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Welcome to My Morning (2)
윌슨앤코는 지주회사지만 실상 하는 일을 보면 노예 회사라 칭하는 편이 더욱 어울린다.
주된 업무는 그룹 내 32개 계열사에서 보내오는 수많은 잡일들을 처리하는 것인데, 그중 8할은 업계 1위 무역회사인 윌슨앤코 인터내셔널의 몫.
말하자면 우리 회사는 윌인터의 서무부이자, 놈들이 자유롭게 부려 먹는 공짜 하청인 셈이다. 심지어 명목상 주인이라는 이유로, 문제 발생 시 책임을 져야 하는 쪽은 오롯이 우리.
“팀장님, 입찰 보고서 초안 작성 끝났어요.”
“그거 체크는 생략하고 바로 본사에 쏴 줘요. 지금 더 급한 게 생겨가지고.”
“설마, 브라질 반도체 선박 결국 캔슬 됐대요?”
“예, 그쪽 파업이 또 연장됐다 하네요. 이러면 급한 장비 몇 개는 비행기로 옮겨야겠는데…… 스몰필드 씨, 항공화물운송장 안 써 봤죠?”
“아, 네. 선하증권하고 많이 다른가요?”
“기재 요령이 조금 다르긴 한데, 국제 표준으로 양식이 통일돼 있어서 알고 나면 오히려 이쪽이 더 쉬울 거예요. 일단 포워딩 업체부터 찾을 테니까, 스몰필드 씨는 공장 쪽에다 연락 넣어 주세요.”
“네엡.”
이 빌어먹게도 불합리한 일터에서 스몰필드 씨의 존재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계약직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우수했다. 관련 직종 경험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실무에 있어서는 웬만한 경력자보다 나았다.
만약 이 회사에 스몰필드 씨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솔직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오전 10시 30분.
한창 바쁜 시간. 숨 돌릴 틈이 없다.
얼핏 이 사무실에는 나와 스몰필드 씨 둘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직원이 한 명 더 존재한다.
「나니니시마스까?」
깡통 로봇 타이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내 옆자리에 있는 이 고물 안드로이드는 입사 2개월 차의 무능한 신입 사원이다. 평소에는 책상만 쳐다보고 있다가 간헐적으로 대뜸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데, 할 줄 아는 말은 딱 저것뿐이다. 스몰필드 씨에 따르면 회화 모듈이 고장 난 것 같다고 한다. 구형 기체에는 으레 생기곤 하는 잔고장이라나.
“뭐.”
「나니니시마스까?」
“바빠 죽겠는데 왜.”
그러나 사실 타이퍼는 말을 할 줄 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낮에는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
“심심하면 가서 이거나 복사해 와.”
「나니니시마스까?」
“1부씩만. 절대 컬러로 뽑지 마라?”
어쨌든 이 녀석도 우리 회사의 전력인 만큼 이것저것 테스트 해 보며 활용 가능성을 찾고 있다.
AI와 기체 성능의 한계로 복잡한 작업을 맡기는 건 무리여도, 간단한 심부름 정도는 가능하다. 커피를 타는 일이나 서류 복사 같은 것 말이다.
“아니, 병신아! 일부가 아니라 1부! 왜 복사를 하다 말아! 한 장씩 뽑아오라고, 한 장씩!”
「나니니시마스까?」
“아오, 답답해 뒤지겠네, 진짜.”
보다시피 도움은 별로 안 된다.
뭐, 우리 사무실에는 이렇게 세 명의 직원이 상주하고 있다. 지금 회사에 없는 사람까지도 끼워 준다면 한 명이 더 있기는 한데…… 솔직히 말해 그 인간은 타이퍼는커녕 냉장고 자석보다도 쓸모가 없다. 그건 최소한 여기에 계속 붙어 있기라도 하잖나.
오전 11시 53분.
하인즈 사장이 출근.
“좋은 아침일세, 제군들!”
그는 호탕하게 웃어젖히며 사무실에 입장했다.
점심시간까지 10분도 안 남은 시점을 아침이라 부르는 것에는 아무래도 어폐가 있었지만, 사장님이 오전 중에 모습을 보이는 일은 전설의 포켓몬이 등장하는 것만큼이나 드물었으니, 그에게는 지금이 새벽녘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웬일로 일찍 오셨네요, 사장님.”
“무어, 가끔은 나도 회사 안살림 좀 살뜰히 챙기고 그래야지. 명색이 사장이니까! 파하핫!”
“그러면 이제부터 일하시려는 겁니까?”
“일? 해야지. 물론! 헌데, 으흐음, 어째, 몸이 영 찌뿌둥한 게……. 이래서야 일할 컨디션이 아니구만. 이럴 때는 그래, 살짝 휴식해 줌으로써 리프레시를 좀 줘야겠어. 음! 사우나라도 가볼까!”
“방금 출근하셨는데요.”
“어떤가, 유진 군? 같이 가서 우리 시원하게 땀 한번 쫘악 빼고 오지 않겠나?”
“저도 그러고 싶지만 지금 급한 연락을 기다리고 있어서요.”
“으흠, 그렇담 어쩔 수 없지. 요새는 정말, 리타 양도 그렇고, 자네들이 참 수고가 많아. 음.”
“근데 다시 오시는 건 맞죠?”
“그럼 이만, 수고들 하게!”
오전 11시 55분.
하인즈 사장이 퇴근.
오늘도 그의 최단 시간 일과 기록을 경신하진 못했다. 참고로 현재 1위 기록은 0분 2초다. 그때는 문 빼꼼 열더니 들어오지도 않고 그대로 떠났다.
“팀장님, 화물 위임 완료했대요.”
“그래요? 휴우, 이제 한시름 놨네요.”
오후 12시.
고대하던 점심시간.
다행히도 급한 일이 전부 빨리 처리돼서, 오늘은 느긋하게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스몰필드 씨, 점심 나가서 드실 거죠?”
“아, 네. 팀장님도요?”
“뭐, 컵라면으로 때울 필요는 없어졌으니까요.”
그즈음 스몰필드 씨는 왠지 바로 나가지 않고,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잠시 머뭇거린다. 그리고 나는 잠깐 기지개를 켜고서 다시 자리에 앉는다.
“어, 식사하러 안 가세요?”
“검토할 게 좀 남았거든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 보세요. 어차피 금방 끝나는 일이니까.”
“……네.”
“식사 맛있게 하세요.”
평소에는 주로 혼자서 밥을 먹는다.
가끔은 스몰필드 씨에게 같이 밥 먹자 권유를 해 볼까도 싶지만, 간신히 사이가 괜찮아진 마당에 치근덕대는 상사라 여겨질까 봐 괜히 좀 망설여진다.
오후 12시 4분.
스몰필드 씨와 간격을 두고서 사무실을 나선다. 목적지는 회사 앞 식당가. 웨스트록 3구역은 오피스 빌딩이 적은 번화가 지역이라, 점심에도 식당들이 그렇게까지 마구 붐비지는 않는 편이다.
게다가 이 주변은 밥집들의 퀄리티도 평균적으로 훌륭하여 점심 먹을 장소를 고르는 재미가 있다.
한쪽 골목을 두어 블록 빙 둘러보기만 해도 눈에 띄는 식당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연어와 아보카도를 주먹만큼씩 넣어 주는 샌드위치 가게. 본토의 맛으로 승부하는 태국 음식점.
30달러 내외로 그럴싸한 코스 요리를 먹을 수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는가 하면, 주머니가 빈곤한 자들을 위한 무한 리필 핫도그 노점도 있다.
애프터눈 티로 유명한 브런치 카페와 4달러짜리 파파야 국수를 파는 트럭 역시 남녀노소에게 인기.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식당은 찾기 힘든 구석에 있었던 드워프풍 프랑스 요리 전문점인데, 그곳의 주방장은 멕시코인이었고, 거기서 먹은 쌀국수는 멘토스 맛이 났다. 지금은 폐점했다는 모양이다.
어느 식당에 들어갈까 고민하는 것은 제법 즐거운 일이나, 점심시간은 1시간밖에 없기 때문에 대개는 시간을 아끼고자 출발 전에 미리 식당을 정해 놓는 편이다. 오늘 역시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오후 12시 12분.
<정앤쿠로키 카페테리아>에 도착.
이곳은 한국 요리와 일본 요리를 동시에 모두 즐길 수 있는 가정식 레스토랑이다.
식당 안은 특이하게도 주방 두 개가 따로 존재하는 푸드코트 같은 형태인데, 여기엔 스토리가 있다.
원래 이곳에선 <정식당>이라는 한식집과 <쿠로키야>라는 일식집이 서로 피 튀기는 경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비슷한 장르에 비슷한 가격, 주방장 요리 실력까지 비슷해 버리니 식당 손님이 딱 반반으로 갈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수년간 골목식당 한일전이 이어지던 중, 어느 날 문득 양쪽 가게 사장끼리 무언가 밀담이 오갔다. 그리고 몇 달 뒤, 두 식당은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하여 더 이상 손님들은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당연하게도 매출은 고공행진. 이는 기업 합병의 훌륭한 선례로 남게 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두 가게 사장끼리 눈이 맞은 결과라는 얘기도 있다. 뒷집 중국집에서 이 레스토랑 동맹 가입에 눈독을 들이고 있으나 여태 이뤄지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아직 시에라시티에서 일부다처제는 허용되지 않았으니까.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신가요?”
“한 명이요.”
“죄송합니다. 지금 자리가 꽉 차서요. 이쪽 대기석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 가게는 이쪽 골목에서도 꽤나 맛집으로 소문났기에 10분 정도 기다리는 일은 예사다.
그런데 그때.
“응?”
점원의 안내에 따라 대기석 의자에 앉으려던 찰나, 바로 옆줄에 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티, 팀장님?”
스몰필드 씨였다.
우연찮게도, 그녀 역시 오늘 여기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커플석에 한 분 들어가실게요.”
“앗.”
때마침 빈자리가 났는지, 점원이 스몰필드 씨에게 식당 안으로 들어오도록 안내했다.
“손님?”
“…….”
스몰필드 씨는 잠시 우물쭈물해 하며 머뭇거렸다. 그러다 머뭇거릴 새가 없음을 깨닫고는 퍼뜩 손을 뻗어 옆에 서 있던 나를 가리켰다.
“저어, 일행인데요…….”
“아, 옙. 커플석 두 분 들어가실게요.”
나는 얼떨결에 그녀와 같이 테이블에 앉았다.
“고맙습니다, 스몰필드 씨.”
“아뇨, 뭐어, 두 명 앉는 테이블인데 혼자 차지하고 있으면 눈치 보이니까…….”
“감사의 뜻에서 오늘 밥은 제가 살게요.”
“네? 그러실 것까진…….”
“부담 갖지 마시고,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다 시키세요.”
“……진짜로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저 이래 봬도 부자거든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나는 매주 3만 4,000달러 이상을 급여로 받고 있었으니, 스몰필드 씨의 연봉보다 큰돈을 주급으로 받고 있는 셈이었다.
“전에 저한테 돈 빌리신 건 뭔데요?”
“그 이야기는 됐으니까…… 주문이나 하죠.”
우리는 각자 메뉴판을 들었다. 가게 두 곳이 합쳐진 만큼 이곳의 메뉴는 매우 다양했다.
“저는 고등어구이 백반에 사라다랑 새우튀김 추가할 건데요. 스몰필드 씨는요?”
“어, 저어는…… 불고기, 앗, 아니다, 규카츠 정식? 장어덮밥? 으, 죄송해요. 선택 장애라…….”
“하하. 천천히 고르세요.”
“좋아, 오늘은 팀장님이 사는 거니까 비싼 장어덮밥으로 할게요! 여기다 돈까스랑 불고기 반찬을 따로 추가하면 되겠죠? 아, 잠깐. 가라아게도 먹고 싶은데…… 다 시키면 양이 너무 많아지네…….”
“시켜도 괜찮지 않을까요?”
“네?”
“둘이니까, 양이 많아도 부담이 덜하잖아요.”
스몰필드 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구나. 먹을 입이 늘었으니까, 남길 걱정 없이 먹고 싶은 거 다 시킬 수 있겠네요!”
그녀는 마치 세기의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무척이나 신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와아, 그럼 저 진짜 다 시켜도 되는 거죠?”
“물론이죠.”
“음, 일단 장어덮밥 곱빼기에다가, 돈까스 불고기 가라아게 반찬으로 추가하고, 국물이 있으면 좋으니까 김치찌개랑, 돈지루? 이것도 먹어 봐야겠다. 그리고 새우튀김 제 것도 추가할게요.”
“저기, 잠깐만요? 그건 좀 과하지 않나요?”
“아, 닭갈비랑 오코노미야키도요!”
“…….”
“헤헤. 이러면 혼자 먹는 것보다 훨 낫네요.”
말려야 하는 타이밍이었지만, 스몰필드 씨가 너무 행복해 보여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오후 12시 58분.
점심시간을 살짝 남기고 식사 종료.
“후아, 잘 먹었습니다아.”
“남기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쵸. 처음엔 엄청 많아 보였는데, 둘이서 먹으니까 딱히 그렇게 많지도 않더라구요.”
참고로 시킨 음식은 대부분 그녀가 다 먹어 치웠다. 이쪽은 혹시나 싶은 경우를 대비하여 소화 기능에다 <강화>를 쓸 준비까지 하고 있었는데, 이럴 거면 나는 그냥 없어도 됐을 판이었다.
“다음에도 같이 먹으러 올까요?”
“글쎄요. 그때도 제가 밥 사야 하나요?”
“맨날 얻어먹기만 할 정도로 염치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저. 커피 정도는 사 드릴 수 있다구요.”
“(내가 개손해 같은데.).”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적어도 앞으로는 점심에 밥 먹는 시간이 전처럼 외롭지는 않을 것 같다.
오후 1시 10분.
점심시간 끝. 회사로 복귀.
“후우.”
아침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직장인의 하루는,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