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Killing In The Name (2)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정말로 무릎을 꿇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순간 당황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암귀……?”
“얼굴 없는 자, 언디파인드, 파별성의 사신…… 이 땅에서 존하를 일컫는 이름은 숱하게 존재하나, 우리는 항상 ‘암귀’라 불러왔습니다. 암흑 속에 도사린 죽음이자 죄의 도시의 악귀, 작디작은 우주의 크나큰 절망— 암귀여, 바로 당신입니다.”
주문 같은 대사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간 범한 무례를 부디 용서하시길.”
“…….”
“그보다 더한 무례로써 감히 청하옵건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스킨헤드 남자는 내가 자기 장인어른이라도 되는 것처럼 싹싹하게 굴기 시작했다. 아까 전에 바텐더가 그에게 보였던 태도의 변화 그 이상이었다. 그런 와중에 목소리 톤은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아 섬뜩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그나저나…… ’암귀’라고 했던가?
완전히 금시초문이다. 일단 <사이버판타지> 본편에 그런 별칭을 가진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사이버판타지> 완전판을 만들면서 마구잡이로 설치했던 외국산 모드 중 하나가 범인이겠지. 흑마법이 그랬던 것처럼, 미지의 개념이 게임 세계관에 의도치 않게 녹아들었음이 분명했다.
어쨌건 현 상황을 미루어 보건대, 놈은 지금 나를 ‘암귀’라 불리는 존재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암귀’란 인물도 나와 똑같이 자색 마력을 가진 흑마법사인 모양이다.
블랙 대거즈의 간부급 인물이 깍듯이 무릎을 꿇는 걸 보면 상당한 거물이 아닌가 싶은데…….
뭐,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멋대로 착각해 준다면야, 살아남기 위하여 이 뜻밖의 행운을 마음껏 이용해줄 뿐.
“……얘기 정도는 들어주지.”
“인자함에 감사를. 여기, 앉으십시오.”
그는 친히 내가 앉았던 자리의 의자를 꺼내 엉덩이를 갖다 대기 편하도록 해주었다.
나는 가급적 티를 내지 않는 한으로 경계를 유지하며 의자에 앉았고, 남자 또한 내 옆에 앉았다.
바텐더는 짐짓 눈치를 살피다 아무 말 없이 음료를 준비하고는 우리 앞에 돌렸다. 나에게는 스텐 컵에 담긴 커피, 스킨헤드 남자에게는 보드카 샷.
“오랫동안 이날을 꿈꿔 왔습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8년 전 크리스마스 이후로 모두들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우리는 아니었습니다. 암귀는 그저 긴 겨울잠에 빠졌을 뿐임을, 언젠가 이 도시에 다시 나타나리란 것을, 오늘이 도래하는 순간을― 우리는 믿고 있었으며, 알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듣던 중에 문득 의문이 피어났다.
8년 전이라면 나, ‘유진 연’이 모종의 범죄를 저질러 징역살이를 시작했던 시기인데…… 우연일까?
아니, 잡생각은 자제하자.
어색하게 행동했다간 바로 들킨다. 지금은 집중해서 놈이 우러러보는 ‘암귀’를 연기해야 할 때.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얘기군.”
“그렇습니다.”
“듣기엔 날 엄청 좋아하는 것 같은데, 당신네 블랙 대거즈는 마법사를 혐오하는 부류들이지 않나? 근데 왜 흑마법사인 나한테 아양을 떠는 거지?”
“당신이 우리를 구원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고, 그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자칫 헛웃음이 나올 뻔할 정도로 꽤나 성스럽고 기가 막힌 단어 선정이었다.
“우리, 블랙 대거즈의 숙원은 마법이라 하는 악의 씨앗을 이 거룩한 땅에서 완전히 뿌리 뽑는 것.”
“…….”
“그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설령 그것이 악마의 힘일지라도 빌릴 각오가 되어 있기에, 우리는 당신을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 온 것입니다.”
치를 떨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나는 객기보다도 당차고 분노보다도 지독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러니 암귀여. 죽음마저도 죽음에 이르게 할 자여. 추악한 검은 힘에 영혼을 팔아넘긴 악마여.”
그는 신께 기도하듯이 말했다.
“원컨대, 우리의 구세주가 되어 주소서.”
그리고 나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대답하길 기다리는 듯, 그 상태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같이 일하잔 얘기지?”
분위기를 최대한 맞춰 주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근엄하게 말하는 법을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정확히 뭘 하면 되는데?”
“암귀로서 하시던 걸 하시면 됩니다.”
“그쪽이 나한테 줄 수 있는 건?”
“원하신다면 무엇이든 바치겠습니다.”
내용은 하나같이 모호하기 짝이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나한테 돌아올 결과물이었다.
‘블랙 대거즈와 같은 편이 된다.’
시에라시티에서도 내로라하는 거대 팩션 중 하나와 손을 잡는다는 건, 두말할 것 없이 뒷세계에서의 영향력을 왕창 확보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안 그래도 이 어질어질한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갈 동료의 존재가 절실하던 시점에, 공짜로 치트급 전력을 등에 업게 되는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선 뺄 이유가 없다.
“좋아. 하지.”
내가 실은 암귀가 아니란 사실만 들키지 않으면 되는 문제고, 그것도 딱히 어렵지는 않아 보인다.
짐작이지만 아무래도 ‘암귀’란 인물은 소문으로만 떠도는 도시전설 속의 존재인 모양이라, 세간에 구체적으로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이놈도 자신들의 구세주랍시고 칭송하며 떠받드는 주제에, 정작 그 암귀란 놈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제대로 모르는 거겠지.
몇 번이고 말하겠지만―
여기선 뺄 이유가 없다. 조금도.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 이름이……?”
“레오노프입니다.”
“그래, 이제 볼일은 다 끝난 건가?”
“아니요. 뒷정리가 남아 있습니다.”
“뒷정리?”
내가 물음표를 띄운 직후.
스킨헤드 남자, 레오노프는 가죽 코트 안쪽 주머니에 오른손을 집어넣더니 곧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권총이었다.
일순 몽둥이가 아닌가 하고 착각할 정도로 큼지막한 크기의 7발들이 매그넘 권총.
그는 망설임 없이 총구를 옮겼다.
정면, 바 너머에서 내내 없는 사람처럼 입 다문 채 술잔을 닦고 있는 바텐더의 머리 쪽으로.
“어?”
그리고 이내,
방아쇠를 당겼다.
―틱.
그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내 처신이 아주 조금 더 빨랐다. 그가 총을 꺼내든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마력을 날려 권총에 <강화> 마법을 걸었다. 기능 강화를 일부러 틀린 초점으로 유도해, 총기의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레오노프는 먹통이 된 자기 권총과 그렇게 만든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탄이 걸리거나 한 것이 아니라 격발 장치가 완전히 망가졌음을 확인했다.
“……무슨 짓입니까?”
“내가 할 소리거든. 다짜고짜 뭐 하는 짓거리야?”
“뒷정리가 남아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내가 자기 말을 곧잘 이해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선량한 바텐더의 머리통에 매그넘탄을 냅다 꽂아 버리는 행위’를 줄여서 ‘뒷정리’라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어느 언어에서 주로 쓰이는 화법인지가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이 자는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전부 들었습니다. 당신의 존재 역시 알게 되었으니, 술집 주인장의 깃털처럼 가벼운 입방정으로 말미암아 곧 온 도시에 소문이 퍼지게 될 겁니다. ……암귀가 돌아왔다고.”
“그래서? 그게 어쨌는데?”
“그런 식이어선 안 됩니다.”
“뭐?”
“암귀의 귀환이라는 실로 위대한 복음이, 고작 알코올에 찌든 천박한 족속들의 싸구려 가십거리로서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방식은 그보다 훨씬 잔혹하고…… 끔찍하고…… 무자비하게…… 피와 내장으로 범벅이 되어야 합니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비릿한 섬뜩함을 느꼈다.
그때 문득 나는 넝쿨째 굴러 들어온 행운에 취해 한동안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야말로, 이 도시에서 가장 잔악무도한 테러리스트들 중 하나란 사실을.
“허나, 이런 시시껄렁한 뒷정리에 암귀의 손을 더럽히는 것도 좋지 않으니, 제가 나서야 했습니다.”
“죽이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물론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요. 신성한 메시아의 재림을 결코 욕보여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건 사람을 죽일 이유가 못 돼.”
그 무렵.
나를 향한 레오노프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언제부터입니까?”
“뭐?”
“언제부터 암귀가 사람을 죽이는 데 이유를 따졌냐는 말입니다.”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슬슬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암귀란 놈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주구장창 죽여 댔던 정신 나간 살인귀였던 모양이다.
“아까 전부터 마치 사람 한 명 죽여 본 적도 없는 애송이나 할 법한 말들을 늘어놓던데.”
“…….”
“당신, 정말로 암귀가 맞나?”
자아, 침착하자.
빌어먹을 오지랖 때문에 그르칠 위기긴 하지만, 아직 죄다 망친 건 아니야.
“레오노프, 지금 날 의심하는 건가?”
“의심할 수밖에 없지. 내가 아는 암귀는 살인 한 번에 호들갑을 떠는 겁쟁이가 아니다.”
“웃기는군. 나에 대해서 뭘 그리 잘 안다고 떠들어? 실제로 날 만난 것도 오늘이 처음인 주제에.”
“…….”
“오해는 하지 마. 쉬는 동안 사상이 조금 유해졌을 뿐이니까. 그래도 뭐, 내 실수로 잃어버린 신용을 회복하려면,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엔 없겠지.”
지금부터 내 손으로 바텐더를 죽이겠다―.
마지막에 던진 말은 대략 그런 선언이었다.
나는 시선을 슥 돌려 바텐더를 보았다.
그는 제자리에서 와들와들 떨고만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에 두고, 공포에 몸이 굳어 버려 도망칠 생각마저 못 하고 있는 꼴이었다.
설령 내가 제대로 된 마법도 못 쓰는 초짜 마법사라 해도, 이런 상태의 인간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어린아이를 울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나와는 하등 상관도 없는 생면부지 타인이지 않나. 아까 전에 만나 겨우 얼굴을 텄을 뿐이다.
그래, 생각해 보면 이 인간, 처음에 손님으로 온 나를 맞이하는 태도도 참 맘에 들지 않았다.
근데 또 내 정체를 알자마자 되레 굽신굽신하기 시작했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타입이다.
커피라도 맛있게 탈 줄 알았으면 최소한의 동정은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마저도 실패하셨구만.
하여간, 본인 업보라 생각하쇼.
“…….”
죽이는 건 쉽다. 어려울 것 없다.
<사이버판타지>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건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예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이 게임은 시스템적으로 플레이어가 악행을 저지르기를 적극 권장한다.
나쁜 짓을 저지르면 악명과 바이스 포인트를 얻는다. 악명이 높을수록 퀘스트 보수가 늘고 뒷세계에서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며, 바이스 포인트로는 특수한 패시브 스킬인 퍽perk을 배울 수 있다.
나는 악당 짓거리엔 도가 튼 플레이어였다.
새롭게 익힌 스킬 테스트 겸 심심풀이로 민간인 NPC들을 학살하거나, 레어 장비를 얻기 위해 친밀도 만땅을 찍은 동료 캐릭터를 죽여 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죽이는 건 쉬웠다.
어려울 것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게임이었으니까.
게임 속 캐릭터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얼핏 살아있는 것 같아도, 그저 0과 1로 이루어진, 조리 있게 잘 만든 데이터 덩어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존재는 다르다.
아프면 비명을 지르고, 죽으면 움직임을 멈추며, 살아있음에 감사를 여기며 살아가는.
현실의 사람.
살아있는 사람이다.
“주인장.”
“…….”
“미안하게 됐어.”
나는 오른손을 들었다.
눈앞의 존재를 겨냥하여.
“가게를 부숴 버려서.”
테러리스트를 향해.
체내의 마력을 방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