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You Never Give Me Your Money (2)
움찔―.
눈썹이 살며시 떨렸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귀가 안 좋으신가. 못 주겠다고요.”
나는 차분히 미간을 정돈했다.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 곧 어른의 세계였기에, 대놓고 심기를 건드려 오는 상대에게도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만 했다.
“죄송하지만, 대표님. 상황을 제대로 이해 못 하신 것 같은데, 저희는 법적으로 어음금을 강제 청구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쪽 의지랑 상관없이요.”
“아니 아니, 저기요. 팀장님이야말로 지금 상황을 완전 모르시네. 제 말은 그러니까, 돈을 안 주겠다는 게 아녜요. 못 주겠다는 거지.”
그가 뱉은 말은 물론 말장난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뭘 또 설명까지 굳이 해야 합니까? 생각 좀 해 봐요, 갑자기 그런 돈을 어디서 뱉나요. 17만 달러가 뭐 땅 파면 튀어나오는 돈도 아니고.”
“아까는 푼돈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와 나, 이해력 진짜 딸리시네. 그거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예? 윌슨앤코는 존나 대기업이잖아요. 그니까 그쪽한테는 17만 달러가 껌값도 안 되는 푼돈이겠지만, 좆만 한 회사인 저희한텐 아니라는 거죠.”
“돈이 없다 해도 청구가 이뤄지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물며 귀사는 현금 자산만 약 210만 달러가량 보유하고 있으니, 지불 능력은 충분할 텐데요.”
“아, 그거.”
브로콜리트리 대표는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거 저희 돈 아녀요.”
“……?”
“거참, 알 만하신 분이 왜 이럴까. 설마 아무것도 모르고 오신 건 아닐…… 잠깐. 몰라요, 혹시?”
“뭘 말입니까?”
“와우, 진짜 모르셨나 보네! 하이고, 우리 팀장님 이거, 알고 보니까 겁나게 순수한 영혼이셨구만?”
그는 박수를 치며 깔깔 웃었다.
나는 무표정과 침묵으로 일관했다.
“우리 회사가 뭐 하는 회사인 줄 알아요?”
“압니다.”
“뭐, 일단은 크레딧 가지고 돈놀이하는 게 우리 일인데. 아까 뭐 현금 자산 어쩌고 하셨죠? 우리 회사가 현금을 뭘로 보관하고 있게요?”
“크레딧이겠죠, 아마.”
“맞아요! 그러면 이 크레딧을 어떤 식으로 보관하는지는 아세요?”
“소액의 크레딧은 전자 칩을 심은 카드 형태로 유통되지만, 액수가 커지면 가상화폐 데이터를 데이터베이스 서버에 담아 보관하는 게 일반적이죠.”
“잘 아시네. 우리 회사가 보유한 크레딧도 전부 그렇게 데이터 센터에서 보관 중이에요. 근데 이 데이터 센터가 어디에 있냐면…….”
브로콜리트리 대표는 듣는 이가 짜증 나기를 유발하듯 일부러 잔뜩 뜸을 들였다.
“노스네스트 D구역에 있어요.”
제 딴에는 어디 한번 깜짝 놀라 보란 의도였을 것이고, 어느 정도는 그가 의도한 바대로 되었다.
“……거긴 레드존일 텐데요.”
레드존이란 말 그대로 지도에 붉게 표시된 지역. 시에라시티의 공식적인 ‘치안 취약 지대’다.
주로 에테르 오염지나 범죄 세력이 점거한 갱단 구역이 레드존으로 지정되는데, 이러한 지역은 공권력의 의미와 실권이 사라진 사실상의 무법지대다.
“이제 좀 아시겠어요?”
“…….”
“저희 돈 아니라는 거 구라 아니에요. 다 깡패들 돈이죠. 저는 걍 빨래방 사장. 그치들 피 묻은 돈 깨끗이 해주고 세탁비 좀 타 먹는 게 다예요.”
크레딧을 이용한 돈세탁.
브로콜리트리란 기업 자체가 노스네스트에 기거하는 범죄 조직들의 도구였던 것이다.
“애초에 우리 회사가 세워진 목적이 그거거든요.”
그가 워낙에 의기양양하게 말한지라, 마치 자랑하는 것처럼 들렸다.
허나 내가 정말로 충격받은 한마디는 바로 다음 순간에 들려왔다.
“당신네, 윌슨앤코랑 똑같이요.”
잠시 말문이 턱 막혔다.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지금 뭐라고……?”
“여튼, 저는 잘 모르겠고, 돈은 거기 있으니까 팀장님이 어떻게 알아서 잘해 보십쇼.”
“…….”
“뭐, 법대로 하시든가, 직접 수금하러 가시든가.”
브로콜리트리 대표는 “약도라도 그려 드려요?” 하고 장난스레 물으며 저 혼자 킬킬댔다.
나는 그에게 할 질문이 남아 있었지만, 시간을 더 낭비한들 바란 만큼의 수확은 없을 듯했다.
결국에는 회사로 돌아갔다.
찜찜함을 한가득 안은 채로.
***
“이제 좀 아시겠어요?”
“우리 회사가 세워진 목적이 그거거든요.”
“당신네, 윌슨앤코랑 똑같이요.”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사실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만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해답은 존재했다.
‘윌슨앤코는 뒤가 구린 회사다.’
물론 그 정도는 나도 아주 오래전부터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던 매우 자명한 사실이다.
좀 더 정확히 풀자면,
아마도 우리 회사는—
‘뒷세계와 커넥션이 있다.’
윌슨앤코와 어음 거래를 한 수백 개 업체들 중 비교적 재무 상태가 좋았던 여섯 곳을 직접 방문해 현장을 살펴보았고, 그 결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정상적인 회사가 한 군데도 없어…….”
어느 곳도 깨끗한 회사가 아니었다.
조직도, 사원 수, 실제로 하는 업무 등이 외부에 공개된 정보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그래.
윌슨앤코처럼 말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갱단 등의 범죄 조직과 연결점이 있다는 것.
대부분은 브로콜리트리와 같은 돈세탁 업체였고, 아예 조직에서 직접 운영하는 곳도 많았다.
무엇보다 그쪽 사람들은 다들 윌슨앤코의 실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것도 꽤나 자세히.
허나 정작 나는 무지렁이처럼 무지했다.
의혹과 심증만이 짙었을 뿐, 내부 자료를 뒤지는 정도로는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때문에, 나보다 더 사정을 잘 알 만한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유진 군, 미안한데 와서 내 방 창틀 좀 닦아주겠나? 난 손가락이 너무 굵어가지고 제대로 닦기가 힘들어서 말일세. 무어, 마누라는 이런 내 손가락을 참 좋아하긴 하네만. 파하하하핫!”
마침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웬일로 퇴근 직전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낸 윌슨앤코의 바지사장, 에드먼드 하인즈였다.
“사장님, 잠깐 시간 되십니까?”
“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사장실에서 그와 긴 대화를 나눴다.
사실 대화라기엔 이쪽에서 그저 일방적으로 정보를 풀었을 뿐이었지만.
“—제가 아는 건 대략 이 정도입니다.”
“흠.”
하인즈 사장은 내가 준비한 자료들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댔다.
“사장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무얼 말인가?”
“윌슨앤코가 사실은 조폭들이 싼 똥을 치우려고 만들어진 회사란 걸요.”
이 회사는 태생부터 비정상이었다.
기업이 설립되는 궁극적 목적은 이윤 추구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줄곧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업무는 계열사에서 떠넘긴 잡일들이 대부분인데, 어째 분기별 보고서를 보면 듣도 보도 못한 항목들의 매출액이 수천만 달러씩 찍혀 있더라고요. 지출도 그만큼 있었고요.”
“…….”
“전부 돈세탁 과정이라 가정하니 굉장히 그럴싸해지더군요. 우리 회사 영업이익이 언제나 0에 가까운 이유도 바로 이해가 됐죠.”
윌슨앤코Wilson&Co란 이름 그대로 W.C.
애초부터 시에라시티 범죄 조직들의 공중변소로 기획된 그런 회사였던 것이다.
“솔직히 상상도 못 했습니다. 윌슨앤코씩이나 되는 대기업이 설마 이토록 거대한 똥통이었을 줄은.”
이곳은 그야말로 도시 내 불법 자본의 온상.
그룹 전체를 포함하면 매년 조 단위가 넘는 돈세탁이 이루어지고 있다 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거대한 똥통! 그 표현 맘에 드는군.”
“말씀하시는 걸 보니, 사장님께서는 우리 회사의 진실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나 보군요.”
하인즈 사장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에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면서 보고서로 부채질을 했다.
“그래서 결론은? 이제부터 어쩔 셈인가?”
“…….”
“퇴사할 셈이라면 막지는 않겠네만. 그런데, 자네 아직 사회적응관찰기간 아니었나? 겨우 한 달 만에 직장 잃었다간 곤란해지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사장의 말이 맞았다.
A급 전과자인 나는 사회 복귀 프로그램에 따라 출소 후 8년간 경찰의 보호 관찰을 받는다.
특히 초반 3년간의 적응도 평가 기준은 상당히 엄격하여, 퇴사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자칫하면 곧바로 수용소 복귀다.
더욱이,
내가 좆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세무조사든 뭐든 들어오게 되면 곧바로 드러나 버리겠죠. 이 회사의 썩어빠진 실체가.”
“으흠. 정말 큰일이 나겠지.”
“금융 범죄로 기소를 당한다 가정하면, 시효 만료와 자료 소실 등의 이유로 과거 행적은 대부분 덮어질 테니, 연방검찰에서 문제 삼을 수 있는 건 최근에 벌인 불법 자금 세탁 행위에 관한 것. 그리고 관련 용의를 추궁받는 인물은, 그 기간 동안 회사 운영을 담당한 실질적인 책임자일 것입니다.”
“자네 말이구만.”
사장은 여태 사무실에 붙어 있던 적이 없다. 그동안 회사 일을 도맡아 한 건 나와 스몰필드 씨다.
스몰필드 씨는 단순 계약직. 우리 회사의 중추는 단연 운영팀장 직급을 달고 있는 나였다.
“만약 관련자 중에 금전적인 대가를 받은 인물이 있다면, 거의 반드시 주범으로 몰리게 되겠죠.”
“그것 또한 자네로군.”
내 월급은 세후 약 2,700달러. 그러나 실제로는 매주 3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받고 있다. 물론 이는 일개 회사 팀장급이 받기엔 수상하리만치 큰돈이다.
“이제야 알겠네요. 전에 제가 말도 안 되게 많은 급여를 받는 이유에 대해서 물었을 때, 사장님께서 그랬죠. 거기에 이유 따위는 ‘없다’라고.”
그때 사장이 말한 대로였다.
내가 그 돈을 받는 이유는 없다. 그렇기에, 언젠가 쏟아질 의심의 화살은 모조리 나에게로 쏠린다.
“처음부터 그런 역할이었던 거죠, 저는.”
나, ‘유진 연’은 미끼이자 총알받이.
이 망할 회사의 고기 방패였던 것이다.
“맞아. 전부 사실이네.”
“…….”
“어쩌겠나. 이 또한 자네가 선택한 건데.”
제기랄. 내가 빙의하기 전의 ‘유진 연’은 커버가 안 되는 수준의 병신 새끼였음이 분명하다.
“재차 묻네만, 이제 어쩌려고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웬만하면 합법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지. 고발 같은 형태로 간다 치면 자넨 확실하게 아웃이야.”
“……주범으로 몰리든가, 보복을 당하든가, 둘 중 하나겠죠. 둘 다일 수도 있고요.”
“잘 알고 있구만 그래.”
“……차라리 공생을 시도하는 것도 방법이긴 합니다. 알고서 범죄에 가담하는 꼴이 되겠지만요.”
“잘못하면 나중에 갑절은 더 크게 데이고 말겠지. 그땐 모르고 했다는 변명도 안 통할 거야.”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나는 고민했다.
리스크를 고려하면 어느 쪽이든 최악이었다.
“유진 군.”
끙끙 앓고 있던 나에게,
하인즈 사장이 말을 걸었다.
“옛날이야기 하나 들려주지.”
난데없이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1936년 LA 다저스에 톰 재커리란 이름의 한 선수가 있었어. 나이는 서른아홉. 우투우타 좌익수. 커리어는 별 볼 일 없었지만 타고난 근성과 운으로 메이저리그에 발 담그고 있는 평범한 선수였다네.”
“…….”
“그러던 와중 그에게 위기가 닥쳤어. 시즌이 시작되고 몇 달이 넘도록 완전히 죽을 쑤고 만 거야. 설상가상으로 훈련 중 감독한테 대들었다가 밉보이는 바람에 주전 자리를 뺏기고 벤치 신세가 됐지. 결국 시즌 내내 이렇다 할 활약도 못 하고 성적은 그대로 곤두박질을 쳤다네. 이대로라면 방출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어.”
도통 그의 저의를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일단 가만히 사장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시즌 마지막 날. 그날 경기는 LA 다저스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경기였어. 우리의 톰 재커리는? 당연히 선발에서 빠졌지.”
“그런데 말이야. 이날 톰 재커리는 경기 시작 전부터 운명적인 무언가를 느꼈어. 컨디션이 장난 아니게 좋았지. 아니, 좋다는 수준을 넘어서 그건 아주 신적인 수준이었어. 말하자면 야구의 신이 바로 그날 톰 재커리의 신체에 강림했던 거야!”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니, 상대 투수가 던지는 공이 마치 배구공처럼 커다랗게 보였어. 톰 재커리는 확신했지. 오늘 나는 타석에 들어가면, 누가 어떤 공을 던지든 무조건 홈런을 칠 수 있다―.”
“그래, 반드시 홈런을 때려낼 거야. 몸이 근질근질 달아올랐어. 제발, 타석에 나갈 수만 있다면!”
“9회 말 원아웃. 1점 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 기적처럼 8번 타자가 볼넷을 얻어 1루로 나갔어.”
“그리고 그때, 감독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
“‘이봐, 톰! 준비해!’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마침내 막판에 그가 대타로 나가게 된 거야.”
“좋았어! 부리나케 배트를 챙기고 신나서 뛰쳐나가는 톰 재커리에게, 감독이 한마디를 던졌어.”
“―번트를 대라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