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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27화 (27/201)

27화. Killing In The Name (4)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밤하늘이었다.

나른한 곤색에 자장가처럼 섞인 검정, 아크릴 물감을 덧댄 듯 어슴푸레하게 젖은 묵빛의 바다.

백금색 그믐달 아래, 지평선에서부터 까만 밤의 천장까지 흘러 오른 은하수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빛으로 온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작은 언덕이었다.

먼발치에 나지막하게 뻗은 산등성이 쪽으로, 밤바람처럼 시원하게 펼쳐진 들판이 보였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언덕을 내려와 천천히 걸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은은한 새벽 내음이 풍기는 공기를 마시며 걷다 보니, 어느새 들판의 한가운데까지 와 있었다.

그곳의 풀밭에는 밤하늘 아래를 자유롭게 노닐고 있는 한 무리의 새끼 양들과, 한 소녀가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 곱고 긴 검은 생머리. 아리따운 장식과 무늬가 들어간 비단옷. 복장은 유목민의 것 같기도 했고, 중세 귀족의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살짝 허리를 숙이고, 새끼 양 한 마리와 얼굴을 맞댄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친동생을 향해 웃음 짓는 누이처럼 보였다.

문득, 소녀가 이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싱긋 웃었다. 허나 아까 지은 것과는 조금 성격이 다른 미소였다.

이후 소녀는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나는 약간 거리를 두고서 그녀를 따라갔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들판의 뒤편에는 작은 동산이 있었다.

동산을 오르는 길은 전혀 험하지 않았다. 돌부리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부드러운 오솔길이었다.

“밤이 어여쁜 날이었다.”

걷던 중, 소녀가 목소리를 냈다.

마땅히 추임새나 대꾸 따위를 바라는 눈치는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내가 가만히 들어주기를 원하는 듯했다.

“해가 떨어져도 하늘이 밝았다. 달과 별의 빛이 아뜩히 무성해, 산기슭 가장자리에 피어난 풀꽃의 군세가 북극성보다도 훤하게 보였다.”

“그날 밤에 나는 말린 곡식을 넣어둔 창고 앞을 지키고 있었다. 동생이 기르는 새끼 양이 그것을 훔쳐 먹지 않도록.”

“문간에 기댄 채로 하늘의 별의 개수를 세어 보다, 밤에 홀린 듯 기분 좋게 잠에 빠졌다.”

“아끼던 칼을 도둑맞았음을 깨달은 것은 동 틀 녘, 잠에서 깨어난 바로 그 직후였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도둑맞은 것임을, 나는 확신했다. 도둑이 누군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거야 동생이겠지. 사랑스러운 장난꾸러기 내 동생.”

“동생은 자주 내 칼에 눈독을 들였었다. 무엇에 쓰려고 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나는 동생을 찾아가 따졌다. 네가 내 칼을 가져가지 않았느냐. 동생은 모른다고 답했다.”

“칼은 헛간에서 찾았다. 안쪽 구석의 장작더미 밑에, 누군가 숨겨 놓은 것처럼 거기에 있었다.

“그날 나는 아버지에게 심한 매를 맞았다.”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다. 두 번 다시 네 형제를 의심하지 말라고.”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억울함보다도 슬픔이 강했다. 더는 그 아이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을 죽였다.”

소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야트막한 둔덕. 돌로 쌓은 제단 하나가 나와 그녀 사이에 덩그러니 있었다.

“죽은 자는 신뢰할 수 있지.”

“…….”

“허나 너는 아직 죽지 않았다. 네가 나를 위해 줄 수 있는 것은 삶만큼 덧없고 하찮은 죽음뿐.”

소녀는 제단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자그마한 주먹으로 턱을 괸 채, 비스듬히 치켜뜬 눈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제법 보고 싶긴 하구나. 너의 죽음이.”

나는 덤덤하게 물었다.

“그게 네 소원이냐?”

“죽어줄 텐가? 나를 위해?”

“아니. 단가가 안 맞아.”

소녀가 싱긋 웃었다.

“다른 이의 목숨이라면 어떤가?”

“그건 상황 봐서 여러 명도 가능한데.”

“한 명이면 된다. 그 이상은 불필요해.”

그녀는 말했다.

여운에 찬 목소리로.

“언젠가, 너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꼭 살아 줬으면 하는 순간에― 네 손으로 죽여다오.”

아름다운 메아리가 울리는,

끔찍하게 추악한 소원이었다.

“모든 존재를 죽일 수 있는 힘을 주겠다.”

손에는 칼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칠흑처럼 빛나는 날을 가진 검은 단검이.

“너는 죽는 날까지 내 이름만을 부르짖어라.”

칼을 들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온 것처럼.

“나는 부름에 응답할지니.”

일말의 망설임과 후회도 없이―

제단에 누운 소녀의 심장을 찔렀다.

***

─<부름>이란 무엇인가?

옛 기록에서 이것은 본디 <가장 어두운 부름>, 혹은 <죽음의 부름>이라 불리곤 했다. 또한 최근에는 <부름> 대신 <흑화 유발 행위>라는 명칭으로 고쳐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도 나왔었다.

단어의 기원을 통해 알 수 있듯, <부름>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시대에도 긍정 받지 못했던 ‘가장 인기 없는 행위’였다.

<부름>이란 흑마법의 2차 각성 행위로, 악마와의 계약을 뒤집어 반복하는 일종의 이중 서약이다.

이때 술사는 자신의 심장을 바치는 대신 반대로 악마의 심장을 갖게 되는데, 그 대가로 악마의 소원을 들어줘야만 한다. 관계가 역전되는 것이다.

<부름>을 통해 받게 되는 두 번째 힘은 처음에 받았던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그야말로 ‘금지된 비술’이란 이름값에 걸맞은 힘이라 전해진다.

이것은 흑마법사에게 달콤하기 그지없는 유혹이다. 사탕무 껍질을 핥게 한 뒤 눈앞에서 초콜릿케이크를 흔들어 댄다면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어린아이가 과연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허나, 검게 녹슨 욕망을 떨쳐내지 못하여 끝내 <부름>에까지 당도한 자들이여, 알도록 하여라.

처음에 그대는 심연을 들여다보았으나,

이제는 그대 자신이 심연이 될 차례임을.

─***

금발의 남자가 호흡을 멈춘 순간.

스킨헤드 남자, 레오노프는 탄식했다.

‘결국 가짜는 가짜인가.’

그토록 바라 왔던 구세주의 재림.

자신이 그 영광의 자리에 함께하는 것은 당연히 이루어져 마땅한 필연이라고, 그는 믿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는 그랬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런 자한테 휘둘려 신앙과 시간을 낭비하다니.’

한숨이 나올 정도로 한심한 상대였다.

이딴 쓰레기가 이름을 빌리고 다닐 정도로, 암귀란 그토록 존재감 없는 존재가 되었단 말인가.

‘모쪼록 저지른 죄는 달게 갚아야 할 것이다.’

오늘 밤의 용무는 모두 끝났다. 이제 이 죄인을 아지트로 데려가 알맞게 처벌해 줄 뿐이다.

레오노프는 마지막으로 금발 남자의 목을 부러뜨려 죽었음을 확실히 확인하고자 했다.

그때.

‘음?’

두근―.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고동의 발원지는 금발 남자의 몸뚱이였다. 이미 멈췄을 터인 심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살아있었나.’

대수롭게 여길 건 아니었다. 어차피 이런 경우를 대비해 확인 사살을 하려고 했을 무렵이었으니.

차분하게 원래 계획대로 이 자의 목을 부러뜨려 진짜 마무리를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

뭔가가 이상했다.

상대의 목을 붙잡은 손아귀에 도통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투명한 바위에 짓눌려 있는 듯했다.

‘이건…….’

피부로 느껴지는 묘한 기류.

그것은 틀림없는― 살기였다.

“……66…….”

그리고 돌연 바로 그 시점부터.

금발 남자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6. 54. 84…….”

속삭임을 이어갈 동안 호흡은 전혀 없었다. 그저 혼이 빠진 목소리로 숫자들을 나열할 뿐이었다.

“……84. 6. 48. 90. 108…….”

레오노프는 그 숫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다만 공포를 느꼈다. 미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다가올 미래에 대한 확신적인 두려움을. 여전히 손아귀에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 무렵 숫자 나열이 멈췄고, 금발 남자는 심호흡을 하듯 긴 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쉰 숨결에서는 맹독색으로 타오르는 불꽃이 담배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잔불이 떨어진 순간에.

비로소 그가 입을 열었다.

“카인.”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불길하게 들리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악마의 이름이었다.

“나호르.”

정적이 찾아왔다.

고요는 한동안 지속됐다.

레오노프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가 이상을 감지한 것은 10여 초 뒤.

금발 남자의 목을 붙잡고 있는 왼손에서, 무언가 지렁이 같은 것이 앞뒤로 흐느적거리는 듯한,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졌다.

레오노프는 눈동자를 굴려 자기 손으로 향했다.

허나 그는 직접 보고도 피부를 뒤덮은 그 감촉의 정체를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벌레의 유충? 식물의 씨앗?

균이나 포자같이도 보이는 좁쌀만 한 크기의 무언가가, 자신의 왼손에 잔뜩 군집해 있었다.

그 보라색 군체는 마치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저마다 독립적인 방향으로 꿈틀댔다.

여전히 손아귀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

아니,

왼손의 감각이 사라졌다.

그제야 레오노프는 알아챘다.

군체가 자신의 왼손을 갉아 먹고 있었다. 죽은 비버의 시체를 포식하는 흰개미 떼처럼.

보랏빛 균들이 피부를 파고들어 근육을 뚫고 뼈를 긁어냈다. 불과 몇 초 만에 멀쩡했던 왼손은 곰팡이가 스며든 듯이 하얗게 썩어들어갔다.

그는 황급히 뒷걸음질 치며 손을 떼어냈다.

왼손은 벌써 문드러진 지 오래. 굶주린 군집의 행군은 이제 팔꿈치에 닿기 직전이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레오노프는 왼팔을 바닥에 두고, 오른손에 든 마체테를 힘껏 내려쳤다.

콰직―!

팔꿈치 아랫부분이 뼈째로 잘려 나갔다. 다행히도 군집은 잘린 팔을 먹이로 만족한 듯 보였다.

‘…….’

상처의 지혈을 서둘러야 하는 시점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레오노프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소환 마법도, 환영 마법도 아니다.’

수많은 마법사와 대적해 온 그는 알 수 있었다.

저 기이한 보라색 군집의 정체는 비전 마법이라는 것을.

‘가짜가 아니었다.’

생존을 상정해 두지 않은.

오로지 죽이기 위한 마법.

‘드디어.’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품어졌다.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그래.

때가 왔다.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다.

이뤄져 마땅한 필연이었다.

레오노프는 마체테를 들고 전진했다.

잘린 팔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금발 남자 앞에 도착한 그는, 입을 활짝 벌린 채 환하게 웃었다.

“나의 구세주시여.”

“…….”

“당신의 길로 인도하소서.”

나는 순교자가 된다.

자신의 죽음으로써, 이제 이 도시의 모든 골목에 알려질 것이다.

암귀의 재림이.

마법사의 종말이.

‘다 이루었다.’

마체테를 휘두른 순간.

보라색 군집이 그를 덮쳤다.

***

스킨헤드 남자는 사라졌다.

흔적도 남지 않았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나는 기침을 몇 번 하고서, 내 손을 살폈다.

피는 묻어 있지 않았다. 조금 더러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깨끗한 편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어쨌거나 이제는 한숨을 돌려도 되는 타이밍이기는 했다. 긴장이 풀리고 나니 마른 입안이 비명을 질렀다. 목이 타서 죽을 것 같았다.

터벅터벅 걸어가 엉망이 된 바에 가서 원래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바텐더는 내 눈치를 살폈다. 힘 빠진 동작으로 손가락을 올려 음료를 달라는 시늉을 했다.

“그, 커피라도 따라 줄까?”

바텐더가 물었다.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위스키. 큰 잔에 가득 채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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