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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224화 (224/225)

224화 50. 수레바퀴 옆에서 (1)

그곳은 화려한 무도회장이었다.

마를로네는 이 자리에 참석할 생각은 없었지만 노르드마르크의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이 초대했고, 한스 징펠만도 은근히 참석을 권유했었다.

“전쟁은 전쟁이고, 제국은 제국입니다. 마를로네 아가씨의 운명 또한 아가씨의 것이지요.”

한스 징펠만이 베르크 란을 미끼로 자신을 불렀지만, 마를로네는 이 요란한 옷차림에 유난히 눈물이 많은 사내의 속내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을 보내면서 점점 추락하는 걸 옆에서 보고 그녀를 위해 화려한 거인들의 세계에 데뷔시키려 한 것이다.

하찮은 남자의 아내로 사는 것이 제국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제국의 하부 세계를 오랫동안 탐험한 한스 징펠만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마를로네처럼 용모가 뛰어난 아내의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지 한스 징펠만은 잘 알고 있다.

물론 그것만을 위해 마를로네를 부른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더 중요한 목적도 있었다.

“제가 이곳에 들린 건 선제후의 견제가 목적이었지만, 하벨 장군이 완패한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 두셨으면 하는 것이, 베르크 란 님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정확히 여기에 있었습니다. 선제후께서 무엇을 숨기는지 알 수 없지만 글쎄요. 마를로네 님이 나타나면 그 사람도 조금은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마를로네는 조부에 대해 잘 안다.

무자비하고 잔혹한 성격이지만 자신이 아는 사람에겐 너그럽고 관대하다.

손녀인 자신에게도 아주 살갑게 대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학대를 하거나 고통을 준 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육자의 길을 걸었지만 그건 도펠죌트너의 숙명이다.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참석했다.

창과 방패를 든 고대 제국인의 복식을 한 사람들이 모두(冒頭) 공연을 한 후, 노르드마르크 일대의 명사와 귀족 군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동안 노르드마르크엔 저주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참사가 이어져 왔고 최근은 노르드마르크의 일부가 외국 군주에 의해 점령당하는 일까지 일어났지만, 무도회의 분위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기애애했다.

특히 오랫동안 병상에 누웠다던 선제후는 시종일관 큰소리로 껄껄대고 웃어 댔다.

그걸 본 마를로네는 테타우에 돌던 소문을 떠올렸다.

‘역시 노르드마르크 선제후는 스베아 왕과 내통하는 모양이네. 하긴 그 사람도 신교도고 레벤호스트 선제후와는 친한 사이라고 들었으니. 힘이 없었기에 움직이지 못한 거지 역병이 노르드마르크에 퍼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폐하는 두 선제후를 한꺼번에 상대해야 했을지도.’

예쁘게 차려입었지만, 그녀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유는 알 것 같다.

겉으로는 살갑게 웃고 떠들지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눈은 얼굴이 아닌 가문과 출신, 재산과 신분만을 보고 있다.

수행원은커녕 얼굴까지 낯선 마를로네가 환영받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젊은 남자 귀족 하나가 마를로네에게 다가와 이름을 묻고 간 게 유일한 대화였다.

그런데 낯선 일도 아니다.

종일 무도회나 연회에 얼굴을 들이밀지만, 누구와도 이야기를 못 하고 오는 여성은 한둘이 아니니까.

‘쉽지 않네. 이런 일도.’

검을 쥐었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우습게 봤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길가의 꽃처럼 화려하게 서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 주기만을 기다리는 삶은 상상 이상으로 거칠고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었다.

주변에서 숙덕거리는 음해를 듣고도 내색하지 않는 마음의 여유도 있어야 했다.

“누구야. 쟤는.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의 첩인가? 애인?”

“그런 자리는 아닌데. 누가 저 여자애를 들여보낸 거지? 시종장에게 누가 물어봐.”

쏟아지는 악담에 마를로네는 부글거리는 속을 식히면서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한 남자 귀족이 다가왔다.

한 눈에도 어수룩한 얼굴에 별 볼 일 없는 인간 같았지만, 마를로네에게 호감을 가진 건 확실했다.

그는 마를로네의 이름을 물었다.

마를로네는 루에게 배운 걸 그대로 말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건 물론, 과거에 황제의 호위를 했으며 선제후에게 직접 초대를 받고 이 자리에 왔다는 말을.

그 말을 듣자 주변에 떠돌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를로네에게 향했다.

선제후에게 직접 초대를 받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황제와 접점이 있다는 것.

그것은 슈발츠마인과 다른 종교를 믿는 노르드마르크인에게도 놀라운 일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마를로네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를로네는 자신에게 기회를 준 남자를 찾았지만, 그는 숫기가 없는지 자기보다 신분이 높고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소극적인 모습으로 구석으로 밀려났다.

‘키만 멀대같이 커서는. 하긴 이 동네 사람들 다들 키가 크네. 여자들은 모두 주걱턱이고.’

인파에 묻힌 채 마를로네는 묻는 말에 억지웃음을 머금으며 대답을 해야 했는데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 사내가 낭랑한 목소리로 오늘 연회의 주인공 이름을 밝혔다.

“스베아의 국왕이신 아돌푸스 4세 바사 전하께서 이 자리를 빛내 주기 위해 참석했습니다.”

스베아 왕이 왔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거기로 쏠렸다.

마를로네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헐빈해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여간.’

그 왕이 두리번거렸다.

스베아 왕이 여자, 특히 금발에 호리호리한 소녀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벌써부터 널리 퍼진 소문이다.

아내가 있고 아들과 딸이 있지만, 그 기질이 어디 가진 않는지 스베아 왕은 연회장에 나타나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았다.

왕의 시선이 마를로네를 향했다.

마를로네는 아차 하는 기분을 느꼈지만, 이미 왕이 다가오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저 사람. 좀 무서워. 사람이 아니라 마치 커다란 곰 같아.’

그래도 스베아 왕의 눈에 든 건 사실이다.

그의 눈에 들어 봐야 기껏해야 정부가 되는 게 고작이겠지만, 그것만으로 마를로네는 제국의 어떤 여성보다 높은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그녀가 어린 시절 꿈꾸던 여백작 자리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베아 왕에겐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

하벨마저 격파하고 이제 제국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그가 못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일각에서는 황제가 만슈타인을 불러 스베아 왕에 대적한다는데 하벨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만슈타인이 스베아 왕의 상대가 될까?

“마를로네 아가씨. 다시 보니 반갑네요. 훨씬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스베아 왕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살갑게 말했다.

“저야말로 반가워요. 전하.”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마를로네는 왕과의 대화에 응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순간 마를로네는 일전에 황궁에서 보았던 울피아나를 떠올렸다.

만인의 시선 속에서 화려하게 꽃처럼 피어오르던 그 선제후의 딸을.

당시엔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녀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건 비단 그녀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배경이 그녀를 더욱 눈부시게 했다는 걸.

막강한 선제후의 딸이니까 모두가 넋을 잃고 본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한낱 예쁘장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시시껄렁한 남자들이 가끔 말을 걸던 그녀였지만, 그녀가 직접 선제후와의 인연을 이야기하고 황제의 호위라는 말을 하자 관심을 받았다.

그 관심은 이제 황제보다 더 강한 자로 평가받는 스베아 왕이 다가오자 연회장 전체를 떨칠 정도의 크기로 변했다.

‘이런 거였구나…….’

그 왕이 떠들어 댔다.

“음악을 연주해라. 오늘은 황제 루페르트를 옆에서 모셨다던 이 아가씨와 한 곡을 추고 싶구나.”

왕이 손을 내밀었다.

순간 마를로네는 모든 것이 느려져 보였다.

다가오는 왕의 강건한 손도, 주변의 웅성임도, 음악을 준비하는 악단도, 불빛 아래 흔들거리는 무수한 그림자도.

그 찰나의 시간 마를로네의 눈동자가 향한 것은 사람도 악단도 그림자도 왕도 아닌 지나치는 사람이었다.

마를로네의 표정이 변했다.

‘저 사람은?’

틀림없다.

뒷모습뿐이지만 저 강렬한 풍채와 고독해 보이는 뒷모습은 틀림없는 그녀의 조부, 베르크 란의 것이다.

마를로네는 왕의 권유에도 무시하고 그쪽을 향했다.

사람들이 시선이 마를로네를 향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스베아 왕이 직접 무도를 청했는데 도망가다니.”

“저 여자. 판단 능력이 없는 건가?”

“왕의 표정을 봐. 큰일 났어. 단단히 수치심을 느끼신 모양이야!”

마를로네는 연회장을 뛰쳐나갔다.

바깥엔 경비병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마를로네는 텅 빈 뒤뜰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녀의 눈에 죽음의 얼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있다.

저 어둠 속에서 어둠보다 더 진한 검정을 머금은 존재가.

“할아버지.”

이름 모를 묘비 뒤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 사내는 틀림없는 자신의 조부, 베르크 란이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마를로네.”

조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할아버지! 대체 지금까지 어디서 뭘……!”

복받친 감정에 눈물이 흘러나오며 세상이 흐려질 무렵, 그녀의 세상은 눈물이 아닌 또 다른 형태로 뒤틀렸다.

모든 것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마치 해변에 쌓은 모래성이 파도에 의해 쓸려 나가는 것처럼.

산 것과 살지 않은 것,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과 만들 수 없는 것들이 모두 하나의 모래알로 환원되며 한 곳으로 수렴해 나갔다.

그 안에서 마를로네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자신의 조부마저 입자로 변해 쓸려 가는 걸 보았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목걸이를 의식했다.

저 수수께끼의 사내, 루돌프가 줬던.

그 알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마를로네는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보이지 않는 야수가 있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보는 것만으로 몸과 영혼이 얼어붙고 단지 포식당하기만을 기다리게 할 수 있는 감당할 수 없는 야수가 말이다.

‘뭐, 뭐야. 이건? 대체 이 세상.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미쳐버릴 것 같은 변화 속에서 그 야수가 코를 킁킁거렸다.

마치 냄새를 맡는 모양새.

한참이나 마를로네의 냄새를 맡은 보이지 않는 야수는 무너지는 세계의 틈새의 저 너머로 유유히 사라졌다.

다음 순간, 세상이 꺼졌다.

마를로네는 꺼져 가는 세상 너머에서 익숙한 자신의 자취방의 정경을 볼 수 있었다.

“헉!”

마를로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위, 옷도 궁상맞은 펑퍼짐한 속옷만을 걸치고 있다.

“……꿈?”

마를로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꿈이 아니다.

그녀가 본 건 현실이다.

단지, 그녀가 알 수 없는 무한한 존재의 개입이 설명할 수 없는 변화를 가져왔다.

마를로네는 계단을 내려갔다.

세탁소엔 수많은 아낙네들이 옷을 빨고 있었다.

“마리. 무슨 일이야?”

친우 프리다가 웃으며 다가왔다.

“저기.”

마를로네가 물었다.

“하벨 장군. 어떻게 됐어? 전쟁에서 패했어?”

프리다가 크게 웃었다.

“무슨 소리야. 하벨 장군은 아직 카렐리아에 있는데.”

마를로네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두 손으로 꼬옥 쥐었다.

“……그래. 아직 스베아 왕은 승리하지 않았구나!”

순간 그녀는 지금까지 흐리멍덩하지만 실재했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래. 이건 꿈 같은 게 아니야. 현실이야. 누구의 마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 그녀는 회귀라는 변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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