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Money For Nothing (1)
암흑.
새까만 암흑.
별이 없는 우주에 나 홀로 떠 있다.
노이즈 낀 시야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니.
누군가 거기에 있었다.
어깨를 살짝 넘기는 검은 머리에,
눈처럼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
저 앞에 보이는 것은 그 소녀의 뒷모습이다.
왠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소녀가 이쪽을 돌아본다.
옆으로 살짝 돌아간 고개. 눈은 보이지 않고 그저 입술만 간신히 보인다.
무어라 속삭이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말을 걸어보아도 전혀 닿지 않는다.
소녀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나는―
쿵쿵 쿵쿵쿵!
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유우진!”
격렬한 노크에 이어진 것은,
성난 누군가의 우렁찬 호명.
“유우지이인!”
쿵쿵 쿵쿵쿵!
상당히 부담스러운 모닝콜이었다.
나는 부스스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월요일 아침에 이리도 신명 나는 방식으로 나를 깨워주는 작자는 과연 누구일까.
철컥―. 문을 열어 그 정체를 확인해 보았다.
보아하니, 언니가 눈사람을 같이 안 만들어 줘서 개빡친 어느 공주님은 아닌 듯했다.
“57초 걸렸군.”
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인물은 짐볼 일곱 개를 뭉쳐 놓은 듯한 몸매의 남자.
“문 세 번 열라 치면 컵라면도 끓여 먹겠어.”
허나 내 시선은 곧 그 뚱뚱보의 바로 곁에 있던, 한창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에게로 향했다.
짐볼 한 개에 여유롭게 집안 살림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은, 미취학 아동만 한 사이즈의 존재.
RPG의 단골이자 판타지의 감초.
울퉁불퉁한 녹색 피부를 가진 이종족.
―고블린이었다.
“시간 낭비하기 좋은 아침이지? 유우진.”
이쪽 세계에 오고 나서 고블린은 처음 보았다.
게임상에서도 고블린 NPC는 비중이 크질 않았고, 생김새랑 성능이 비루한 탓에 플레이어블 캐릭터로도 그다지 인기 있는 종족은 아니었다.
“무얼 그리 멍청하게 서 있어?”
“…….”
“빨리, 어서 내 돈 가져오질 않고 뭐 해.”
깔쌈한 보라색 수트를 입고 있는 고블린이 손에 든 나무 지팡이를 내게 들이밀며 말했다.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저번 주에 무슨 빚 갚으라는 독촉 우편 같은 게 온 것 같기도 한데.
“죄송한데, 혹시 제가 돈 빌렸었나요?”
“얼씨구. 오늘 컨셉은 기억상실증 환자냐?”
“아뇨, 그, 빌린 액수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서요. 차용증이 있으면 좀 보고 싶은데요.”
“그래, 그래.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내가 그 차용증 그건 꼭 챙기고 다니지. 옜다, 실컷 봐라.”
고블린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나는 그걸 받아서 펼쳤다.
─차용금액: 일금 660,000 $
채무자: 유진 연
채권자: 저스틴 S. 도노반
─“……이름이 저스틴 S. 도노반이세요?”
“도대체 그딴 건 왜 처 묻는 거냐?”
“그냥 되게 멋진 이름 같아서요.”
“진딧물이한텐 과분한 이름이지, 그치?”
“아무튼 8년 전에 제가 당신한테 66만 달러씩이나 되는 돈을 빌렸다는 거죠?”
“그래, 짜식아. 너 깜빵 가기 전에 말이다.”
허어, 원금만 해도 이 정도나 된다고.
8년이나 지났으면 이자도 꽤 불었을 텐데.
“오늘 갚아야 될 돈은 얼만가요?”
“10,000달러면 일주일은 봐주마.”
“지금 수중에 10달러도 없는데요.”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이놈을 데려왔지.”
고블린은 옆에 있던 뚱보의 종아리를 지팡이로 툭 치며 “어이!”하고 외쳤다.
그러자 세상 편안하게 멍 때리고 있던 뚱보가 느닷없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친구는 하프오크야. ISF 배틀스모 세미프로 출신이고, 몸무게도 200kg이 넘지.”
“확실히 그래 보이네요.”
“얘가 지금부터 널 쥐어팰 거다.”
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댔다.
“얼마나 쥐어팹니까?”
“10,000달러에 한 대씩.”
“총 66대군요. 혹시 반격 허용인가요?”
“할 수 있음 해 봐. 단, 깽값은 별도 청구다.”
“그러면 가만히 맞고 있는 게 낫겠네요.”
“빨랑 시작하지. 시간은 금이라구, 친구.”
“아, 그 대사는 유명하죠.”
고블린은 지팡이로 옆의 뚱보를 툭 쳤다.
그러자 멀뚱멀뚱 있던 뚱보가 대뜸 주먹에 힘을 꽉 주더니, 곧장 내 면상을 향해 펀치를 날렸다.
부웅―!
여기서 잠깐 금요일 밤 얘기를 해보자.
어쩌다 보니 스크랩몽크와 일대일로 맞짱을 뜨게 된 그날 밤 말이다.
악마와 계약해 받은 힘인 ‘강화 마법’을 사용해 어찌저찌 이기긴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때 좀 더 잘 싸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없잖아 있었다.
강화 마법은 말 그대로 신체를 강화하는 마법.
그러니 공격할 때뿐만이 아니라, 방어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주먹을 맞기 직전의 얼굴에다가,
강화 마법을 살포시 걸어 준다면―
뻐억―!
부서지는 쪽은 오히려,
상대의 주먹이 되겠지.
“우, 우우어어엉……!”
뚱보는 내 광대를 때린 손을 부여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손뼈에 금이 간 모양이었다.
“뭐, 뭐야? 이놈 이거 왜 이래? 야! 얀마!”
고블린은 매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쓰러져 울부짖는 뚱보를 자기 지팡이로 마구 찔렀다.
“이제 65대 남았네요.”
“……이, 이게…….”
“조금 서둘러 주시겠습니까. 슬슬 회사 갈 준비해야 되거든요.”
내가 하품을 하면서 그렇게 말하자, 고블린의 초록색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1년 치 이자 22만 2,700달러! 다음 달까지 준비 못 하면 밤비타운 노역장에 보내 버릴 테다!”
그는 꽥꽥 소리를 지르며 바닥의 뚱보를 축구공 삼아 복도 반대편으로 드리블해 사라졌다.
“후우.”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현관문을 닫았다.
“출근해야지.”
기운이 넘치는 월요일 아침이었다.
***
매월 전과세 300달러.
밀린 숙박비 750달러.
갚아야 할 빚 22만 2,700달러.
“총 22만 3,750달러인가…….”
당장 못 내면 큰일 나는 돈.
원화로 치면 거의 3억에 가까운 액수다.
나는 지갑을 꺼내 보았다.
들어 있는 것은 1달러 지폐 두 장. 주머니에는 따로 짤랑거리는 동전 몇 개.
“2달러 32센트…….”
현금은 가진 게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나마 통장에 있던 얼마 안 되는 푼돈마저 생활용품들을 구비하느라 죄다 써 버린 뒤다.
그러니까,
그냥 개털이었다.
“하…….”
당장 오늘 점심 사 먹을 돈도 없다.
어렴풋한 기억으론, 분명 캐릭터 생성할 때 시작 자금에 보너스가 어쩌고 했던 것도 같은데…… 대체 어딜 봐서 보너스가 있다는 건지, 원.
하여튼 간에 돈이 필요했다.
<사이버판타지>에는 캐릭터 소지금 상황에 따라 파산 이벤트는 있어도 굶어 죽는 시스템까진 없었지만, 여기서라면 필히 둘 다 있을 테니까.
월급날이 언제인지부터 알아봐야겠지.
봉급이야 뭐 쥐꼬리만 할 게 뻔하지만.
그것보다 지금은 식비 쪽이 시급하다.
가진 돈은 2달러 32센트. 편의점 피자 두 조각으로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
쯧.
하는 수 없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 반대편 자리로 향했다.
“저기, 스몰필드 씨?”
멍하니 모니터를 보고 있던 스몰필드 씨는 별안간 나타난 내 목소리에 한 타이밍 늦게 반응했다.
“아, 네. 팀장님.”
“점심시간인데, 혹시 식사하셨나요?”
“……방금 먹고 왔는데요.”
“으흠, 그럼 커피 한잔하실래요?”
“……네, 네에? 커, 커피요?”
“제가 타 드릴게요.”
나는 부리나케 탕비품 선반 쪽으로 달려가 인스턴트커피 한 잔을 정성껏 달였다.
“여기요, 스몰필드 씨.”
“…….”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엉겁결에 종이컵을 받아든 스몰필드 씨는 굉장히 언짢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기요, 팀장님.”
“예?”
“저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이런, 너무 뻔하게 들이댔나.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다.
“으음, 그게, 저는 말이죠? 같이 일하는 사이라도, 공과 사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진짜 아닐 짓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 직장 동료한테, 하물며 상사로서 부하 직원한테 그런 생각을 품는다는 건, 정말 있어선 안 되는 일이죠.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계속 있다간…… 제가 너무 힘들어져서요.”
그즈음,
스몰필드 씨가 눈을 끔뻑대기 시작했다.
“스몰필드 씨.”
“네, 네엡?”
“저한테…….”
그녀의 커다란 안경 너머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지그시 쳐다보며, 나는 말했다.
“돈 좀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스몰필드 씨는 입을 다물고, ‘이 새끼 진짜 뭐 하는 새끼지’ 하는 느낌의 시선을 내게 쏘았다.
“……뭔 소릴 하려나 했더니, 뭐라구요?”
“죄송합니다. 정말로 면목 없습니다.”
“나 참, 철면피도 유분수지. 어떻게 부하 직원한테 돈을 빌릴 수가 있어요?”
“제가 인망이 모자라서, 이런 부탁드릴 사람이 스몰필드 씨 말고는 주변에 한 명도 없거든요.”
스몰필드 씨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도 안 본 채 말했다.
“얼마 필요하신데요.”
해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크으윽, 고맙습니다!”
“됐고, 얼마나 필요하시냐구요.”
“어, 그리 많이는 말고 저기, 10달러만…… 아니, 15달러면…… 아니 아니, 20달러는…….”
내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다 못한 스몰필드 씨는 지갑에서 10달러 지폐 세 장을 꺼내 건넸다.
“자요.”
나는 지폐를 넙죽 받아 들었다.
“복 받으실 겁니다, 스몰필드 씨.”
“다음 주까지 갚으세요.”
“물론이죠. 월급 나오자마자 갚을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스몰필드 씨가 덧붙였다.
“그럼 오늘 갚으실 수 있겠네요.”
….
….
가벼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에, 오늘이 월급날인가요?”
“이번 달 마지막 월요일이잖아요.”
“그, 보통 몇 시쯤에 급여가 들어오죠?”
“점심 지나면 들어와 있지 않을까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액수가 기대는 안 되지만, 이걸로 최소한 그동안 밀린 방값이랑 생활비 걱정은 덜 수 있겠지.
“휴우, 아무튼 고마워요.”
“오늘이 월급날이니까, 굳이 저한테 돈 빌릴 필요 없으셨던 거 아니에요?”
“당장 점심밥 먹을 돈도 없었걸랑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참, 스몰필드 씨. 별일 없으면 이따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잠깐 나올 수 있어요?”
“왜요?”
“돈 생긴 기념으로 제가 커피 쏠게요.”
“……네, 네?”
“물론 인스턴트 말고, 번듯한 카페에서.”
내 말에 스몰필드 씨는 잠깐 어버버하다가,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 제 돈이거든요.”
***
회사 근처 은행의 ATM.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내가 다니는 곳, 윌슨앤코가 정상적인 회사가 아니라는 것쯤이야 물론 진작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 계좌 거래 내역 ]
[ 입금: 34,300 $ ]
4,000만 원이 훌렁 넘는 금액.
오늘 점심 무렵에 들어온 돈이다.
연봉이라 해도 꽤나 큰돈이었다.
월급이라 하면 그야말로 거금이다.
나는 거래 내역을 다시 살펴보았다.
지난주 월요일, 비슷한 금액이 들어왔었다.
“주급이라고, 이게……?”
일류 구단에서 뛰는 축구선수나 받을 돈을,
직원 3명뿐인 회사의 일개 팀장인 내가 받는다.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다.
분명히 무언가 있다.
―확인은 해봐야겠지.
나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사장이 부디 출근해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