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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17화 (17/201)

17화. A Taste of Honey (4)

‘뭐, 뭐야?!’

순식간에 벌어진 재앙에 비너스는 당황했다.

마력의 폭풍우 속에선 한 치 앞마저 보이지 않았다. 시야는 모조리 화염으로 휩싸였다.

‘이건, 혹시……?’

비너스는 곧 눈치챘다.

눈앞에 펼쳐진 재앙의 정체를.

―마력 방출.

<헬파이어 레인>도 아니고,

<프로미넌스 스톰>도 아니다.

체내의 마력을 방출했을 뿐이다.

단지 말도 안 되는 거대한 규모로.

‘어디까지 뻗은 거야, 도대체……?’

주변은 온통 세찬 불꽃으로 휩싸여 있었다.

이 정신 나간 마나 폭풍의 영향력이 미치는 거리가 어디까지일지,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사그라들 기미가 없어. 오히려 점점 더 세게 몰아치고 있잖아. 자색 마력의 유지력은 최악일 텐데……. 설마, 실시간으로 뿜어 대고 있는 거라고?’

저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과연 이 정도라면 마력 보유량을 감히 ‘무한대’라 칭할 만했다.

‘으으으! 진짜 갖고 싶어 죽겠네, 저 심장!’

비너스는 와중에 입맛을 다셨다.

괴물 같은 마력 방출에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긴 했지만,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다.

순수한 마나에는 아무런 위력도 없다.

아무리 광대한 규모의 마력 방출이라고 해봤자, 결국엔 성냥불만도 덜 위협적인 셈이다.

‘……잠깐…….’

하지만 그때.

비너스는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온도감이……?’

피부를 감싼 불꽃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열기.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저 시각적인 충격에서 오는 착각일 거라고 생각했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만질 때와 같은 통증이, 완드를 붙잡고 있던 손바닥을 덮치기 전까지는.

“앗, 뜨거!”

비너스는 얼른 손에서 완드를 놓았다.

손바닥은 미약한 화상을 입어 붉어진 채였다.

‘…….’

그제야 그녀는 알아챘다.

완드를 달군 열기의 정체를.

‘강화한 거야. 마력에 있는 열에너지를.’

마법사가 쓰는 완드는 필연적으로 마력의 영향을 잘 받도록 설계되었다.

뜨거운 마나 불꽃에 접촉한다면 열의 전달도 훨씬 빠르게 일어날 터.

―에너지는 어디에나 존재하죠.

―이를테면 마력 불꽃에도 아주 미약한 열에너지가 있으니까요.

가르쳐준 걸 바로바로 써먹다니.

기분 나쁠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다.

‘심장의 마나는 무한. 멈추려면 죽여야 해.’

비너스는 <펄스 블레이드>를 준비했다.

완드가 없어 위력은 떨어지겠지만, 사람 모가지를 날리기엔 모자람이 없을 터였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유진을 속박하고 있던 <파리지옥>이 완드를 떨어뜨린 순간 반동으로 풀려 버렸다는 것.

‘……어디 있지……?’

시야는 자색 불꽃에 잠식돼 있었다.

마나 폭풍은 실로 자유분방하게 몰아치고 있어 그 정확한 발원지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젠장, 어디야! 위치를 모르겠어!’

‘어쩌지? 그냥 되는대로 막 갈겨 볼까?’

‘아냐, 그러다 심장이 다치면 어떡해! 그럼 말짱 꽝이라구!’

콱 울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꽃의 열기가 점차 강해지는 만큼, 공포가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

그리고 어느새.

눈치챌 만큼 가까워졌다.

‘아.’

―등 뒤에 있었다.

“께엑?!”

유진의 팔뚝이 비너스의 목을 강하게 옥좼다. 이어서 양손의 손목을 붙잡아 꺾었다.

바둥거리는 그녀의 귀에 대고 유진이 속삭였다.

“완드 들고 다니는 마법사들은 공통점이 있지.”

“읍…….”

“완드가 없으면, 눈물 나게 약하다는 거.”

<사이버판타지>에서 마법사 캐릭터는 근접전 보완형과 원거리 특화형으로 나뉜다.

어떤 유형인지는 장착 중인 장비로 대략 파악할 수 있다. 대표적인 원거리 특화형의 무기 장비는 출력과 조준을 보조하는 전통적 목제 매직 완드.

“<펄스 블레이드>에 <파리지옥>. 둘 다 고등 마법은 아니지. 넌 그렇게까지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는 아니란 얘기야.”

레벨이 높지 않은 원거리 특화형 마법사의 경우, 완드 없이는 전투력이 급격히 저하된다.

비너스가 간과한 점은, 완드의 마력 보정 없이는 유진의 강화 마법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손은 묶었다. 수인은 못 맺어. 목도 계속 조르고 있을 거니 영창도 외울 수 없어. 죽을 때까지 풀어줄 생각은 없고 말이지. 어떻게 죽일 거냐고? 글쎄.”

유진이 말했다.

“사우나는 좋아하나?”

마력 불꽃의 열기가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오븐 속에 있는 기분이지?”

“웁, 웁……!”

“지금부터 온도를 계속 높일 거야. 나는 신체 강화로 버틸 수 있지만, 넌 어떨까? 강화 마법은 쓸 수 있어? 마력은 충분한가? 과연 너랑 나 둘 중 어느 쪽 마력이 먼저 닳아 없어질까?”

“우으읍……!”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고.”

화아아아악―!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땀마저 금세 증발해 버릴 정도의 고온이 되었다.

비너스는 발버둥을 쳤다. 뼛속까지 달궈 대는 화마에 온몸이 지글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워. 뜨거워. 뜨거워!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녹아내린 뇌, 그을린 피부, 익어 버린 내장…… 상상도 못 할 고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 더없이 끔찍한 잿빛 절망만이 선명하게도 상상이 되었다.

이윽고 가장 먼저 타 버린 것은,

공포에 짓이겨진 그녀의 의식이었다.

“……?”

대뜸 비너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눈알은 부릅뜨고 입에는 거품을 문 채였다.

“……기절한 건가…….”

유진은 마력 방출을 멈췄다.

자색 불꽃에 점령당했던 대지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숱한 긴장을 머금은 정적이 몇 분간 지속됐으나, 그녀가 다시 의식을 되찾는 일은 없었다.

“후우.”

혈투가 끝났다.

승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고, 패자는 흐느적거리며 땅바닥에 엎어졌다.

유진은 쓰러진 적의 상태를 살폈다.

아무래도 완전히 정신을 잃은 듯 보였다. 내버려 둔다면 이대로 몇 시간이고 혼절해 있을 터였다.

―죽여야겠지.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는 자다. 언젠가 분명히 다시 습격해 올 테지.

죽이는 것은 쉽다. 악력을 조금만 강화한다면 이 여자의 얇은 목을 부러뜨리는 것쯤은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줍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일이다.

유진은 손을 뻗었다.

쓰러진 적에게, 불에 타 죽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인자하고 깔끔한 최후를 선사해 주기 위해서.

허나―

목전에서 손은 정지했다.

“…….”

이게 게임이었다면 죽였을 것이다.

고민이나 망설임 따위 하지도 않고서.

―하지만 달랐다.

이곳은 너무나도 생생한 현실이고,

눈앞에 있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악마와도 계약했을지언정,

아직 사람을 죽일 각오는 되어 있지 않았다.

사실 꼭 죽이는 게 정답인 것도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찾아낸) 죽이면 안 되는 이유 또한 있었다.

우선 시체 처리가 곤란하다.

여기는 상당히 외진 지역 같긴 하지만, 방금 전의 소동으로 사람이 몰려올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시체를 숨기고 나서 도망갈 시간이 촉박할 거다.

나중에 시체가 발견되든 실종 신고가 이루어지든 어느 쪽도 자신에게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저녁에 함께 카페에서 한 시간 넘게 있었으니까. 목격자가 나온다면 유진은 바로 용의선상 1순위에 오른다.

혹시라도 살인한 것이 들키기라도 했다간 그때는 아예 끝장이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A급 전과자라는 게 문제였다. 정당방위를 주장해 봤자 재판장에서 전과자의 말을 믿어줄 리는 만무할 터.

“……하아…….”

유진은 한숨을 쉬었다.

피로, 근육통, 스트레스― 머리를 굴리기도 이제는 지쳤다. 허나 빨리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눕기 위해서라도, 이 난장판을 나이스하게 해결해야만 했다.

그는 쓰러진 비너스의 몸을 수색했다.

소지품으로는 자동차 키, 그리고 절연테이프와 케이블타이가 나왔다. 용도는 필히 자신을 제압한 뒤에 구속해 두기 위한 준비물인 것으로 보였다.

조금 의아했다. <파리지옥> 같은 속박 마법을 쓸 수 있으면서 굳이 이런 것까지 준비하다니.

하기야 완드 없는 상태에선 제대로 마법도 못 쓴 걸 생각하면, 어지간히 허접 마법사였던 모양이다.

유진은 테이프를 서너 겹 붙여 비너스의 입을 틀어막고 케이블타이로 손과 발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런 다음 바닥에 떨어진 완드와 자동차 키를 챙기고, 비너스를 거기에 둔 채 운동장을 떠났다.

깊은 밤, 황량한 사막 같은 공터에 뚫린 유일한 흙길을 따라 무던히 십여 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포장된 도로가 펼쳐졌다. 환한 가로등 불빛 아래로 길 안내 표지판과 공중전화도 있었다.

유진은 전화박스로 들어갔다. 수화기를 들고 10센트 동전을 하나 집어넣었다.

생각 없이 112를 누르려다 잠깐 멈칫, 다시 정신 차리고 똑바로 911을 눌렀다. 곧 전화가 연결됐다.

「911입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30번 국도 근처 버려진 기숙학교 운동장에, 지난주 사우스아치에서 남자 2명을 죽인 범인이 있습니다. 도망 못 치게 묶어 놨으니까 빨리 와서 잡아가십쇼.”

「……예? 잠시만요, 신고자 분 성함이……」

뚝―. 그는 전화를 바로 끊었다.

전화박스서 나온 직후, 저만치 도로 한 쪽에 세워져 있는 에메랄드빛 광택의 자동차를 발견했다.

유진은 그리로 향했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일단은 빌어먹을 방향제부터 갖다 치웠다.

“흠.”

그르릉―!

시동을 걸자, 8기통 엔진이 괴성을 질렀다.

“나쁘지 않네.”

엿 같은 밤이긴 했지만,

전리품은 꽤 맘에 들었다.

***

늦은 밤.

시에라시티 교외의 한 버려진 기숙학교 운동장은 오늘따라 드물게도 사람들로 들끓었다.

수 시간 전 이곳에 살인 용의자가 있다는 신고를 받아 석 대의 경찰차가 출동한 탓이었다.

“킁.”

그리고 그 무렵, 차에서 내린 한 남자가 코를 훌쩍이며 운동장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게슴츠레한 그의 눈은 핫소스를 잔뜩 뿌린 계란프라이처럼 흰자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깁슨 경위님.”

“이 녀석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남자― 아서 깁슨은 현장을 살폈다. 순경이 바닥에 라이트를 비추자, 거기에 완전히 구속된 용의자가 상당히 언짢은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신원은?”

“용병 마법사랍니다. ‘비너스’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잡범인데, 체포 기록도 몇 번인가 있었습니다.”

“송사리구만. 누가 이렇게 해 놨대?”

“아직 파악 못 했습니다. 다만 기지국에서 얘기하기로 3시간쯤 전 이곳 일대에 전파장애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마법전의 여파가 아닐까 하는데요.”

“전파에 지랄이 날 정도였으면 상당한 고래 싸움이었을 텐데……. 사건 파일 좀 줘 봐.”

“여기 있습니다.”

순경이 아서 깁슨에게 PDA를 넘겼다.

그는 단말기를 보며 턱을 긁었다. 덜 깎은 수염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짧은 손톱에 쓸렸다.

“이 여자, 녹색 마력 보유자인가?”

“예. 확인한 바로는,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잔존 마나와 이 자의 마나 색채가 일치하긴 합니다.”

“그러면 일단 체포는 해 놓고, 정밀 검사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신고자 정보는?”

“그게, 단서가 전혀 없습니다.”

“그놈을 찾아야 돼. 이 짓거릴 벌여 놓은 놈이잖나. 주변 CCTV라든가 뭐 없어?”

“거의 다 뒤져 봤습니다만 전파장애 영향으로 대부분 먹통이 돼서요. 그나마 찾은 게 하나 있기는 한데, 여기서 3km 정도 떨어진 도로의 카메라에 영상이 남아 있었습니다.”

“보여줘 봐.”

아서 깁슨은 순경이 찾은 영상을 재생했다.

흑백 화면. 오후 9시 21분. 아무것도 없는 도로.

그러다 잠시 후. 거센 진동과 함께 광활한 불꽃이 온 화면을 뒤덮는다. 그대로 영상은 종료된다.

“……이걸로 끝입니다. 이것만으로는 알 수 있는 게 전혀 없죠. 빨리 감식반이 와야 잔존 마나 분석이라도 해볼 텐데, 이것들 왜 이리 늦는…….”

“자색 마력이군.”

“예? 흑백인데 색깔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채도랑 질감으로 대충 구분할 수 있어. 경찰학교에서 배운 좆같이 쓸데없는 스킬 중의 하나지.”

자색 마력이라 하면 기타 색채.

마법을 쓸 수 없다고 알려진 마력이다.

―흑마법사인가.

아서 깁슨은 쉬이 진상을 알아챘다.

그는 딱히 마법에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추론 능력은 제법 좋은 편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저번 주 사건 골목 CCTV에 찍혔던 것도 자색 마력이었어.”

“예? 그렇다는 건…….”

“그때 거기에 있었던 놈이, 지금 여기에도 있었다는 거지.”

용의자는 한 명 더 존재한다.

바로 이 보라색 불꽃의 주인이다.

아서 깁슨은 영상을 재차 돌려 봤다.

아무것도 없는 도로. 거센 진동. 광활한 불꽃.

“그나저나, 이렇게만 봐도 위력이 진짜 무시무시하긴 하네요. 도대체 무슨 마법일까요?”

“마법이 아니야.”

“예?”

“불꽃이 지나갔는데도 주변 환경이 멀쩡하잖아. 이건 그냥 체내 마력을 방출한 거야.”

그러고 보니, 이 영상에 나온 도로가 여기서 3km 정도 떨어진 곳이라고 했던가.

마법사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싸우지 않는다. 특히나 마법사끼리의 싸움은 정적이다. 싸움을 시작하면 같은 자리에서 싸움을 끝내는 게 대다수다.

“…….”

아서 깁슨은 불길한 상상을 했다.

“설마.”

누군가 이 자리에서 방출시킨 마력이,

이곳으로부터 3km 떨어진 장소에 닿았다?

“있을 리가 없지. 그런 괴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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