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Welcome to My Morning (1)
오전 6시.
기상 시간.
“끄으윽.”
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찐한 신음과 함께한다.
눈을 뜨면, 에덴파크 모텔 208호의 빛바랜 천장이 보인다. 그리고 오늘도 힘차게 삐거덕거리는 낡은 침대 위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내가 있다.
“……후우…….”
이제는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
<사이버판타지>의 세계에 빠진 지 한 달째. 나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하루하루를 그저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꾸역꾸역 살아가는 중이다.
“……10분만 더 잘까…….”
이곳 에덴파크 모텔에선 알람을 맞출 필요가 없다. 자동차 경적음, 수도관 물줄기 소리, 옆집 부부의 수다…… 새벽 어스름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소음들이 아침잠을 상냥하게 방해해 주기에.
눈꺼풀을 반 정도만 닫고 몽롱함 속에 뒤척거리다 보면 적당히 시간이 지나가 있다. 피로는 전혀 가시지 않았지만,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오전 6시 18분.
슬슬 일어나야 할 시간. 화장실에 가서 샤워를 하며 정신을 차린다. 가끔 뜨거운 물이 잘 나오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땐 <강화> 마법을 써서 찬물을 덥혀 주면 된다. 편리한 흑마법이다.
오전 6시 40분.
출근 준비. 창고형 옷가게에서 염가로 구매한 와이셔츠와 진회색 정장 바지를 갖춰 입는다. 넥타이나 구두도 당연히 싸구려다. 그래도 나중에 여유가 생긴다면 백화점 같은 데서 품질 좋은 옷을 사서 입어 보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해 볼 일이다.
「다음 소식입니다.」
「메이슨 전 시장 피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돼 체포되었던 제임스 윌크스 오스왈드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습니다.」
「연방검찰은 오스왈드가 사건 전날 밤부터 당일 아침까지 불륜을 목적으로 내연남의 자택에 있었다는 증거를 확보했고, 이를 통해 알리바이를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오스왈드의 부인은 현재 이혼 소송을 준비 중이며, 공석인 시장직에 대한 재보궐선거는 6월 12일에 치러질 예정입니다.」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은 뉴스를 틀어 놓는다. 아침 뉴스의 앵커가 알리는 소식은 대개 별 볼 일 없다. 뭐, 아직 이 도시는 평화로운 편이었다.
오전 6시 58분.
7시가 되기 전 일찍 방을 나선다. 1층으로 내려가던 도중, 계단참에서 누군가와 마주친다.
짧게 자른 백발에 묘하게 카리스마 있는 눈빛을 가진 노령의 여성. 이 모텔의 주인 할머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
“간밤에 보슬비 좀 내리더니, 덕분에 미세먼지가 많이 씻겨 나간 모양입니다.”
집주인 할머니는 보통 프런트 데스크에 계시나, 이따금 지금처럼 모텔 안을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줍거나 하신다. 워낙 무뚝뚝하신 분이라 여태까지 나는 이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럼 이만, 좋은 하루 되세요.”
나는 자연스럽게 계단을 빠져나갔다. 몇 번 대화해 보니까, 집주인 할머니는 참 좋으신 분 같다.
이곳 에덴파크 모텔은 빈말로라도 훌륭한 숙박업소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반대로 그렇게까지 형편없고 끔찍한 곳인 것도 아니다.
일단 관리비 포함 월 숙박비 750달러는 집값이 사정없이 미쳐 날뛰는 시에라시티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꽤나 합리적인 집세라 할 수 있었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회사 접근성은 그리 나쁘지 않고, 치안도 좋은 편이다.
언젠가는 모텔 장기 투숙 생활을 벗어나 정상적인 주택으로 이사를 해야겠다고는 생각하나, 그것 역시 몸과 마음의 여유가 허락할 때 얘기다.
오전 7시.
모텔에서 나온다.
회사까지 가는 길은 모텔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역으로 간 뒤, 거기서 지하철을 타고 다섯 정거장. 허나 지금은 구태여 도보로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른 버스 정거장으로 향한다.
나는 웬만해서는 아침을 꼭 먹는 편인데, 집에서 아침을 해결하는 경우는 드물다.
모텔 방 냉장고는 음료 몇 캔 넣으면 꽉 차 버리는 초라한 사이즈고, 찬장은 바퀴벌레들의 안방인데다 정체 모를 쉰내가 풀풀 풍기는지라, 통조림 외의 음식을 보관하기는 아무래도 꺼려진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내가 선택한 해결책은 바로 ‘외식’이다.
오전 7시 13분.
횡단보도 두 개를 건너 사거리 앞 도로변에 위치한 간이식당 <호손 그릴 다이너>에 도착.
“어서 오세요~.”
식당 안으로 들어서면, 명랑한 종업원의 목소리가 차임벨 대신 울려 나를 반긴다.
이른 시간부터 손님이 꽤 있다. 다행히 안쪽 테이블이 한 군데 비어 있어, 그리로 가 앉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손님. 주문하시겠어요?”
나는 메뉴판을 살폈다. 24시간 영업하는 이 식당의 메뉴는 낮이건 밤이건 크게 변함이 없다.
“흐음.”
아침에 먹기에는 역시 아침 식사 세트만큼 잘 어울리고 든든한 게 없다.
세트를 시키면 빵 종류는 토스트, 와플, 머핀, 팬케이크 중에 취향껏 고를 수 있고, 고기도 소시지, 베이컨, 치킨, 스테이크로 다양하게 준비돼 있으며, 여기에 계란 요리와 감자튀김이 곁들여진다.
원한다면 버거나 샌드위치 같은 것을 추가로 주문해도 좋다. 허나 거기에 더해 사과 파이와 초콜릿 셰이크까지도 생각 중이라면, 오늘 먹어야 할 끼니가 앞으로 두 번이나 더 남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천천히 욕심을 집어넣도록 하자.
“브렉퍼스트 하나. 팬케이크에 베이컨으로요.”
“계란은 어떻게 해 드릴까요?”
“음, 스크램블로요.”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우유 든 커피랑, 또, 오늘의 수프도 주세요.”
“브렉퍼스트 콤보, 밀크 커피, 그리고 수프 맞으시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80년대 로큰롤 사운드를 들으며 멍하니 창밖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마치 혼자서 멀리 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찰나의 현실도피를 즐기고자 귀하디귀한 아침 시간을 소비해 가며 매일 이곳에 들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전 7시 25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맛있게 드세요~.”
냄새도 비주얼도 끝내준다.
먹을 걸로 가득한 접시가 테이블 위에 오르면 그것만으로 만족감에 벌써부터 배가 불러온다.
“자, 어디…….”
먼저 갓 나온 따끈따끈한 수프를 한 스푼 떠서 입 안에 넣는다. 오늘의 수프는 멕시코풍 칠리 토마토 수프. 매콤한 맛이 적절히 가미된 토마토 수프만큼 아침의 졸린 입맛을 깨우는 것도 없다.
다음은 계란. 폭신폭신한 스크램블 에그는 그야말로 황금빛 기적이다. 토마토 수프와의 궁합도 최상. 이어서 기름이 딱 좋게 빠진 베이컨도 한입. 혀에 소금기가 묻어 있을 동안 메이플 시럽에 푹 적신 달달한 팬케이크를 냠. 단짠의 도파민에 그윽하게 취해 버린다. 그쯤이면 식욕이 최대치에 달하고, 그때부터 나는 그저 음식을 먹는 일에만 열중하는 식사 기계가 된다. 그리고 어느샌가 접시를 싹싹 비운다. 커피 한 잔을 리필할 시간은 충분하다.
“후우우.”
브렉퍼스트 콤보 8달러. 우유 든 커피 1.5달러. 오늘의 수프 2.5달러. 단돈 12불짜리 행복이다.
오전 7시 45분.
식사를 마치고 가게서 나온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출근길에 오른다. <호손 그릴 다이너> 바로 앞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는데, 보통 금방 한 대가 온다.
정기권을 보여주고 탑승. 비콘스트리트역 앞에서 내린 다음 지하철로 환승. WPT 1호선에 오른다.
시에라시티의 지하철은 서울의 지하철과 비교하면 여러 부분에서 다르다. 물론 부정적인 쪽으로.
요금은 싼 편이지만, 그만큼 역내 시설과 객차의 관리 상태는 매우 부실하다. 이것도 웨스트록 쪽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가령 노스네스트의 지하철은 쓰레기 매립장과 많은 면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땅 아래 쓰레기가 넘쳐난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니들도 귀가 달렸다면 알겠지만.」
「노란 선 밖으로 물러나 주십시오. 안 그랬다가 뒈져도 난 모르니까.」
유명 코미디언이 녹음했다는 새 안내방송은 승객들 사이에 호평 일색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열차 출발합니다. 뿌슝빠슝.」
덜커덩덜커덩―.
만원 전철이 달려 나간다.
열차 안은 이 도시에 서식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목격할 수 있는 장소다. 아니, 사실 인간만이 아니다. 오크, 엘프, 드워프, 고블린, 수인종, 그 외 소수 종족들, 모든 가난한 이들이 똑같이 땅속의 네모난 기계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여기서는 그 누구라도 기회만 있다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니, 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공명정대한 이곳에서의 시간을 모두가 만끽하며 달려갔다.
오전 8시 21분.
킹스턴애버뉴역에 도착.
여기서 회사까지는 걸어서 딱 10분 거리다. 가는 길에는 핫도그, 케밥, 크레페 등 길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들이 줄지어 서 있어 빈속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식욕을 악마적으로 꼬드긴다. 다행히 배가 터지게 먹고 온 나는 이에 어느 정도 면역이다.
오전 8시 33분.
회사에 도착. 캐니언 빌딩 13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잠긴 사무실 문을 연다. 원래는 사무실 열쇠를 (국룰대로) 문 앞 화분 밑에 두었지만, 보안을 고려해 각자 항시 지참하기로 했다. 참고로 사장님은 열쇠를 안 들고 다닌다. 허나 그 인간이 열쇠가 없어 곤란했던 적은 전무후무하다.
출근하면 바로 사무실 불을 밝히고 자리에 가서 컴퓨터 전원부터 켠다.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구석 콘센트 앞에 자리한 고물 안드로이드― 타이퍼의 상태를 살핀다. 배터리가 다 충전된 것 같으니 이 녀석의 전원도 켜준다. 작동까진 10분쯤 걸린다.
아침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메일 체크. 회사 앞으로 온 우편과 전날 밤부터의 이메일을 싹 다 읽어보고 특이사항이 있나 알아본다. 답신이 필요한 메일에 답장을 보내고, 별다른 이슈가 없으면 넘어간다.
9시까지는 국제 무역-금융-경제 정세를 체크하는 시간이다. 블룸버그, 시에라 타임스, 아세아프레스 등의 일간신문들을 훑어보는 것으로 최신 정보를 빠르게 숙지한다. 향후 시에라시티에서 벌어질 큼지막한 사건들은 대략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환율 변동 같은 일상 속의 자잘한 정황들을 알려면 그저 성실하게 꾸준히 챙겨볼 수밖에는 없다.
오전 8시 55분.
스몰필드 씨가 출근.
“좋은 아침입니다, 스몰필드 씨.”
“아……. 안녕하세요, 팀장님…….”
그녀는 쭈뼛거리며 맞인사를 했다.
근데 왠지 말하는 동안 자기 입을 손으로 계속 가렸다. 가만 보니 다른 손에 먹던 중인 크레페가 들려 있다. 아아, 거길 그냥 지나치지 못했나 보군.
“그거 무슨 크레페예요?”
“……딸기 바나나 누텔라요.”
“이런, 정말 맛있겠네요.”
“……죄송합니다. 다 먹고 들어오려 했는데, 그으, 실은 이게 두 개째라서어…….”
“괜찮습니다. 가끔 사무실에서 피자도 시켜 먹는데요, 뭐. 천천히 맛나게 드세요.”
“……넵.”
한때 스몰필드 씨는 (아마도 과거 ‘유진 연’의 행실 때문인지) 나란 존재를 상당히 질색하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질 만큼 선명했으나, 한 달여의 노력 끝에 최근 들어 간신히 그녀의 호감도를 약간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음을 실감하는 중이다.
그나저나.
“스몰필드 씨, 안경 바꿨어요?”
“네, 네?”
“테가 얇길래요. 원래는 까만 뿔테 쓰셨잖아요.”
“아……. 네에. 아침에 렌즈 닦다가, 힘 잘못 줘갖고 부러져 버려서…….”
“그래요? 음,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게 나은 것 같네요. 얼굴이 덜 가려져서 보기 좋아요.”
그즈음 스몰필드 씨의 표정이 확 굳었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불쑥 자기 자리로 향했다.
뭐지? 말실수라도 한 건가? 나는 뒷목을 긁적이며 신문을 접었다. 이제 곧 일할 시간이었다.
오전 9시.
업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