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48. 왕의 마구간 (3)
새벽안개에 몸을 숨긴 채 고어문트의 보병대가 다리를 건넜다.
그들의 발소리는 먼저 전투가 벌어진 붉은 공작의 숲속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과 총성과 13문의 중포와 그에 대응하는 카렐리아군의 응사에 가려졌다.
고어문트 보병대는 소리 없이 불타는 화승을 입에 문 채 살금살금 전진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셀 수 없는 하얀 입자 사이에 거무스레한 무언가가 보였다.
노련한 하사관이 팔을 올렸다.
공격 보류.
보병대는 좀 더 앞으로 전진했다.
생소한 말소리가 들린다.
제국의 언어가 아닌 카렐리아의 언어다.
적의 참호가 코앞이다.
카렐리아인들은 다리 앞에 3중의 참호를 파 거기에 총병을 배치하고 양옆엔 창병을 배치했다.
양쪽에서 교차사격으로 인한 아군의 오사를 막기 위한 레벤호스트다운 조심성이 엿보이는 배치다.
참호 앞엔 모래 장벽을 쌓아 단단하게 굳힌 연대포라 불리는 작은 대포도 다섯 문이나 준비했다.
적이 건너오면 다섯 문의 대포로 적의 혼쭐을 내주고 가까이 오면 갖가지 날붙이를 넣어 포도탄으로 쓸어버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모든 관심이 동쪽에 쏠리고 안개가 앞을 가려 준 현재 시점에서 그들의 불운을 예측한 카렐리아병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에겐 병사의 기강을 잡고 주의를 환기해줄 고참병과 하사관, 장교의 숫자가 부족했다.
레벤호스트가 지휘하는 카렐리아 수비군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레벤호스트가 직접 데리고 온 트라이아병.
이들은 외국과 지난 전쟁에서 경험을 쌓은 노병과 장교를 중심으로 군사적 전통을 유지한 채 오랜 기간 단련된 정예병으로 고어문트 보병대와도 능히 겨룰 수 있는 조직력과 수완을 갖추고 있다.
그들의 전투력은 지난 숲의 전투에서 우월한 교환비로 여실히 드러났다.
레벤호스트는 하벨이라는 늙은 너구리가 돌파할 만한 지점이 붉은 공작의 숲밖에 없고 좁은 지역에 더 강한 전력을 전개하면 더 높은 전공을 거둘 수 있다는 과거의 격언대로 정예병을 붉은 공작의 숲 쪽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그러나 그 배치가 파국을 불러왔다.
트라이아병은 분명 강한 병사지만 카렐리아 병사는 그렇지 않다.
만슈타인의 역사적인 횡령으로 카렐리아는 당초에 구사했던 정예 연대와 병사를 제대로 모집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특별세를 거둬서 지역 장정들과 전직 연대장과 장교를 긁어모아 억지로 카렐리아군을 편성했다.
그 숫자는 카렐리아 수비대의 7할에 이른다.
레벤호스트는 자신의 약점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기에 자신의 정예 병력을 분산해서 카렐리아 연대에 함께 배치하여 고참병의 용기와 기율, 경험을 카렐리아 병이 공유할 수 있도록 조치했지만, 그 균형이 깨졌다.
레벤호스트 본인이 직접 카렐리아-트라이아병의 비율을 깨뜨린 것이다.
곳곳에 전개한 제국 첩자를 통해 카렐리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하벨은 이점을 노렸다.
아울러 그는 가장 강한 방어지점에 열등한 병력을 배치한 것 또한 알고 있다.
열등한 병력이라는 약점이라는 걸 천혜의 지형으로 보완하여 “경제적”으로 배치해 보려는 게 레벤호스트의 계산이었겠지만, 전쟁에선 어설픈 계산 같은 건 통용되지 않는다.
레벤호스트가 자신의 의도를 멋대로 해석하게 한 뒤에 하벨은 가장 위험하고 돌파 불가능한 다리에 자신의 주요 병력을 밀어 넣었다.
탕! 탕! 탕!
참호 앞에서 총성이 울렸을 때 참호를 지키고 있던 카렐리아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소리냐?!”
하지만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바로 앞에서 우레처럼 쏟아지는 함성이 곧 그들의 운명을 깨닫게 했다.
“황제 폐하 만세!”
“호라신이여! 우리를 지켜 주소서!”
맹렬한 총성이 울린 후 흉갑과 투구를 쓴 장창병이 참호에 뛰어들었다.
일부는 참호 입구에서 참호 안을 마치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휘저었고, 일부는 창을 버리고 검을 빼 들어 참호를 따라 마주치는 적병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아아악!”
“적이다! 고어문트군이다!”
“후퇴하지 마라! 응사해라!”
총성과 노호성, 비명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레벤호스트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정면의 참호 3개와 연대포가 뺏긴 뒤였다.
연대포를 노획한 고어문트의 병사들은 노련하게 대포의 포구를 측면의 방벽에 겨냥하고 격발했다.
둔중한 포성 속에서 다리 좌측면을 틀어막던 창병의 진형도 무너졌고 교두보는 확장됐다.
잔혹한 일이었다.
고지에 있다는 걸.
전장의 안개가 걷혔을 때 레벤호스트는 보았다.
자신의 우익이 적에게 완전히 관통된 채 휑하니 뚫려 있는 걸.
지금 이 순간에도 다리를 건너 셀 수 없는 제국군이 걸어오고 있었다.
우익은 괴멸됐고, 선봉에 있던 제국 보병대는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기병대! 기병대로 놈들을 끊어 내라!”
레벤호스트가 다급하게 명하자, 청명한 나팔이 울리며 번쩍이는 갑주와 화려한 깃털을 꽂은 트라이아 기병대가 기병용 피스톨을 빼 들고 다리 쪽을 향해 진격했다.
그 모습은 장엄하고 아름다웠지만, 거기에 대항하는 제국군의 대응은 질서정연하고 엄정했다.
“방진 전개!”
노련한 하사관의 부호에 의해 창병이 5m에 달하는 장창을 들고 전열을 형성하고 그 아래 총병들이 창병을 등진 채 달려오는 적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러한 방벽이 다리 쪽을 제외한 전방과 양측면에 형성됐다.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제국 방진이 전개된 것이다.
기병대가 다가오자 총병들이 불을 뿜고 창병이 창을 기병대를 향해 세웠다.
총격의 교환 속에서 수많은 보병과 기병이 저마다의 사상자를 내며 쓰러졌지만, 기병은 물러났고 방진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아마 종일 두드린다고 해서 방진이 무너질 것 같진 않다.
게다가.
부우우우--
멀리 강을 우회한 하벨의 좌익 기병대가 트라리아 기병대의 후면을 노리고 구보로 질서정연하게 행군하기 시작했다.
적의 보병대와 기병대 사이에 끼일 걸 우려한 기병대는 뒤로 물러났다.
레벤호스트 최후의 반격은 그렇게 끝이 났다.
우익은 분단됐고, 좌익은 발목이 붙잡혀 있다.
중군은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약해빠진 카렐리아 병사가 대부분이다.
설상가상으로 강한 모래 돌풍이 구릉 쪽을 향해 강하게 불었고, 아침의 햇살이 그 폭풍을 반사하여 기묘한 환상을 만들어 냈다.
그 모습을 본 하벨의 병사 하나가 소리쳤다.
“호라다! 호라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이미 기세가 오를대로 오른 하벨의 병사들은 더욱 용기를 얻어 적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그 기세에 눌린 카렐리아 병사들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 번 일어난 균열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우익이 무너지고, 중군이 패퇴하고 좌익이 고립됐다.
좌익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도주하기 시작했고, 사기를 잃은 기병대는 적 기병대에 쫓겨나 전장에서 이탈했다.
“이럴 수는 없다.”
슈코브로 향하는 언덕 위에서 레벤호스트는 사색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럴 수는 없다고!”
주변의 중신들이 급히 그를 끌어내려 했다.
“전하!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왕인 내가 어찌 전장에서 달아날 수 있단 말인가?”
“전하가 잡히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적들이 옵니다!”
레벤호스트는 끝없이 진격해 오는 하벨의 보병대를 질린 눈으로 보았다.
“…….”
옆에 있던 부하 장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는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레벤호스트의 고개가 꺾이듯이 숙여졌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자랑하는 백마를 타고 쓸쓸히 전장을 떠났다.
소수의 화려한 귀족 호위대가 그를 호위했지만 패배한 왕의 행렬은 어느 때보다 초라해 보였다.
슈코브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하벨은 압승을 거뒀다.
3천 명을 잃었지만 만 오천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모든 대포를 노획하고 군기 42개를 강탈했다.
완벽한 승리다.
만슈타인이 그러했듯이 하벨 또한 승리의 공을 황제와 선제후, 그리고 호라에게 돌렸고 전공으로 인한 보상은 그의 부하들에게 달라고 겸손하게 진언했다.
* * *
레벤호스트가 패배했다는 소식은 곧 만슈타인의 귀에도 들어갔다.
느릿하게 트라이아 동맹국을 착취하던 만슈타인은 속도를 올렸다.
멀리 트라이아의 수도 팔부르그가 보인다.
그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일찍 여기에 도착했다면 공성전을 준비했어야겠지.”
만슈타인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은 아무 저항 없이 문을 열 거야.”
과연 만슈타인의 말 그대로였다.
과거 트라이아 동맹국의 병사까지 군대에 편입한 4만 명의 보병대가 이르자 팔부르그는 아무 말 없이 성문을 열고 성벽에 백기를 내걸었다.
부하 장군 하나가 물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겁니까?”
이에 만슈타인이 답했다.
“수성을 하려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물자도 탄약도 아니야. 희망이지. 처음부터 희망이 꺾인 자들이 어떻게 수성을 하겠는가? 뭐, 죽고자 하는 대의가 있다면 모를까. 애당초 레벤호스트에겐 아무런 대의가 없지 않나? 도둑질당한 왕관을 쓴 자에게 대의라. 그런 게 있다면 누가 내게 알려 줬으면 좋겠군.”
만슈타인의 군대는 평온하게 도시를 접수했다.
선제후의 궁전은 얼마 전까지 계집질과 깡패질을 하던 병사들의 군홧발에 더렵혀졌고, 선제후의 예물과 그림은 모조리 뜯겨 나가 수레에 실렸다.
만슈타인은 명성 높은 레벤호스트의 마구간에 들렀다.
레벤호스트의 예언이 실현됐다.
만슈타인은 루돌프라는 이름의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말 한 마리를 루페르트에게 바치고, 나머지 준마는 전부 자신이 가졌다.
약탈자가 지나간 마구간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시정마로 쓰던 당나귀 한 마리만이 순진무구하게 아무것도 없는 마구간을 어리둥절하게 거닐 뿐이었다.
* * *
레벤호스트는 완벽하게 무너졌다.
이보다 더 철저한 패배도 없을 것이다.
패배한 왕-선제후는 치욕스러운 여정을 거쳐 저지대 연방에 숨어들었다.
노르드마르크가 황제에 치우친 중립을 선언한 시점에서 그를 받아 줄 땅은 제국 어디에도 남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평소 그토록 천대하던 저지대 연방인에게 몸을 의탁하고 만 것이다.
워낙에 처참한 패배였기에 아무런 재산 하나 가지고 오지 못한 그는 곧 저지대 연방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제 레벤호스트는 일어설 수 없다.
그는 반역자이고 심지어 처참한 패배자다.
황제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의 단호함은 슈코브에서 드러났다.
황제는 반역 주모자 12명의 사형에 관한 문서에 서명했다.
루페르트는 그다지 서명에 주저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11명만의 사형이 집행됐다.
나머지 1명, 이 모든 일을 계획한 비라네츠 백작은 레벤호스트가 패배하자마자 레벤호스트를 따라 저지대 연방으로 빠르게 도주했다.
남겨진 건 결국 카렐리아의 귀족이었다.
비라네츠를 제지할 수 있었던 야볼라프도 그중 하나다.
형장 앞에서 그는 도끼로 참수당하기 전에 형장에 모여든 군중을 보며 소리쳤다.
“황제에 전하라.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황제가 약속을 지켰다면…….”
도끼가 내리쳤다.
반역자는 모두 처형당했고 재산이 몰수당했다.
신교도 목사가 교회에서 쫓겨나고 대신 예전에 추방당했던 구교의 신부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카렐리아 동란은 그렇게 이상적인 형태로 수습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가. 뱅상페리에가 군자금을 대준다고 약속을 했다 이건가?”
빙해 너머엔 스베아라는 왕국이 있다.
그 나라의 왕은 수많은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