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You Never Give Me Your Money (1)
월요일 오전 11시 30분.
시에라시티 경찰국SCPD 중앙본부.
“이반 레오노프, 통칭 러시안 하운드. 생물학적 성별은 남성. 추정 연령 40대 중반. AA급 수배자.”
회의실에서는 반장을 포함한 형사팀 전원과 대테러팀 인사 몇몇이 참여한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블랙 대거즈의 간부급 조직원으로, 11년 전 처음 포착된 이래 꾸준히 활동해 온 네임드입니다. 조직에서 맡은 역할은 테러 주동 및 청부살인. 그동안 확실하게 이 자의 소행임이 판별된 살인만 해도 37건이며, 추정치는 최소 50건 이상입니다.”
오늘의 회의는 건수가 건수인 만큼, 모두들 평소보다도 진지한 분위기였다. 화이트보드 앞에 선 동양인 여형사는 침착한 어조로 브리핑을 이어갔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틀 전 펄만 호텔에서 열린 국제신성마법학회 컨벤션 행사를 타겟으로 한 블랙 대거즈의 테러 예고가 있었죠.”
“대비한답시고 난리도 아니었지.”
회의실 맨 뒷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브리핑을 듣고 있던 아서 깁슨은 쯧쯧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메이슨 시장이 암살당하는 대사건이 벌어진 지 채 몇 주도 지나지 않아 튀어나온 대형 테러 예고.
경찰국은 발칵 뒤집혔고, 자동적으로 비상 근무 태세가 되어 한동안 칼퇴근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하지만, 당일 테러 실행은 없었습니다.”
그날 SCPD의 경찰특공대와 대테러부대가 총출동하였으나, 정작 행사는 별일 없이 끝났다.
“첩보에 의하면, 그때 테러를 계획하고 실행할 예정이었던 인물이 바로 이반 레오노프였습니다.”
“주동자가 돌연 모습을 감췄다?”
“네. 최근 활동 정황이 전혀 없어요. 7일 전 오후 11시경 노스네스트 3구역 해피스트리트 근처에서 목격된 것이 마지막인데, 이마저도 확실치는 않아요.”
“그쪽 CCTV는?”
“죄송하지만 깁슨 경위님, 거긴 노스네스트예요. 감시카메라보다 약쟁이가 더 많은 곳이라고요.”
“꼽주지 마. 그냥 한번 물어본 거 가지고.”
아서 깁슨은 덜 깎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나오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죽은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가 찬 일이었다. 10년 넘게 경찰도 갱단도 어찌하질 못했던 블랙 대거즈의 맹견이, 죽었다고라?
“도대체 누구 짓이래?”
“음, 제대로 확인된 정보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뒷골목에 떠돌고 있는 소문에 불과합니다만…….”
“소문?”
“그, 술집에서 어떤 자와 시비가 붙었다가 그렇게 되었다 하는, 그런 풍문이 있는 듯합니다.”
“자네 지금 장난치나.”
“꼽주지 마세요. 출처는 정보기술팀이니까.”
아서 깁슨은 담배 쩐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이곳은 시에라시티가 아니던가. 세상 온갖 괴물들이 드글거리는 지옥 같은 도시다. 맹견이 길 가다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동네라 이거다.
“그래서, 지금 정확히 파악된 건 뭐가 있는데? 수사를 하려면 단서가 있어야 할 거 아냐, 단서가.”
“현재로선 수사 방향을 확고히 해줄 만한 물증은 없어요. 다만…….”
여형사는 말했다.
“말씀드린 소문, 그 주인공이 누군진 아무도 모르지만, 어떤 이름이 하나 떠돌고 있더라고요.”
“…….”
“그자의 이름은―.”
성별 불명. 연령 불명. 직업 불명.
이반 레오노프를 죽인 자의 이름.
“카이트라고 합니다.”
***
월요일 오후 1시 30분.
웨스트록 17구역. 도노반퓨처스 사무실.
“여기. 22만 2,700달러. 전부 현금입니다.”
쿵―. 나는 탁자 위에 더플백을 내려놓았다.
탁자 맞은편 가죽 소파 상석에는 벙찐 표정의 고블린 할배가 더플백과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4년 치 이자예요. 원래는 1년 치가 이만큼이지만, 채권법상 수용소 복역 중에 발생하는 이자는 원래의 1/4로 책정되죠.”
“…….”
“그래도 계산 잘하셨던데요. 계약서 조항에 이자 산정 방식이 워낙 복잡하게 돼 있어서 혼 좀 났걸랑요. 선이자는 뭐고 신용조사료는 또 뭔지, 참.”
고블린 할배는 더플백 안에 있는 돈뭉치를 하나씩 꺼내 일일이 살펴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위조지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서 난 돈이냐?”
“피땀 흘려 번 돈입니다.”
그는 미심쩍다는 듯이 나를 째려보았다. 어쩌면 고블린이라 눈이 째져 있어서 그렇게 보인 걸지도.
“남은 이자도 곧 갚겠습니다. 원금은 몇 달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무리하면 억지로 갚을 수는 있는데, 요새 돈 들어갈 데가 좀 많아서요.”
“벌이가 꽤 좋은가 보군.”
“운 좋게 직장을 잘 구했죠.”
“어디 마약상에라도 취직한 거냐.”
“이름 들으면 아실 만한 대기업이에요.”
나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고블린 할배는 코웃음을 치고는 장부를 꺼내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참, 오늘은 그 친구가 안 보이네요?”
“누구?”
“그 저팔계처럼 생긴 하프오크 친구요.”
“깁스하고 집에서 쉬는 중이다. 그때 네놈 패다가 부러진 손이 아직도 안 나았어.”
“저런. 유감입니다.”
“덕분에 수금도 못 다니고, 이렇게 사무실에서 누가 돈 갚으러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만 있지.”
“제가 와서 엄청 반가우셨겠어요.”
“너 진짜 뒤지고 싶으냐?”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외근 가는 길인데 우연히 근처길래 잠깐 짬 내서 온 거라서요.”
“뭔 홀애비 집에 오랜만에 들른 자식 놈처럼 말하는구만. 빌어 처먹을 호로자슥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유우진.”
고블린 할배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너, 위험한 일 하며 돌아댕기는 건 아니겠지?”
그는 굉장히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고블린 특유의 까끌까끌한 음색 탓에 만화영화 속 장난꾸러기 캐릭터의 대사처럼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째 말투가 저를 걱정하시는 것 같네요.”
“걱정 않게 생겼냐? 네놈이 내 돈 안 갚고 어디서 홀라당 뒤져 버리면 그땐 어떡하냔 말이야.”
“글쎄요. 그런 천재지변의 변수를 감당하는 게 무릇 갑이 된 자의 사명이라 생각하는데 말이죠.”
“그거야말로 네놈이 모르고 하는 소리지. 빌려준 놈이 항상 갑인 건 아니다.”
고블린 할배는 장부를 덮으며 말했다.
“가끔은 빌린 놈이 갑일 때도 있어.”
그 말은 제법 날카롭게 다가왔다.
“명심할게요. 저스틴 S. 도노반 씨.”
“한 번만 더 나를 풀네임으로 불렀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되나요?”
“그냥 도노반 선생님이라고 해.”
“알겠습니다. 도노반 선생님.”
“이제 꺼져, 유우진.”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던 건데, 제 이름은 유진인데요. 유우진이 아니라.”
“뭐라고, 유우진?”
“아무것도 아닙니다.”
***
빌린 놈이 갑일 때도 있다.
웨스트록의 빚쟁이 고블린 저스틴 S. 도노반 씨의 격언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아니, 우리 회사가 처한 상황에 꽤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일단 한참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 회사― 윌슨앤코는 겉보기만큼 정상적인 기업이 아니다.
윌슨앤코 그룹의 지주회사로서 거느린 계열사만 수십에 달하는, 연 매출 2억 달러의 튼실한 대기업.
……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평가에 불과할 뿐. 실상 이 회사는 악덕 부실기업 그 자체다.
가령 회계 장부를 훑어보고 있노라면, 이게 당최 장부인지 장르소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수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나, 가장 거슬리는 부분을 고르자면 바로 기업 보유 자산 현황.
윌슨앤코의 자산은 지주회사치곤 특이하게도 유동자산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는데, 그중 대부분은 매출채권, 즉 어음 형태로 보유하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상품 판매로 생긴 수익. 허나 어디에도 그만한 어치의 상품을 판매한 흔적이 없었다.
대신 회사가 멀쩡히 보유하고 있던 현금이 난데없이 기타 지출로 사라지더니, 동시에 같은 액수의 매출채권이 생겨나는 기묘한 현상이 반복됐다.
나는 이것이 어음이라는 방식을 이용한 꼼수로 타 기업에 불법 대출을 자행한 것이라 확신했다.
문제는 어음의 이자율에 있었다.
빌려준 돈은 도합 1억 달러가 넘는데, 연간 이자로 받는 돈은 1만 달러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거의 모든 어음의 상환기간이 무기한에 가까웠다.
장부상으로 이는 외상매출금이 아닌 받을어음으로 기록돼 있기에, 회사의 자산 상황이 매우 탄탄하게 관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다.
이 회사는 어째서인지 여기저기에 현금을 공짜로 뿌리고 있다. 자기 창고를 털어 가면서까지 말이다.
자세한 내막을 알 필요가 있었고,
그게 오늘 외근을 나온 이유였다.
“에, 뭐, 어디서 오셨다 했더라?”
오후 2시 무렵.
나는 웨스트록 17구역의 후미진 거리에 위치한 <브로콜리트리>란 회사의 사무실에 방문했다.
<브로콜리트리>는 과거 어스테이트 전역에 크레딧 열풍이 불어 닥쳤을 때 우후죽순 생겨났던 디지털자산 관리 업체 중 하나다.
법규가 빡빡해지면서 관련 사업은 이제는 거의 사장되긴 했지만, 여전히 크레딧은 (특히 뒷골목에선) 썩 괜찮은 대안화폐였고, 크레딧 발행과 환전을 해주는 이런 회사도 꽤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윌슨앤코 운영팀장 유진 연입니다.”
“어이쿠, 대기업서 누추한 곳까지 오셨네.”
10평 남짓한 비좁은 사무실에서 양아치처럼 껄렁한 느낌의 사내가 나를 맞이했다.
나는 그의 펑퍼짐한 곱슬머리를 보며, <브로콜리트리>란 업체명이 혹시 대표의 헤어스타일에서 비롯된 것일까 하는 쓰잘데없는 생각을 했다.
“거 팀장님께서 여긴 무슨 볼일이시래요?”
“브로콜리트리 대표 토드 맨쉽 씨에게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아, 그거 저예요.”
악수 같은 형식상의 의례를 떠올리기에 눈앞의 친구는 사회 경험이나 상식이 부족해 보였다. 구태여 나서 매너를 챙기기보단 차라리 바로 그냥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서로에게 이로울 듯했다.
“2년 전 귀사는 윌슨앤코로부터 약 17만 달러 상당의 수입품을 대리 구매했고, 그 대금을 약속어음으로 지급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어음이요? 어, 음, 모르겠는데요.”
“기억이 안 나실 만도 하겠죠. 17만 달러 어음에 대한 연간 이자로 꼴랑 9달러 40센트를 내고 계시니까요. 참고로 오늘이 이자 지급일이랍니다.”
“그래요? 세상에, 완전 큰일 날 뻔했네! 딴 건 몰라도 이자는 꼬박꼬박 갚아야죠. 암요.”
브로콜리 대표는 1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내게 던지듯 건넸다.
“거스름돈은 가지십쇼.”
“저는 오늘 이걸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에엥? 그럼 도대체 뭘 받으러 오셨대?”
“17만 달러요.”
나는 준비한 서류를 그에게 들이밀었다.
“이게 뭐예요?”
“해당 거래에 대한 약속어음 공정증서입니다.”
“아니, 그니깐 이게 뭐냐고요?”
“어음 발행인이 지급기한을 지키지 않았을 시 강제 청구를 집행할 수 있게 해주는 서류입니다.”
“강제 청구? 돈을 강제로 뺏어 간단 얘기예요?”
“뺏는다기보단 돌려받는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브로콜리 대표는 내가 꺼낸 종이를 실눈으로 읽어보기 시작했다. 공증의 내용은 상당히 간단하여 알기 쉬웠으나, 그가 이해했을지는 미지수였다.
“보시면 지급기일이 6개월 전까지였습니다. 이제 법원 명령으로 강제 청구가 가능하다는 얘기죠.”
“법이 그래요?”
“예.”
“으아, 푼돈 갖고 되게 살벌하게도 구시네.”
“귀사의 작년 영업이익은 464달러였는데, 17만 달러가 푼돈으로 느껴지시나 보군요.”
“에헤이, 놀리지 마십쇼. 벤처기업인데 적자 안 나는 것만 해도 개쩌는 거지, 뭘.”
“어쨌든 유예는 이미 많이 드렸으니까요. 그 돈은 가까운 시일 내로 지급하셔야 할 겁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고,
브로콜리 놈은 씩 웃었다.
“못 주겠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