘에 들지 않는 뭔가가 뭔지는 나로선 알 길이 없었다.
“헌데, 자네는 어째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최종적으로 홈런을 노리는 선택지를 고른 거지?”
“그거야, 번트 자체가 무조건적으로 안전한 선택지도 아닐뿐더러, 만약 성공한다 해도 팀에 남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흐음.”
“반면 홈런은 칠 수만 있다면 거의 100% 향후의 안전이 보장되죠. 그리고 또, 무엇보다…….”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팀이 이겨야 하지 않습니까.”
왜인지는 몰라도 그 말이,
사장의 맘에 쏙 들은 듯했다.
“좋은 대답이군.”
그때쯤.
나는 깨달았다.
선택지가 두 개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둘 중의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게 아니다.
가끔, 아주 가끔씩은―
‘둘 다’란 선택지도 있기 마련.
“할 얘기는 다 끝났나?”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긴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감사는 뭘. 상담은 언제든지 환영이라네.”
“외람되지만 오늘은 일찍 퇴근해 보겠습니다.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요.”
“음, 그래 그래. 근데 저기, 퇴근 전에 이쪽 창틀 좀 닦아 주고 가면 안 되겠나?”
“죄송합니다. 사장실 관리는 사장님이 직접 하셔야지 않을까 싶네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으시잖아요? (어차피 달리 하는 일도 없으니까.).”
“잉? 그치만 난 손가락이…….”
“좋은 밤 보내십시오, 사장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다저스 야구팀의 연고지는 LA가 아닌 브루클린이었고, 그해 막바지에 치열한 포스트시즌 경쟁을 펼친 적은 없었다. 그리고 톰 재커리는 타자가 아니라 투수였다.
아무튼 뭐,
그렇단 얘기다.
***
오후 11시 12분.
노스네스트 D 구역.
공기가 안 좋기론 산업혁명 시절 런던과 비교해도 몇 수는 앞서 있다는 이곳 노스네스트에서도, 레드존으로 지정된 이른바 알파벳 구역들은 대기질의 오염도가 일반 숫자 구역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더러운 것은 공기만이 아니었다. 바닥, 건물 벽, 하늘, 온갖 방향에서 스멀스멀 풍겨오는 악취는 하수처리장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숨을 쉬는 것은 가능했지만, 가능하면 그러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후드와 두꺼운 마스크를 얼굴에 뒤집어쓴 채 어두컴컴한 불한당들의 거리를 누볐다.
누구에게도 시비가 걸리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굉장히 운이 좋은 밤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발을 멈춰 선 곳은 건물이 거의 없는 고즈넉한 거리에 생뚱맞게 위치한 어느 버려진 창고.
주소상으로는 틀림없다. 여기가 바로 브로콜리트리의 크레딧 데이터를 보관 중인 장소다.
나는 건물 주변을 한 바퀴 빙 돌며 시설의 방범 상태를 확인했다.
침입 감지 시스템 같은 건 없어 보였고, 입구 쪽에 CCTV 하나만이 달랑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것도 고증이라면 고증인가.”
게임에서도 갱단 아지트 같은 시설은 의외로 외부에서의 침입이 그리 어렵지 않게 되어 있다.
하기야 RPG 게임의 던전 같은 장소니까, 들어가기 힘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긴 하겠지.
210만 달러어치의 크레딧을 보관하고 있는 곳치고는 아무래도 보안이 허술하다는 느낌이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크레딧은 현금과 달리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화폐. 데이터베이스가 담긴 서버를 훔쳐 봤자 코드 해독 없이는 꺼내지도 못하는 돈이다.
이는 뒷세계의 화폐로써 크레딧이 애용되는 이유 중 하나다. 일단 크레딧으로 환전해 두면 소중한 재산의 안전이 (어느 정도는) 보장되니까.
아무튼 간에, 저기 있는 하나뿐인 CCTV는 상당히 걸리적거리는 물건이었다. 항시 감시 중이 아니라 해도 기록이 남는 것은 원치 않았다.
다행히 내게는 CCTV를 먹통으로 만들 방법이 있었다. 냅다 부수는 것보다 더 스마트한 방법이.
나는 CCTV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 서서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영창을 외웠다.
“<기능 강화>.”
샤아악―.
자색 마력의 줄기가 돋아났다. 직선으로 뻗어난 마력은 곧장 CCTV를 향해 나아갔다.
“<강화 실패>.”
마나가 닿은 순간, 일부러 의식의 초점을 어긋나게 하여, 기능 강화 마법의 실패를 유도.
그러자, 파지직―. 카메라 렌즈 부근에서 작은 스파크가 일더니 그대로 기기의 전원이 꺼졌다.
이걸로 CCTV는 무력화.
안심하고 입구에 다가갔다.
덜컹―. 창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보아하니 안쪽에서 이중으로 자물쇠가 걸린 듯했다.
이러면 바깥의 잠금장치를 부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문짝을 부수자니 소음이 껄끄럽다.
쉽게 통과할 방법은, 딱 하나 있었다.
“……써야 하나…….”
처음 <부름>을 쓰고서 일주일.
그날 이후로 그걸 쓴 적은 없다.
아무래도 망설여졌다. 여러 이유로.
하지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
<부름>의 재현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
그때처럼 악마의 이름을 속삭이기만 하면 된다.
“카인 나호르.”
겨우 그것만으로, 이렇게―
내 손에서 악몽이 다시 피어난다.
“윽……!”
오른손의 살점이 부풀어 오르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에 이어, 마나가 피부를 뚫고 흘러나온다.
그것은 마치 작은 구더기들처럼 보인다. 그 보라색 군체가 손끝에서 흐물거리는 모습은 이토 준지 만화에 나올 듯 기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다.
그것들이 내 손을 갉아 먹기 전에, 나는 서둘러 대신할 먹이를 지목한다. 바로 눈앞에 있는 철문.
자아라도 있는 걸까, 군체는 내가 내린 명령을 썩 내키지 않아 한다. 맛없는 금속 따위는 먹고 싶지 않다는 거센 의지와 식욕이 느껴진다.
어르고 달랜 끝에 간신히 설득에 성공한다.
보라색 마나의 군체는 철문에 달라붙더니 매우 천천히 그것을 녹였다. 철이 녹슬어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내 사람이 지나갈 만한 틈이 생겼다. 그 뒤 나는 얼른 마나의 군체를 거둬들였다.
“후우…….”
<부름>을 겨우 10여 초쯤 구사했을 뿐인데도, 거의 10분 넘게 플랭크 자세로 버티고 있던 것마냥 엄청난 피로감이 쏟아졌다.
변이된 마나에 접촉해 있는 순간의 감각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피부 안팎에서 꿈틀거리는 감촉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오한과 닭살이 돋았다.
……도대체 이 끔찍한 마법의 정체는 뭘까?
식인 벌레 떼를 소환한다는 점에서 보면 언뜻 정령술 중 하나인 <스웜>과 비슷한 듯싶기도 하다.
허나 실제 생명체를 소환하는 마법과는 달리, 이쪽은 마나 그 자체에 생명이 깃든다는 느낌이다.
일단 마법의 결과물만 보자면, 처음 익힌 흑마법인 <강화>의 반대, 즉 <약화>에 가까워 보인다.
물체에 극단적으로 <약화>를 가해 풍화시켜, 결국에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하여간 빌어먹을 악마 자식은 최소한의 친절마저 생략하고 지랄이다. 뭐, 그러니까 악마겠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목적지로 들어가는 입구가 열렸다는 것이다.
나는 뚫린 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좁고 짧은 복도 끝에 잠기지 않은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스윽―.
그 문을 열자, 몇 개의 할로겐 조명 덕에 건물 바깥보다는 비교적 환한 창고 내부가 드러났다.
고등학교 강당만 한 사이즈의 너비.
구석에 상자 몇 개. 대부분은 빈 공간.
눈에 띄는 것은 창고 중앙의 컴퓨터 설비.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낡은 소파 주변을 빙 둘러싸 지키고 있는 다섯 명의 불한당들.
“……뭐야?”
문신. 덩치. 살기.
한눈에 봐도 인상들이 많이 험악한 것이, 길가에 침이나 뱉은 동네 양아치 급은 아닌 듯 보였다.
“저 새끼 뭐야. 어디서 들어왔어?”
“씨팔 CCTV 왜 이래, 이거. 고장 났나 본데.”
“문 잠근 거 막내 너지? 아따, 등신 같은 새끼. 이따 진짜 존나게 처맞을 줄 알아라잉.”
“죄, 죄송함다, 형님. 분명 잠갔는데…….”
“아, 됐고.”
놈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나에 대한 반응을 표출했다. 공통점은 손에 같은 걸 들고 있었다는 거.
“저 씹새끼나 죽여, 일단.”
철컥―.
장전된 권총 다섯 개가 동시에 내게 겨눠졌다.
놈들이 방아쇠를 당길 때까지 2초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틱―.
방아쇠가 당겨졌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
유감스럽게도 내 마나가 먼저 닿은 뒤였다.
<기능 강화 실패>로 권총은 모두 작동 불능.
“씨벌, 이건 또 왜 이러는데.”
“야, 저 새끼가 뭔 짓 한 거 아냐?”
“방금 저거 손에서 보라색 뭐가 나왔어.”
“저, 저놈, 마법사 같습니다, 형님들…….”
“마법사건 지랄이건 우리가 할 일은 안 변해.”
다섯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이 들고 있던 권총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주먹에다 끼웠다. 무척이나 단단해 보이는 금속제 너클이었다.
“조지기나 하자고, 빨리.”
뒤에 있던 나머지 놈들도 곧 우두머리의 행동에 동참했다. 각자 꺼내든 무기는 쇠 파이프, 못 박힌 야구 배트, 사시미칼, 그리고 빠루였다.
“흠.”
그러네.
투기장 다녀온 지도 꽤 됐고.
“근접전 연습이 필요하긴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