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49. 스베아 왕 (4)
하벨이 노르드마르크로 진군하는 동안 스베아 왕은 인근 지역을 장악하고 병력을 모았다.
왕이 상륙한 지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2만 명이 넘는 보병과 8천 기의 기병이 충원된 건 누가 봐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수상한 일이었다.
세간에서는 노르드마르크 선제후가 자신이 은혜를 입은 루페르트에게 반기를 들 수 없으니 스베아 왕을 우회적으로 지원했다고 말했다.
진실을 아는 건 소수뿐이다.
“부르봉이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오토 브라에가 루페르트에게 노르드마르크를 둘러싼 정국에 관해 설명했다.
외교 정세에 관해서 오토 브라에만큼 정통한 인물도 없다.
루페르트는 오토 브라에에게 뱅상 페리에라는 잘 알지 못하는 인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아무래도 부르봉의 진정한 군주는 샤를 왕이 아니라 뱅상 페리에인 모양이군.”
성질 같아서는 당장 군대를 일으켜 부르봉에도 철퇴를 내리고 싶지만, 지금 루페르트가 보유한 군대는 하나뿐이다.
혹자는 그것이 패착이라고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언제 스베아 왕이 올 건지 알 수도 없었고, 설령 만슈타인이 있었다면 제국은 스베아 왕뿐만 아니라 부르봉의 군대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니까.
하벨의 군대 하나니까 부르봉이 자금 지원만 해서 스베아를 움직였을 뿐이지, 두 군대가 건재했다면 그들도 전력을 다했을 것이다.
아무튼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한다.
루페르트는 예전부터 스베아 왕이라는 인물에 대한 보고를 들은 바가 있다.
나이는 35세 정도이고 건장하고 혈색이 좋은 인물로, 어린 시절부터 부친을 따라 전장에 나가 전쟁하는 법을 배웠다. 왕위를 물려받은 이후에도 여러 전쟁에 뛰어들어 크고 작은 스베아의 이익을 얻어 냈다고 한다.
모든 보고서에서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건, 스베아 왕이 위험한 자라는 것이다.
그의 나라는 제국에 덜 알려졌고 그의 군대 또한 제국에서는 전통 없는 군대지만, 스베아 왕의 군대는 아마 제국의 그 어떤 군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게 스베아에 정통한 첩자들의 평가다.
이제 그의 진면모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잠시 잊고 지냈던 약탈자가 다시 무대에 나타났다.
동방 제국의 봉신 비스투라가 다시 한번 약탈자 기마 무리를 이끌고 이번에는 카렐리아에 침입한 것이다.
전처럼 그들은 무자비한 살육과 파괴 활동을 벌였다.
일부러 벌인 짓이다.
황제의 승리와 황제의 체면을 깎기 위해 비스투라는 같은 신교도마저도 살육하고 학살한 것이다.
이것은 문제가 된다.
렌타이어마르크 약탈 이상으로.
황제가 수복한 땅마저 지키지 못한다는 건, 카렐리아의 영원한 이반을 의미할 수도 있으니까.
루페르트는 렌타이어마르크에 주둔 중이던 파견 기병대 및 그들과 행동을 함께하는 오각의 마법사 “짖는 자” 프리츠 에센바하에게 즉시 토벌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용서는 없다. 혹 놈들이 자신의 본국으로 돌아가더라고 추격을 멈추지 마라. 놈들의 신민에게 똑같은 대가를 치르게 해라.”
비스투라의 만행을 잘 알고 있던 루페르트는 평소의 온화한 태도와 달리 철저한 무관용 정책을 펼치기로 다짐했다.
‘혹 동방 제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악한은 살려 둬서는 안 된다.’
아울러 동방 제국의 최근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 또한 루페르트의 판단의 근거 중 하나다.
야만적인 전제 국가라 불리는 동방 제국은 항상 제위를 두고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번은 거의 제국의 내전급으로 큰 문제가 불거져 있다고 한다.
비스투라 같은 잔챙이 하나 정리해도 신경 쓸 여력은 없을 것이다.
100년 전처럼 동방 제국은 제국까지 군대를 보낼 정도로 국력이 넘치는 나라도 아니니까.
프리츠 에센바하를 파견한 루페르트는 다시 제국의 정세로 돌아와 스베아 왕과 그를 돕는 동맹에 관해 생각했다.
‘과연 이것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옳은 선택이다.
골트문트가 돕지 않았다면 레벤호스트의 반란을 이렇게 쉽게 잠재울 순 없었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같은 구교도 세력은 골트문트는 루페르트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게다가 이제 제국 내 루페르트에게 반기를 들 세력은 막스 게오르크 하나뿐이다.
그 하나만 제압한다면 제국의 내전을 종식할 수 있다.
물론 그전에 제국 영역에 흙발로 들어온 스베아왕을 쫓아내야겠지만 말이다.
“스베아 왕이라…….”
기억을 더듬어도 그는 그다지 역사에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인물이다.
적어도 회귀 전 스베아 왕이 제국 문제의 중심에 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이 또한 회귀의 결과일지도.”
지도를 보며 생각에 잠긴 루페르트의 머릿속에 듣기 좋은 목소리가 명료하게 울려 퍼졌다.
[ 루페르트 가우저. ]
여신님이다.
루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고 그의 여신의 부름에 응답했다.
“여신님!”
“정말이지.”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최근 들어 당신은 정말로 훌륭한 황제가 된 거 같네요. 가끔은 그리워요. 허둥지둥거리고 어찌할 바 모르던 과거의 당신이.”
“과찬의 말씀입니다. 아직 저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니에요. 루페르트 가우저.”
소라고둥이 몸부림을 쳤다.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소라고둥이 가볍게 뛰었다.
소라고둥이 올라선 곳은 노르드마르크였다.
“루페르트 가우저.”
“네. 여신님.”
“스베아 왕이라고 했죠? 최근 당신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람이?”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금방 진압되겠지요. 제국 최고의 장군인 하벨이 향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랍니다.”
“네?”
“지금 시간의 책갈피를 쓰도록 하세요.”
루페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아는 자신의 여신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지만 모든 걸 속이고, 무엇보다 자신의 권능을 함부로 쓰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는 성미였다.
그녀가 루페르트에게 시간의 책갈피를 쓰라고 권하는 건 대단히 희귀한 일.
한 번 전례가 있긴 했지만, 하나같이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걸까.’
막상 루페르트 본인은 스베아 왕이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고 보았다.
하벨의 군대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가 위대한 장군이라는 건 맞지만 하벨 또한 충분히 명장의 반열에 오를 만한 사람이고, 무엇보다 그에겐 오랫동안 단련한 강력한 군대가 있다.
5만 명에 달하는 막강한 정예병 앞에 과연 스베아 왕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으면서도 리프니에의 충실한 사도인 루페르트는 회귀의 권능을 사용, 자신 앞에 바닷냄새가 나는 책갈피를 떠올리고 회귀라는 무형의 책에 꽂아 넣었다.
그렇게 시간이 저장됐다.
루페르트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으로 울피아나와의 결혼은 완벽하게 굳어지는 것이겠지.’
꺼림칙하지만 과거의 자신이 아니다.
루돌프의 말마따나 이제 그는 더 이상 일개 여성에 의해 좌지우지될 정도로 연약한 사람이 아니다.
루페르트의 시선은 제국을 향하고 있다.
아주 잠깐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루페르트는 그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도 위에 올라선 소라고둥을 보았다.
“여신님. 책갈피를 사용했습니다.”
“좋아요. 루페르트 가우저.”
소라고둥이 청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베아 왕은 그러니까 말이죠.”
“네. 여신님.”
“당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요.”
“네? 저와 비슷하다고요?!”
루페르트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 사람도 회귀를 하는 겁니까?”
“아니요.”
소라고둥이 몸을 좌우로 돌리며 강하게 부정했다.
“회귀의 권능은 없어요. 시간을 다룰 수 있는 건 수많은 옛것 중에서도 독보적인 권능을 가진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에게는 수많은 신들이 있답니다.”
“신들…… 말입니까?”
“네. 추방당하고 잊히고 역사에서 지워져 버린 신들 말이죠. 그러니까 신도를 잃은 신들이죠.”
“신도를 잃은 신.”
루페르트는 그 의미를 예나에게 들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인간을 초월한 거대한 영적 존재는 누구나 신이 될 자격이 있다.
그러나 모든 이가 신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신은 그 특성상 필연적으로 그 신을 모시는 신도가 필요하니까.
신도가 없는 신은 악마다.
악마라고 조롱해도 반박해 줄 이도 남아 있지 않은.
“……악마와 손을 잡은 겁니까?”
“손을 잡았다기보다는 그 불쌍한 신들이 그 왕에게 의탁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그들도 조금씩은 이 세상이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거든요.”
“그 말씀은……?”
소라고둥이 쓰러졌다.
동시에 루페르트 앞에 검은 옷을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미소녀가 나타났다.
소녀 시절의 안젤리나를 꼭 닮은 그 소녀는 루페르트를 응시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신들도 저의 회귀를 느끼지 못한답니다.”
“……그렇습니까?”
“회귀를 감지할 수 있는 건 당신과 티그리트. 회귀의 수레바퀴 위에 선 자가 전부죠. 다른 인간은 물론이고 다른 하찮은 신들도 저의 권능이 이 세상에 끼치는 권능을 알지 못해요.”
“…….”
루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여신이 강대한 존재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신조차 하찮게 여길 정도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니.
순간 루페르트는 하나의 의문을 느꼈다.
‘그렇게 강한 여신님이 왜 나와 티그리트 같은걸……?’
그 의문은 리프니에의 이어진 말에 중단됐다.
“하지만 그 신들도 아주 바보는 아닌지라 서서히 느끼고 있답니다. 네. 저의 권능을 말이지요.”
“……그 말씀은?”
“네. 최소한 스베아 왕 앞에서 회귀의 권능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그와의 전투에서 패했다고 바로 회귀를 써서 시간을 돌릴 순 없어요. 왜냐하면 그 왕에게 달라붙은 불쌍한 신들도 충분히 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루페르트는 잠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의 여신의 권능마저 제대로 쓸 수 없는 상대라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문도 일었다.
‘다른 신을 명백히 하찮게 보는 여신님이 왜 굳이 이런 일을 두고 두려워하는 걸까.’
“다른 질문은 없나요? 루페르트 가우저?”
“네. 여신님. 혹시 스베아 왕에게 회귀 말고 다른 특별한 권능은 없습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없어요. 아, 행운의 가호는 붙어 있네요.”
“행운의 가호?”
“전장에서 눈먼 총알이나 포탄을 맞고 죽지 않을 정도의 미약한 가호죠. 적어도 스베아 왕은 버림받은 신들의 챔피언은 아니니까요. 그걸 제외하면 그는 대단히 평범한 한 명의 인간이랍니다.”
“그렇군요.”
안젤리나의 모습을 한 리프니에가 그늘로 걸어갔다.
그늘에 들어가자 그녀의 모습은 녹아들듯 사라졌다.
“조심하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권능이 미약하다고 해도 스베아 왕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랍니다. 적어도 티그리트는 그 사람에게 호되게 당했지요.”
“티그리트가 말입니까?”
“네. 몇 번이나 패한지 몰라요.”
즐거워하는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동시에 탁자 위에 똑바로 서 있던 소라고둥이 무너졌다.
여신이 떠났다.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다시 목에 걸며 노르드마르크 쪽을 응시했다.
“……티그리트가 넘지 못한 벽이 이것인가.”
차가우면서도 단호한 각오가 황제의 눈동자 위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