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220화 (220/225)

220화 49. 스베아 왕 (5)

황제가 도펠죌트너를 사면한 후, 도펠죌트너들은 주홍글씨와도 같은 붉은 명찰을 떼어 내고 저마다의 고향과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구걸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

도펠죌트너의 평균 연령은 50대.

젊다고 해도 30대 후반이고 대부분은 이제 다가올 인생의 종막을 준비해야 할 40대 후반이었다.

제국의 평균 수명이 50세보다 조금 높은 걸 감안하면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황제는 도펠죌트너에게 약간의 하사금을 내렸다.

황제가 직접 사재에서 지출한 금액이다.

혹자는 그 돈이 황제가 만슈타인이 트라이아에서 가혹하게 뜯어낸 세금의 일부로 충당했다고 말하지만, 중요한 건 황제가 그들에게 노후를 대비할 최소한의 금전이라도 하사했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하부 노동자의 삶은 비참하다.

노동자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건 하인이라고 불리는 부류인데, 그들은 젊고 어린 시절에야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훌륭하고 높으신 주인의 위광 아래에서 으스대고 다닐 수 있지만, 늙으면 가차없이 버려진다.

여자 하인 쪽은 그나마 음식 솜씨가 좋거나 자기보다 조금 더 신분이 높은 사람과 결혼을 통해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날 방도가 있지만 남자 하인들은 저택에서 쫓겨난 순간부터 변변치 않은 일을 전전하다 구빈원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 나이는 대부분 40대 중반이다.

마를로네는 그 악명 높은 테타우의 구빈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찾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조부였다.

“……베르크 란이라는 사람이 있나요? 나이는 쉰다섯 정도 됐을 거고 저처럼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답니다. 나이를 드셨지만 다부진 체격이고 주로 딱딱한 북부 제국어를 쓰지만, 가끔은 부르봉 억양이 나오곤 해요.”

베르크 란이 실종된 지도 벌써 반년이 흘렀다.

만에 하나라도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나이는 무서운 것이다.

어쩌면 치매나 정신 착란이 찾아왔을 수도 있고, 그런 무서운 마음의 병마가 든 사람은 결국 구빈원에 맡겨진다.

구빈원은 정신병원에 갈 돈이 없는 사람도 억지로 잡아 두곤 하기 때문이다.

저 구석 침상에 쇠사슬에 묶은 채 버둥거리는 벌거벗은 남자처럼 말이다.

“멸망이 온다! 멸망이 온다! 크로지우스가 말씀하셨다! 이 제국 아니 이 세상을 멸할 신들에게 선택받은 용자가 온다고!”

그 광인이 고함을 지르자 지나가던 직원이 채찍으로 그의 입을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채찍질은 그의 고함이 잦아들 때까지 계속됐다.

눈이 마주치자, 험상궂은 직원은 마를로네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그에 눈에 비친 마를로네는 퍽이나 아름다웠으니.

그러는 동안 노곤한 표정의 관리인이 마를로네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만 아가씨. 그런 사람은 우리 구빈원에 등록된 바가 없습니다.”

“저기, 이걸 받아 주세요.”

마를로네가 손바닥 아래 탈러 은화 몇 개를 숨겨 관리인에게 내밀었다.

관리인은 돈을 받아 챙기면서도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좋은 결과는 나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 믿음이 가네요. 그래도 혹시 베르크 란이라는 분의 소식을 안다면 저에게 전해 주세요. 저는 베그젤룸 거리 세탁소 2층에 살고 있답니다. 그 세탁소에 프리다라는 분에게 소식을 전해 주시면 바로 저에게 전달될 거예요.”

구빈원을 나서며 마를로네는 슬픈 얼굴로 구빈원을 한 차례 돌아보았다.

“어디에 간 거야…….”

베르크 란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는 지인-한스 징펠만에게 부탁해 봤지만, 황제의 사냥꾼 인맥으로도 베르크 란의 소재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글자 그대로 어느 순간 제국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다.

분명 어딘가에.

“마리! 어땠어? 오늘은 소식이 있었어?”

인쇄소에 있을 때부터 친구가 된 프리다와는 여전히 교류하며 지내는 사이다.

그녀와 남편이 경영하는 세탁소 2층에 세를 들 정도로 말이다.

그녀의 숙소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순 없는 곳이었다.

세탁소가 돌아가는 동안은 아래에서 들려오는 아낙네들의 투정과 싸움 소리에 집안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밤이 되면 오래된 지붕 위에서 쥐들과 고양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정신을 어지럽혔다.

인쇄소보다 그을음이 덜하다곤 하지만 마를로네의 숙소는 명백히 제국 하부 노동자가 살 법한 장소다.

“후우.”

싸구려지만 잘 정리된 침대에 걸터앉아 마를로네는 지친 얼굴로 벽에 걸린 검을 보았다.

조부에게 물려받은 기병도다.

이야기에 따르면 조부가 제국군에 입대한 후 부르봉 왕국과 싸울 때 악명 높은 부르봉 왕국의 초인병인 장다름을 처치하면서 얻은 전리품이라고 한다.

남자가 들기에도 무게가 있지만 도펠죌트너의 힘을 지닌 그녀에겐 다루기 편한 무기다.

한때 이 무기를 들고 제국 전역을 누볐다.

지금보다 어리고 자신이 넘치고 활발했을 땐 조부를 따라 몇 명의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딱히 사람을 죽이는 데 주저함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없었다.

그동안 받은 수모와 차별이 감정을 무디게 했으니.

게다가 돌이켜보면 그때가 지금보다 상황 자체는 암울했지만, 어떤 의미로 별걱정이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항상 옆에 할아버지가 있었으니까.

무심하고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고 무자비하며 잔인하긴 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겐 약간의 마음을 허락해 주던 조부가 말이다.

이제는 모든 게 사라졌다.

조부도 없고 그들 조손을 가혹할 정도로 부리던 안젤리나도 없다.

이제는 불러 주는 사람도 없다.

있다고 해도 도펠죌트너 전체가 과거의 죄를 벗은 이상 다른 사람을 쓸 것이다.

마를로네가 강하다고 해도 일반인 상대로 이야기지 같은 도펠죌트너 상대로는 뛰어나기는커녕 평균에도 못 미치니까.

모아 놓은 재산이 있고 부르봉에 작은 땅이 있긴 하지만, 여자 혼자 돌아가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을까.

더는 예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막상 현실을 받아들이자니 두려워진다.

그것이 마를로네가 테타우의 구빈원을 돌아다니며 조부를 찾는 배경이다.

물론 조부의 위치는 알아야겠다.

그것이 시작이다.

“마리. 폐하 결혼식 일정이 잡혔다고 하던데.”

프리다가 셋방에 올라와 침대에 스스럼없이 앉으며 말을 건넸다.

“그래?”

“예전에 폐하랑 독대도 하고 그랬다며?”

“……그랬었지.”

“폐하는 어떤 분이셔?”

프리다가 강한 관심을 보이며 묻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현재 황제 루페르트는 철혈대제 이후로 연달아 나온 위대한 명군의 자질을 보이는 사람이니.

게다가 미혼에 나이도 젊다.

제국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황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폐하는 말이지.”

마를로네는 자신이 기억하는 루페르트는 생각했다.

“글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어. 항상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막무가내로 일을 벌이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해. 하지만 결과는 늘 좋았지. 그리고…….”

“그리고?”

“응. 다정한 사람이었던 거 같아.”

“그래?”

“응.”

마를로네가 먼 곳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한 사람이었어. 늘 투덜거리던 나에게 대해 주던 모습을 보면.’

아쉬움이 일었다.

‘그때, 그러니까 그가 선제후가 되려던 시기에 좀 더 잘해 주고, 좀 더 살갑게 대해 줬으면 황제가 지금 상황에 자신을 불러 줬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마를로네가 원하는 것일까?

그건 본인도 확답할 수 없으리라.

여전히 그녀의 마음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인 상황이니.

고민하는 마를로네와 옆에서 기분 좋게 흥얼거리는 프리다가 느긋한 오후를 보내는 동안 멋들어진 사냥복을 입은 남녀가 세탁소 앞에 섰다.

남자 쪽의 키가 190cm 이를 정도로 훤칠해 체격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났지만 둘의 얼굴은 똑 닮았고 둘 다 미형이었다.

허리춤에 멋들어진 피스톨을 찬 그들은 세탁소 점원에게 물었다.

“마를로네 님을 찾고 있는데.”

점원이 위로 올라가 프라다와 마를로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마를로네 님을 찾아오신 분이 있다고 하네요.”

“누가요?”

마를로네가 묻자 점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이내 뭔가 떠올리고 대답했다.

“쌍둥이 같았어요.”

“쌍둥이?”

마를로네는 자신과 함께 여행하던 기이한 쌍둥이를 떠올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분주하게 사람과 수레가 오가는 대로변에서 마를로네는 자신을 찾아온 화려한 사냥복을 입은 쌍둥이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루, 그리고 기.”

한스 징펠만의 제자다.

이제는 도제에서 벗어나 어엿한 사냥꾼이 된.

루가 마를로네에게 다가가 정겹게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마리 언니. 오랜만이네요.”

“어. 응. 그런데 너희들 너무 빨리 자라는 거 아니야?”

마를로네가 자기보다 머리 두 개는 큰 루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않은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루가 씨익 웃으며 용건을 이야기했다.

“스승님이 할아버지로 보이는 분을 발견했다고 하네요.”

“저, 정말?! 어디에?”

“노르드마르크요.”

“노르드마르크.”

마를로네는 사슴의 얼굴을 한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섬뜩한 감정을 느꼈지만, 이내 그 모습을 기억에서 지우며 쌍둥이들에게 살가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따뜻하게 말했다.

“고마워. 뭐, 차린 건 없지만 뭐라도 들지 않을래?”

* * *

“짖는 자” 프리츠 에센바하는 오각의 마법사다.

다른 오각의 마법사처럼 그의 경력은 일체 비밀에 부쳐져 있다.

그중엔 사생아가 있다, 악마와 부정한 계약을 했다, 불신자다, 같은 좋지 않은 소문도 다수 섞여 있지만 정확하게 드러난 건 아무것도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프리츠 에센바하가 오각의 마법사 중에서도 적어도 전투력 측면에서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전투라는 과제만 놓고 보면 프리츠 에센바하가 최고일지도 모른다.

그는 오로지 전쟁에서 사용하는 마법을 연구했고, 어떻게 해야 마법의 힘으로 다수의 사람을 효과적이고 경제적으로 살육할 수 있을지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니까.

그는 자신이 있었다.

일대일이나 일 대 다수나.

상대방이 마법사나 도펠죌트너, 기타 외국의 다른 초인적인 존재라고 해도 거리낄 게 없다.

“비스투라. 그 근본 없는 동방 제국의 종복이 제국의 백성을 해하고 다니다니. 그는 곧 후회하게 될 겁니다.”

프리츠 에센바하는 다른 마법사차럼 자신의 신비로운 권능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눈을 번득일 때마다 함께 하는 파견 기병대장 트렌호트 대령은 마음에 얼룩이 질 정도로 주눅이 드는 걸 느꼈다.

‘진짜 괴물이군. 이 사람은. 그래서 믿음이 가긴 하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사람과는 일분일초도 함께 있고 싶지 않다.’

정찰병들이 대령에게 다가왔다.

“앞에 불타는 마을이 있습니다.”

“비스투라의 짓인가?”

“그럴 겁니다. 사지가 찢겨 나가고 꼬챙이에 꿰여 죽은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프리츠 에센바하가 크게 웃었다.

“드디어 잡았군요. 제국의 해충을.”

“……정말 혼자서 비스투라를 잡으실 수 있겠습니까?”

트렌호트 대령이 확실히 하기 위해 에센바하에게 물었다.

프리츠 에센바하의 눈에 섬뜩한 빛이 번득였다.

동시에 세상이 어두워졌다.

트렌호트 대령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도했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어느새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그 짙게 낀 구름에서 은은한 뇌명이 이는 걸 들으며 대령은 프리츠 에센바하의 입이 열리는 걸 똑똑히 보았다.

“왜 타국이 제국을 감히 넘보지 못하는지. 제가 오늘 알려 드리지요.”

그 은은한 뇌명을 담은 목소리로 프리츠 에센바하가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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