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214화 (214/225)

치국평천하-10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오래전, 이와 비슷한 불길함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태어나기도 이전.

‘생성’을 끝마치기 직전의 예감.

기대감 때문이리라 대수롭잖게 여겼던 그때의 묘한 예감이 되살아났다.

연위령의 위험한 도전.

화산파 장문인에게 전해진 비무첩.

비무에 패하고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더니, 전대의 장문인과 함께 다시 나가서 또 한 번 피를 뒤집어쓰고 온 화산파 장문인.

어째서 패한 화산파 장문인은 전대 장문인을 데리고 나가 다시 싸웠을까.

화산파 장문인을 꺾고, 가소롭다는 듯이 깔보며 도전자가 오만하게 요구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둘이 한꺼번에 덤벼보라고.

비무와는 상관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화산파 장문인의 패배로 비무는 종결되었고, 전대 장문인과 당대 장문인이 함께 나섰던 싸움은 그것과 전혀 별개의 다른 싸움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껏 날 선 그의 촉은 그런 가능성의 경우들에 반응하지 않았다.

삼정조화의 무도 고수는 일신에 천지 건곤을 품은 인외의 고수였다. 그 감각은 어렴풋이나마 예지와도 맞닿아 있는 바가 있었다.

하립을 불길하게 하는 가능성의 경우는 한 가지였다.

화산파 장문인이 패배의 수모를 설욕하고자 전대 장문인과 합공하여 도전자를 해코지했을 경우. 그리고 그 도전자가, 자신이 짐작하는 바로 그 사람일 경우.

물론 근거는 빈약했다.

비약적인 논리였다.

직관에 의지한 엉터리 추론을 믿고 싶은 대로 믿을 뿐이었다.

단지 과대망상이고 확증편향에 불과했다.

그러나 망상이든 무엇이든, 자꾸만 치밀어오르는 불길한 예감은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견딜 수 없는 이 불길함은 어쩌면 그의 영이 기억하고 있는 두려움일지도 몰랐다.

일찍이 살아오며 이루고 누린 것을 빼앗긴 기억. 생명을 멋대로 뿌리 뽑아 옮겨버린 천지에 대한 두려움.

하립은 섬서에 가고 싶어졌다.

직접 가서 이 예감이 모두 엉터리임을 확인하지 않으면 불길함을 도무지 해소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

불시당에서는 당청, 당진, 당곤, 당준이 전부 모여 간만에 형제끼리의 한담을 나누었다.

주된 화제는 당진의 재혼이었다.

언제나 돌부처 같은 표정 일색인 당진이었으나, 형제들은 당진이 첩과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내심 외로워했음을 알고 있었다.

당진은 어기응령의 극의에 도달하여 긴 수명과 젊음을 누리는 초고수였다. 그 긴 수명을 고독하게 보내지 않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로 마음먹었으니, 마땅히 축하해줄 일이었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습니다. 둘째 형님 때문에 어린 형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니.”

당준이 너스레를 떨며 농담을 던지고, 당곤이 맞장구를 쳤다.

당진은 큼큼 헛기침하며 딴청을 피웠다.

당청은 세 아우의 우애 돈독한 모습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찻주전자에 손을 뻗던 순간, 미간을 좁히며 멈칫했다.

뒤이어서 안색이 급변한 당진과 당곤이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형님들? 갑자기 왜들 그러십니까?”

아무도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당준은 이윽고 형제들의 얼굴빛이 굳은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가공할 기세가 동심원을 그리며 파문을 일으키듯 불어 닥쳐왔다. 세찬 바람에 창문이 흔들리고 나무가 춤을 추었다. 기왓장이 들썩거렸다.

당가타를 통째로 범위 안에 두고 있는 이 엄청난 파동은 흡사 거인의 심장 박동을 방불케 했다. 거인의 몸속에서 아주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의 소리와 진동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연거푸 몰려와 몸을 훑고 지나가는 파동과 기세. 지극히 혼란스럽고 불안정했다. 절제되지 않고 폭주하듯 약동하는 기파였다.

당청이 신법을 펼쳤다. 당진과 당곤도 기파의 근원을 향해 재빨리 달려갔다. 창졸간 세 형제의 신형이 막내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당준은 뒤따라가지 못했다. 끝없이 거세지는 기파의 압력이 무지막지했다.

얕게나마 무예를 익힌 그조차 점점 숨을 쉬기가 버거워질 정도였다. 기파의 근원으로 가까이 다가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기파의 근원은 송연각에 있었다. 송연각에 접근할수록 기파가 사람들을 짓눌렀다.

참으로 오랜만에 당청은 본연의 기세를 불러일으켰다. 부지불식간 들불처럼 크게 번져나간 당청의 기세가 송연각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파를 상쇄했다.

애당초 구체적인 살의가 실려 있는 기파는 아니었으므로 금세 진압할 수 있었다.

숨을 헐떡이던 가솔들은 간신히 심장을 옥죄는 듯한 압력에서 벗어났고, 황급히 대피했다. 당청은 곧바로 송연각의 서재까지 직행했다.

서재에는 하립이 있었다. 한 장의 서찰을 들고서.

당청은 보는 즉시 하립의 상태를 파악했다. 원인은 알 수 없었으나, 하립은 평정심이 깨져 있었다. 스스로가 기세를 마구잡이로 내뿜고 있음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듯싶었다.

서재 내부는 난장판이었다. 돌풍이 휩쓸고 지나가며 서책과 문서가 날아다녔고, 창문의 창호지는 갈가리 찢겨 나가 있었다.

단정하던 의관은 산만하게 흐트러졌다. 봉두난발이 휘날리고, 상투관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당청은 나지막하게 일갈했다.

“욕, 망, 정, 념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평정심을 되찾아라!”

호통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기백은 벼락처럼 하립의 귀에 내리꽂혔고, 천둥처럼 하립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서찰에서 눈을 뗀 하립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청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당청의 일갈의 통하여 하립은 차츰 평정심을 회복하고 삼정조화의 기세를 갈무리했다. 심장이 뛰듯 약동하던 기파가 잦아들었다.

“······.”

“······.”

서재에는 한동안 적막이 감돌았다.

문득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상투관을 일별한 하립은 그것을 주워 탁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당청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섬서에 다녀오겠습니다.”

“······.”

불가하다고 답하고 싶었다. 하다못해 이유를 묻고 싶었다. 지금 하립의 상태는 너무나 위태로웠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허나 당청은 이유조차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유를 말해주지 않을 테니꺼. 여기서 고개를 가로저어봐야 하립은 뜻을 굽히지 않을 테니까.

침묵 속에서 하립은 당청을 지나쳤다.

그가 서재의 문지방을 넘기 직전에 당청이 불쑥 물었다.

“돌아오긴 할 테냐.”

대답은 없었다.

당청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하립이 떠나고 얼마 후, 성도에서 덕평전장의 업무를 보는 중이던 교월이 소식을 듣고 급히 왔다.

그녀는 서재의 탁상에 덩그러니 놓인 상투관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

하립은 남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는 북으로 올라갔다.

진령산맥을 넘어 곧바로 섬서성에 도달하고자.

신법을 극한으로 전개한 하립의 신형은 마치 비룡을 방불케 했다.

구름을 거닐며 굽이굽이 산봉우리를 징검다리처럼 딛고, 밑바닥이 내려다보이지 않는 골짜기와 벼랑을 훨훨 날 듯 도약했다.

사천성을 외부와 분리하여 유구한 세월 동안 고립시켜놓았던 천혜의 장벽조차 삼정조화의 무도 고수에게는 담벼락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증명하듯.

구름조차 지나지 못하고 새조차 넘지 못한다는 진령산맥을 가로질렀다.

진령산맥을 주파하는 내내 그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단순히 심란한 수준을 뛰어넘어서 신경이 과민해질 정도였다.

섬서에 당도한 하립은 섬서 서안에 소재한 문원표국의 분타를 찾아갔다. 서안은 섬서성의 성도였으므로, 서안의 분타 역시도 섬서 각지의 다른 분타들보다 규모와 실력이 우수했다.

문원표국 서안분타 분타주는 이탁이라는 이름의 어기응령 무도 고수였다.

근자에 새로 들인 애첩을 듬뿍 총애해주고 단잠을 자던 어느 날 밤, 이탁은 기묘한 낌새를 느꼈다.

잠기운이 확 달아나버린 그는 머리맡의 채찍을 쥐고서 소리 없는 걸음으로 뜰에 나아갔다.

해가 뜨지 않고 달과 별마저 구름에 뒤덮인 뜰은 몹시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당신이 날 불렀소?”

어둠 속의 누군가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절묘하게도 그 순간에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누군가를 향해 쏟아졌다.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헤치고 흑포를 걸친 귀공자였다. 새하얀 피부가 달빛을 받으며 더욱 창백하게 보였다.

잔뜩 날이 선 표정은 파충류처럼 냉담하여 오싹하리만치 섬뜩했고, 두 눈에는 서슬 퍼런 기광이 흘렀다.

몹시도 비범한 자태였다.

귀공자는 아무런 위압감도 발산하지 않았으나, 어째서인지 이탁은 저절로 주눅이 들었다. 소슬한 바람이 불어오자 식은땀이 흘렀다.

두려운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채찍을 힘주어 잡으며 이탁이 재차 물었다.

“대관절 이 야밤중에 무슨 용건이시오?”

귀공자가 소매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내 던졌다.

서찰을 낚아챈 이탁이 그것을 펼쳐서 읽어보았다. 대번에 눈이 휘둥그레진 그는 서찰과 귀공자를 번갈아 보았다.

이 서찰은 문원표국의 소국주가 당씨문중의 소가주에게 보낸 서찰이었다. 일찍이 소국주의 친필 서한 몇 통을 받아본 바 있었는데, 필체가 똑같았다.

게다가 이 내용은 섬서의 문원표국 분타들이 소국주의 분부를 받아서 화산파에 관한 소문을 탐방하여 보고했던 내용이었다.

필체는 위조할 수 있을지언정, 어찌 내용까지 모사할 수 있을까. 이 서찰은 소국주의 친필 서찰이 자명했다.

“당씨문중에서 오셨소이까?”

이탁은 저 귀공자가 당씨문중 소가주의 심부름꾼이리라 짐작하며 물었다. 아무 대꾸도 듣지 못하고 질문만 한 지가 벌써 세 번째였다.

고개를 끄덕인 귀공자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화산파 장문인에 관한 소문,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예의를 차린 말투였다. 그러나 이탁은 귀공자의 목소리에 도사리고 있는 흉험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정말로 위험했다.

본능이 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체면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신중히 처신하지 않으면 큰 위기를 겪을 것 같았다.

“아······ 알겠소.”

야밤중에 불쑥 찾아온 결례에 항의하지도 못하고, 이탁은 그저 그렇게 고분고분히 답했다.

***

화산 아래에는 화음현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무당산 아래의 평운현처럼 고즈넉한 고을이었다. 허나 화산이 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속세의 탁류가 침범한 이후부터는 매우 화려하게 번창했다.

화음현에는 유흥가가 호황을 누렸다. 화산의 방탕한 도사들이 술과 고기를 먹고 여체를 탐하기 위해 자주 화음현의 유흥가를 찾아온 덕분이었다.

화산파와 연을 맺고 싶은 섬서의 부호들은 돈을 아끼지 않고 화음현의 유흥가에서 화산 도사들을 거나하게 대접했으니, 주루와 기루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남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여자를 낀 술자리에서는 으레 입이 가벼워지기 마련이었으므로, 하물며 도행이 얕고 자중하지 못하는 방탕한 도사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화산파 장문인의 비무첩에 대해서 처음으로 소문이 퍼져 나간 곳은 바로 이러한 화산 도사들의 술자리였다.

“그러한 소문이 떠돌 무렵에 장씨문중의 가주가 화산에 가서 여태까지 머물고 있다더이다. 시기가 공교로워서 이에 관련하여도 따로 조사하는 중인데······.”

서안분타주 이탁의 설명으로 정황을 소상히 알수록 심증은 굳어져만 갔다.

장씨문중의 가주가 화산에 머무르고 있다는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기억한 하립은 장씨문중으로 향했다.

장씨문중의 가주는 삼정조화의 무도 고수였다. 그쯤 되는 인물이면 화산파의 장문인에게 소문의 진위와 내막을 직접 들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그 장씨문중의 가주를 화산에서 불러와 물어보면 되는 것이었다.

장씨문중 가주를 불러오기 위해서는 사람을 많이 죽여야 했다.

만약 헛짚은 거였다면, 그 많은 사람은 억울하게 개죽음당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천 명을 죽이든.

만 명을 죽이든.

이 불길한 예감이 해소될 때까지 그는 절대 멈추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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