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49. 스베아 왕 (8)
하벨과 스베아 왕의 전투 양상은 사람마다 증언이 다르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스베아 왕은 예비대를 숨겨 두었고, 적시에 예비대를 사용해 하벨의 군대를 둘로 나누어 섬멸했다는 것이다.
5만 명에 이르는 대군 중에 절반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나머지 절반은 도주했다.
대포를 비롯한 중화기와 물자 전부를 뺏겼고 군기 32개를 강탈당했다.
깃발 중엔 제국군을 상징하는 제국의 깃발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벨은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무릎에 총을 맞고 목과 왼팔이 부러진 상태에서 구출됐다.
살았다고 하지만 그가 전장에 설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골트문트가 찾아온 건 그날 오후였다.
고어문트로 향하던 선제후는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테타우로 향해 루페르트를 알현했다.
“……다시 군대를 모을 수는 있습니다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선제후에게 있기를 바랐다.
이제 모든 희망이 꺾인 상태에서 루페르트가 해야 할 일은 인내다.
하벨을 꺾은 스베아 왕은 노르드마르크를 중심으로 제국 곳곳을 집어삼킬 것이다.
이미 노르드마르크의 절반이 스베아 왕이 보낸 사신에게 고개를 조아렸다는 소문도 있다.
게오르크 아르님은 당연한 일이지만, 저 외국의 왕에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사실상 내통이고 소극적인 반역이다.
하지만 누가 그를 벌할 수 있단 말인가.
머리가 타 버릴 것 같은 신경쇠약 속에서 루페르트는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대륙에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군대는 저 저지대 연방에 있는 하드리아멘디쿠스의 군대가 전부다.
그 병력은 하벨보다 더 많은 6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하드리아멘디쿠스도 그의 상전인 카스무어 왕도 그 군대를 저지대에서 빼진 못할 것이다.
일부 연대를 지원할 수는 있겠지만 저지대의 압제자라 불리는 그들이 군대를 빼는 순간 카스무어 왕국은 저지대 연방의 모든 영토를 잃을 수도 있으니까.
결국 남은 답은 하나다.
‘만슈타인.’
루페르트의 검.
아니, 황제의 검인 그가 필요하다.
루페르트는 원망을 담아 총신과 신하들을 노려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만슈타인을 좋지 않게 이야기했고, 그를 해임하라고 끊임없이 종용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루페르트의 본심은 만슈타인을 해임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군대가 건재하면 부르봉이 참전할 수도 있었겠지만, 대신 스베아 왕이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부르봉이 아무리 부유한 나라라고 해도 자신의 군대와 스베아 왕의 군대 두 군대의 급료를 대는 건 대단히 어려운 문제일 테니.
스베아 왕이 저렇게 강하다면 차라리 부르봉을 상대하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부르봉 상대로는 경험 많은 장군이 몇 명이나 있다.
당장 하벨만 해도 부르봉 상대로 싸운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충되는 소식에 의하면 하벨의 패인엔 스베아 왕을 얕잡아 본 교만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증언했다.
패장의 책임 소재를 물을 필요는 없다.
루페르트가 말했다.
“만슈타인을 불러야 한다.”
그렇게 말하며 루페르트는 노기를 띤 눈으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반대하는 이는 의견을 말하라. 내 직접 듣고 판단하겠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만슈타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만슈타인 말고는 아무런 해법도 없다는 걸 모두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슈타인을 부르겠다.”
그때 한 사내가 손을 들었다.
그의 총신 중 하나인 베르너다.
다른 사람보다 유독 강직한 성격은 그는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루페르트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카를로비 백작.”
루페르트는 이름 대신 최근 자신이 직접 작위를 높여 준 가문의 이름으로 베르너를 불렀다.
그만큼 루페르트는 자신의 불쾌감을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베르너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결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만슈타인 장군은 여전히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를 부른다고 해서 일이 호전될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수치스럽지만 지금은 화평을 하고 힘을 모으는 쪽이 타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스베아 왕은 사실상 부르봉의 용병. 전쟁이 끝나면 부르봉도 왕에게 거액의 급료를 지불하는 걸 어려워할 겁니다. 그들도 신교도 반란의 상처가 아직 채 낫지 않았으니까요.”
“어떤 화평을 해야 하나? 내가 궁금한 건 부르봉의 사정도, 스베아의 사정도 아닌 그들에게 뭘 내줄 것인가다.”
황제의 언성이 점점 높아진다.
중신들이 눈치를 보고 시종들은 숨을 죽였다.
집무실을 지키는 근위병들의 할버드가 소리 없이 번득이는 가운데 베르너가 다시 강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상복구가 좋겠습니다.”
“어떤 원상복구?”
“트라이아 선제후를 복권하고 그에게서 강탈한 모든 영토를 돌려줌과 동시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문서를 주는 선에서 해결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응하지 않으면?”
“협상을 하는 동안에도 군대를 일으킬 시간을 벌 수가 있습니다.”
“누가 군대를 지휘하는가?”
“제국엔 하벨 말고도 뛰어난 장군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이 만슈타인보다 뛰어나다는 건가?”
“그 사람보다 뛰어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보다 위험하진 않겠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베르너.’
말은 이치에 맞다.
하지만 생각이 너무나도 다르다.
그의 만슈타인에 대한 혐오가 질투심인지 아니면 정녕 자신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루페르트는 전자라고 보고 있다.
근래 만슈타인만큼 큰 성공을 거두고 맹렬한 시기를 받은 사람도 달리 없으니까.
애당초 베르너의 마음은 루페르트가 3명의 총신 중에 요하네스를 선택했을 때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루페르트가 유독 요하네스의 의견만을 채택하는 건 엄연한 사실이니까.
‘이 사람과는 오래 할 수 없겠군.’
루페르트는 속으로 베르너의 해임을 생각했다.
능력 고하를 떠나, 생각이 다른 사람과 일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보통 총신을 한 명만 두는 것도 그 때문이다.
총신 사이에서 의견이 갈릴 경우에 고통을 받게 되는 건 결국 군주니.
지금까지는 같은 안젤리나가 선택한 아이들답게 원만하게 양보를 하면서 지냈지만, 제국이 위기에 처한 지금은 가려진 금이 어김없이 보인다.
루페르트는 베르너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만슈타인을 부르겠다.”
베르너가 항의하는 눈으로 보았다.
루페르트는 해임에 대한 결의가 더욱 굳어지는 걸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선택한 장군이 패했을 때 모든 걸 잃게 되는 건 나지, 그대가 아니오.”
“…….”
“나는 만슈타인을 택하겠소. 그대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베르너가 고개를 숙였다.
대화는 이것으로 끝났다.
회의가 길어지는 중에 베르너가 자리를 뜨는 걸 보고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두 번 다시 그 사내가 여기에 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아마 가까운 시일 안에 사임을 할 것이다.
회의가 끝난 후 루페르트는 자신의 별궁의 의자에 앉은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제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런 느낌이었지.”
늘 그렇다.
모든 일이 잘 풀릴 땐 문제 될 게 없다.
작은 하자나 갈등은 조그만 잡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고 사정이 어려워지면 이야기는 바뀐다.
모든 것에 균열이 일어난다.
베르너의 이반은 그동안 가려졌던 앙금이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앞으로 이런 일은 계속 생길 것이다.
물론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모든 걸 되돌릴 방법이.
그러나 그것은 금지됐다.
스베아 왕 앞에서 회귀를 하지 말라는 건 여신의 말씀이었으니.
“…….”
루페르트는 자신을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던 울피아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마음이 흐려진다.
여자가 필요하다.
그에게 달콤한 말과 살결로 그를 위로해 줄.
마치 회귀 전의 자신이 거느리던 정부 같은 안식처가 필요하다.
‘빌어먹을.’
루페르트는 곧 고개를 흔들어 머리에 깃든 얕은 생각을 지워 버렸다.
‘이래서는 안 돼. 이래서는 과거의 재림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이 해갈할 길 없는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당장 루페르트는 오늘 밤에 잠을 청할 자신이 없다.
머리가 타들어 갈 것 같은 고통과 걱정 속에서 밤을 지새우고 아마도 내일도 고통스러울 또 다른 가혹한 날을 보내야 한다는 소리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여신님.”
그 마음은 루페르트가 전생에 죽임을 당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래서일까.
[ 루페르트 가우저. ]
기적이 일어났다.
여신이 그의 부름에 답한 것이다.
[ 뭐가 그렇게 괴롭나요? 전쟁의 패배? 울피아나의 변심? ]
“여신님.”
주변에 시종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루페르트는 어느 때부터 간절하게 여신을 원하고 있었다.
여기서 리프니에가 어떤 신이고 어떤 악행을 저지르고 어떤 심보를 가졌는지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지금 루페르트의 말을 들어 주고 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신은 리프니에뿐이니까.
“여신님. 시간을 되돌리고 싶습니다.”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루페르트는 억지를 썼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신은 짓궂게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루페르트가 고개를 들자 비로소 루페르트 눈앞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에 있던 시종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지만, 여신도 그의 사도도 하찮은 인간의 행동엔 터럭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아.”
여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어쩔 수가 없네요. 이번만큼은.”
“여신님!”
루페르트가 여신에게 엎드렸다.
마치 동방 제국의 미개한 관료처럼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말이다.
그보다 더한 짓을 하라면 능히 할 수도 있는 기분이다.
“제가 봐도 이번은 당신의 어려움이 느껴지네요. 그 왕 옆에 달라붙은 불쌍한 신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여신님! 정말이지, 정말이지 감사합니다! 저 루페르트 가우저! 평생 여신님의 사도로 남겠습니다! 티그리트 같은 배신자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어머, 루페르트 가우저. 너무 흥분한 거 아닌가요? 근래 황제처럼 행동하더니, 오늘은 그 하켄하임에 있던 그 루페르트 가우저처럼 말씀하시네요.”
“여신님…….”
검은 머리의 소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 나팔을 부세요.”
“네.”
“아, 제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갑자기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루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부터 회귀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어요.”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개를 풀었거든요.”
“개……. 말입니까?”
“일단 경험해 보면 알 수 있겠죠. 당신이 이번 회귀에서 그것들에게 먹히지 않기를 바랄게요.”
리프니에가 손을 들어 나팔을 불라고 권유했다.
루페르트는 절반의 환희와 절반의 의아함 속에서 소라고둥을 풀어 힘차게 불었다.
부우우우우---
맑고 청량한 소리.
깊은 바다의 색채가 주변을 감싼다.
여기까지는 전과 같다.
그런데.
“……?!”
바다의 색채로 물든 세상 안에 뭔가 꿈틀거리고 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크고 거대하고 난폭하며 코를 킁킁거리는 무언가가 이 세상을, 루페르트의 주변을 거칠게 배회하고 있다.
수많은 경이를 목격했지만 루페르트는 턱이 오그라들 정도의 공포와 긴장을 느끼며 그를 둘러싼 이 지옥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 이것이 여신님이 말한 개인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저 시간의 틈새를 돌아다니는 이형의 존재에게 적발당한다면 모든 것은 끝나고 말 것이다.
여신이 말해 주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